2022.09.30
  • 김지하와 생명사상의 이유
  • 기후변화 시대 근대의 종언
  • 근대의 기원 (1)
  • 중국은 조용히 달러의 제왕적 지위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 세계가 달러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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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백년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페미니즘과 영성spirituality, 언뜻 보면 둘은 참 나란히 두기 곤란한 개념처럼 보인다. 종교는 여성을 억압하는 일련의 사회적 기제로 작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도화/집단화된 종교에서 분포된 신앙만이 영성을 뜻하진 않는다. 영성은 인간 삶의 가장 높고 본질적인 부분이며, 순수하고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의 실천을 의미한다. 궁극적인 해방이자 진정한 자아 초월로 향하는 여정이다. 인간의 내적 수행으로서 영성을 새롭게 바라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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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나는 인제군민이 되었다. 내 고향 춘천을 떠나 서울에 온 지 약 십 년 만에 다시 강원도민이다. 그리고 오늘 강원특별자치도법이 통과되었다.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다. 어릴 때는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강원도가 이제는 특별하다. 나는 왜 강원으로 돌아가는가? 소를 찾아서다. 동물해방물결의 소 살리기 운동이 발단이다. 인천의 한 불법 농장에서 구조한 소 여섯 명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지난 일 년 간 동분서주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제군 남면 신월리와 인연이 닿았다. 폐교에 소 보금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마을에서는 젊은이가 온다고 반겨주신다. 인구 소멸 위험 지역이다. 소 살리는 일이 마을 살리는 일이 되었다. 소 여섯 명이 오면, 청년 육십 명이 따라 이주할 것이며, 관계 인구 육백 명이 생길 거라고 공언했다. 나부터도 소 옆에 살고 싶어서 전입신고를 했다. 곧 소 집도 짓고, 사람 집도 꾸밀 것이다. 나는 소랑 살아본 적이 없다. 개랑은 살고 있지만, 소는 아직 멀다. 동해물이 구조한 머위, 메밀, 미나리, 부들, 창포, 엉이는 현재 인제군 서화면 하늘내린목장에서 임시 보호 중이다. 아마 올 여름에는 신월분교로 이사할 것이다. 선종에서는 본성을 찾는 과정을 소 찾기에 비유한다. 그래서 심우도(尋牛圖), 소를 찾는 그림이 선방에 많이 걸려 있다. 중국 송나라 곽암선사가 그린 것이 대표적인데, 총 열 단계로 나뉘어 있어서 ‘십우도’라고도 불린다. 1933년, 한용운은 성북동에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불렀다. 소를 찾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참된 나, 참나를 찾는 것이다. 참나는 무엇인가? 곽암에 따르면 1단계는 심우, 바로 소를 찾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일단 깨닫고 싶다는 마음부터 먹어야 한다. 2단계는 견적, 발자국을 보는 것이다. 본성은 못 찾아도 흔적을 본다. 3단계는 견우, 소를 발견한다. 본성이 어딨는지 알아챈다. 4단계는 득우, 소를 얻는다. 깨달음을 얻는다. 견성이라고도 한다. 5단계는 목우, 소를 길들인다. 깨달음을 소화한다. 6단계는 기우귀가. 소를 타고 피리 불며 집으로 돌아온다. 소와 완전히 하나되었기 때문에 고삐도 필요없다. 7단계는 망우존인, 소는 없어지고 사람만 남는다. 객체가 사라지고 주체만 남는다. 8단계는 인우구망, 사람도 소처럼 없어진다. 객체가 없으니 주체도 없다. 이 상태를 곽암은 텅빈 원(O)상으로 그린다. 9단계는 반본환원, 근본과 근원으로 돌아가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본다. 주객 구분 없이 세상을 바라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나와 너가 따로 있지 않고 모두가 참나다. 궁극의 깨달음이다. 10단계는 입전수수, 시장에 나가 손을 모은다. 중생을 구하는 것이 깨달은 자의 역할이다. 소는 내가 아닌 존재, 타자화된 생명의 상징이다. 왜 하필 소인가? 소는 원래 가족이었다. 같이 농사짓는 일꾼이었다. 여기저기서 많이 보였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태어난 우리 세대는 소가 낯설다. 찾지 않으면 볼 수 없다. 소는 없고 소고기와 소젖만 널려 있다. 나는 소를 찾고 싶어서 고기와 젖을 피한다. 비건이 된다는 건 소의 발자국을 보는 것, 즉 견적이다. 나의 생태 발자국을 생각하는 것이다. 철저히 객체화되고 상품화된 소를 나와 같은 생명으로 인지한다. 그 다음은 소를 찾아야 한다. 직접 만나서 눈을 들여다 본다. 소를 껴안고 음악을 연주할 것이다. 피리를 불고 싶다. 나의 반려견 왕손이는 내가 리코더를 불면 노래한다. 소들은 어떨까? 왕손이를 안으면 아무 생각도 없다. 내가 왕손이고 왕손이가 나다. 마찬가지로 나와 소의 구분이 사라지면, 소는 나고 나는 소다. 참나는 소다. 동시에 나는 나고 소는 소이기도 하다. 동물해방은 주체화된 인간 동물과 객체화된 비인간 동물의 경계를 허문다. 사람의 언어, 이성으로 나눈 주객 구분을 초월한다.  여섯 소 중 누구랑 제일 친해질지 궁금하다. 나는 부들이가 떠오른다. 유일하게 뿔이 아래로 자란 친구다. 하지만 아직 소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축사에 갇힌 것만 보았다. 보금자리에서 뛰노는 장면을 보고 싶다. 소의 참모습이 궁금하다. 부들이를 길들여도 타지는 않을 것이다. 같이 산책하고 싶다. 피리 불며 호숫가로 나가서 산과 물을 마주한다. 소의 눈으로 세상과 나를 본다. 그것이 나의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때, 비로소 참나를 찾는다. 내 이름, 범선의 선(禪) 자가 참선할 선이다. 이름따라 산다. 소를 찾아서 인제로 간다. 미국과 영국, 동두천과 해방촌을 거쳐 강원도로 돌아간다. 소양호 아랫동네 춘천 출신이 소양호 윗동네 신월리 주민이 됐다. 귀소본능인가? 텅빈 원 하나 그리려고 길을 나선다. 소를 찾는 길이 나를 찾는 길이다. 소를 살리는 일이 마을 살리는 일이다. 신월리에 심우장, 소 찾는 집을 하나 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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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각 잡고 명상을 시도했던 건 약 8년 전. 친구가 다니던 요가원은 회원이 지인을 동반하면 1회 무료 체험이 가능했다. 당시 가난했던 나는 공짜에 솔깃해 요가원으로 향했다. 요가원에 처음 발을 들였다. 수업은 약 한 시간가량 진행되었는데, 태양 예배 자세(수르야 나마스카, Sun Salutation)로 시작해, 다양한 아사나들을 흐르며 움직였다. 당최 모든 동작이 처음이었으며, 어디에 힘을 싣고 팔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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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는 관계의 그물이다. 그물은 날줄과 씨줄, X축과 Y축으로 교차한다. 다시 말해, 관계는 수평과 수직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진리를 담은 상징이 십자(十)다. 삼라 만상이 그렇듯이 십자는 고정 불변이 아니다. 끊임없이 돌아간다. 이러한 진리를 담은 상징이 만자(卍), 스와스티카다. 수평과 수직으로 빚어진 관계가 돌고 도는 것이 우주의 역사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인간 이전까지 동물의 몸은 수평이었다. 머리와 항문이 같은 높이였다. 위아래보다 앞뒤가 중요했다. 직립 보행은 인간의 효시다. 네 발로 다니던 동물이 두 발로 섰다. 약 4백만 년 전의 일이다. 영장류 중 꼬리가 없으면 유인원이고, 유인원 중 두 발로 걸으면 인간이다. 인간다움이란 꼿꼿이 일(1)자로 서는 것이다. 수평인 땅 위에 수직인 사람이 솟아났다. 앞뒤보다 위아래가 중요해졌고, 위는 곧 머리였다. 이것이 인류를 만든 최초의 혁명이다. 혁명은 본디 돌아감(revolution)이다. 수평(一)이 돌아가면 수직(1)이 된다. 꼿꼿이 서면서 등장한 인간은 그 자체가 오랜 영장류 혁명의 결과다. 수직인 나무에서 수평으로 다니던 원숭이가 수평인 땅으로 내려와 수직으로 일어났다. 안테나처럼 머리를 위로 세우고 대지를 활보했다. 직립 보행은 인간의 두뇌가 폭발적으로 커질 수 있게 했다. 앞다리가 자유로워지고 시각 의존도가 커지자, 감각과 운동을 관장하는 두뇌 영역이 재조직되고 확장됐다. 골반이 좁아지자 태아의 두개골이 작고 유연해졌고, 그래서 뇌가 커졌다는 이론도 있다. 어쨌든 인류의 두뇌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됐고, 호모 하빌리스(약 230만~160만년 전)와 호모 에렉투스(약 200만~10만년 전)를 거치면서 그래프의 무릎, 굴곡부를 지났다. 호모 사피엔스(약 20만년 전~)에 이르러 오늘날 우리와 같은 크기의 두뇌가 나타났다. 인간의 전두엽은 지구상 가장 복잡한 생명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다. 바로 그곳에서 5만년 전, 또다른 혁명이 일어난다. 바로 인지 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다. 대략 7만년 전에서 3만년 전 사이, 인간의 언어는 질적으로 바뀌었다. 과학자들이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라고 부르는 유전자가 등장하여 사피엔스의 두뇌 회로를 새로 감았다. 상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 감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시대 다른 인간 종인 네안데르탈인의 언어와는 차원이 다른 복잡성이었다. 선악을 구분하고, 죽음 이후를 상정했다. 종교와 형이상학의 시원이다. 사회 조직 능력이 발달하여 자연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사피엔스는 곧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고,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를 전부 식민했다. 인지 혁명이 곧 천지창조이며 천개지벽이다. 우주는 본디 하나다. 우리가 하늘이라 부르는 것과 땅이라 부르는 것이 원래는 하나의 연속체다. 오직 인간만이 그것을 둘로 나누어 이름짓고 따로 부른다. 하나를 둘로, 셋으로, 여럿으로 분석하는 것이 언어의 역할이다. 인간은 인지 혁명을 통해 우주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주가 인간을 통해 스스로를 여럿으로 나누었다고 볼 수도 있다. 태극이 처음으로 갈라져 음과 양이 되었다. 창세기 1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운을 떼지만, 요한 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한다. 하나의 혼돈(카오스)이었던 우주를 천지, 하늘과 땅으로 나눈 것은 언어라는 뜻이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도덕경 1장도 같은 내용이다.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머니다. 다시 요한 복음: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인간이 말을 쓰고 이름을 지음으로서 만물이 비롯되었다.  하나인 우주, 하나님을 하늘과 땅, 두 님으로 나누어 부르는 행위가 천지창조이자 천개지벽이다. 하나(一)가 둘(二),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으로 갈라졌다. 창조와 개벽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도 원래 우주와 하나다. 하나님이다. 천지창조와 천개지벽을 일으킨 하나님은 바로 사람이다. 하늘 땅, 위 아래를 가르고 나니, 그 사이에 사람이 있었다. 둘이 셋(三)이 되었다. 태극이 삼태극이 되었다. 인류는 오랫동안 하늘과 땅이 평평한 줄 알았다. 스스로 땅(土)이라는 수평선(一) 위, 하늘(天)이라는 수평선(一) 아래 서있다(人)고 인식했다. 그러한 세계관은 수직적이다. 위아래가 분명하다. 사회도 수직적으로 조직되었다. 하늘의 아버지가 위고 대지의 어머니가 아래다. 우두머리가 위고 수족이 아래다. 수직적인 세계관은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하늘과 땅 가운데 있는 동물 중 인간만 수직으로 서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 5백년 전 또다른 혁명이 일어난다. 바로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다. 과학 혁명의 시작은 갈릴레오(1564~1642)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망원경으로 발견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로 땅이 둥글다는 사실도 널리 인식된 때였다. 평평한 줄만 알았던 땅이 알고 보니 해와 달처럼 둥그런 구였다. 지구는 모든 천체와 마찬가지로 뱅뱅 돌고 있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면서 자기도 돈다. 공전과 자전이 모두 레볼루션이다. 바로 이 레볼루션에 대한 인식이 인간의 우주적 위치를 바꾼다. 하늘과 땅이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자각, 지구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자각이 과학 혁명의 골자다. 인지 혁명이 첫번째 천지창조, 선천개벽이었다면 과학 혁명은 두번째 천지창조, 후천개벽이다. 우주가 인간을 통해 그렸던 자화상을 완전히 새로 고쳤다. 하나인 님을 하늘과 땅으로 나누는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했다. 새로운 세계, 새누리가 등장했다. 하늘 땅이 평평하다고 가정했던 선천시대에는 천상 세계와 지하 세계를 상상할 수 있었다. 하늘이라는 지붕 위에 천국(天國), 하늘나라가 있었고 땅이라는 바닥 아래 지옥(地獄), 땅 감옥이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지상 세계는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과학 혁명 이후, 천상과 지상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땅은 둥글고 하늘은 무한하다. 땅이 아닌 곳은 전부 하늘이다. 땅 위가 하늘이라고 할 수도 없다. 둥그런 것에 위아래가 어딨나? 땅끝에서 하늘이 시작하고 하늘 끝에서 땅이 시작한다. 생각해보자. 어디서부터가 하늘인가? 백두산 꼭대기는 하늘이고 내가 사는 남산 자락은 하늘이 아닌가? 사람이 발딛고 있는 땅바닥부터가 하늘이다. 내가 마시는 공기가 하늘 기운, 사는 나라가 하늘 나라다. 과학 혁명 이후, 사람은 더이상 하늘과 땅 사이에 끼인 존재가 아니다. 두 개의 수평선(二) 사이에 수직으로 우뚝선(人) 생명이 아니다. 지구(O)와 하나되어 돌고 도는 님, 하나님이다. 지상이자 천상에 사는 땅님, 하늘님이다. 과학 혁명이라는 제2차 천지창조, 후천개벽은 하늘/땅 이원세계를 하나의 지구님으로 일원화했다. 원래 하나지만, 인간의 말씀, 로고스, 이성으로 인해 둘이 되었던 우주가 다시 하나됐다. 후천개벽은 또 한 번의 천지창조이자 천지통일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늘나라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천상 세계, 천국이 죽은 뒤에 영혼으로 승천하는 내세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라는 진리를 뒤늦게 깨달았다. 인간은 여태 하늘님이었지만, 자신을 부정하고 저 위, 저 너머, 하늘의 신령을 숭배했던 것이다. 헛으로 상상하며 우상을 만들었다. 이 땅의 중생, 짐승을 천시하고 오직 사람의 영혼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나라의 아랫것들, 백성이 굶어 죽어도 저 위의 조상님이 드실 밥상은 꼬박꼬박 챙겼다. 이원적이고 수직적인 세계관의 치명적인 오류다. 그런데 16세기 과학 혁명이 천지통일과 신인합일을 낳았다. 하늘과 땅이 하나고 신과 사람이 하나의 님이다. 이걸 직시하니까 기존의 수직적인 관계도 무너졌다. 종교 개혁과 계몽주의,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모두 과학 혁명의 산물이다. 수직이 수평으로 돌아가는 혁명, 레볼루션이다. 후천개벽의 참뜻을 사람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스스로를 하늘과 땅 가운데 세워두었던 인간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둥그런 지구와 함께 돌고 도는 하늘님으로 거듭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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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꿍과 내가 공저한 책 <비혼이고요 비건입니다>가 출간됐다. 본래 비거니즘 에세이인데, 출판사의 권유로 ‘비혼’이라는 키워드가 제목으로 뽑혔다. ‘비거니즘’ 못지않게 ‘비혼’도 열풍인가 보다. 책을 낸 이후로 MZ세대의 새로운 사랑 관계를 다루는 방송 출연 섭외가 들어오고, 비슷한 주제로 패션 매거진 화보 촬영도 했다. 사실 책의 내용은 제목에 실릴 만큼 비혼주의를 다루지 않는다. 분명 나는 비혼주의자이고, 우리는 비출산주의자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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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월리에 다녀왔다. 동물해방물결의 소 보금자리 조성을 위해서다. 나는 작년 봄, 처음으로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을 방문했다. 이병한 선생님 소개로 정성헌 이사장님을 뵈었다. 소를 살려야 하니 땅을 알아봐 달라고 간청했다. 무모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봤지만 다들 무관심하거나 당혹스러워 했다. 수도권에서는 불가능했다. 중심은 너무나도 빽빽해서 틈이 없었다. 소를 살리려면 지방으로 가야했다. 인간이 채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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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1년 넘는 시간 동안 끔찍한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 매일 반복되는 폭력에 나의 몸과 마음은 지독하게 병들었다. 식욕 저하가 심해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170cm의 키에 44kg까지 살이 빠져 앙상하게 뼈가 보였고, 죽음만 바라보며 겨우 살아있었다. 면역력이 떨어져 입술에 포진이 사라지지 않았다.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려 침대에서 나오는 일조차 버거웠다. 신경쇠약, 우울증, 불안증, 공황장애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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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은 음식이 결정한다. 약은 이미 몸이 잘못되었을 때 쓰는 것이다. 평소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밥이다. 그래서 밥이 보약이다. 지지는 원래 건강 때문에 채식을 시작했다. 나는 윤리적인 이유로 시작했다가 건강상의 혜택을 보았다. 평생 골치거리였던 등드름이 말끔히 사라졌다. 우유, 치즈, 계란을 먹는 베지테리언일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동물성 제품을 전혀 먹지 않는 비건이 되자 곧바로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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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0월 14일, 동물 해방을 향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보신각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서울 시내를 걸으며 동물의 권리를 촉구하는 ‘동물권 행진’이 열렸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에서 주최한 행사였다. 당시에 나는 발리에 살다 잠시 한국에 들어온 초보 비건이었다. 한국 동물권 운동에 기여하고자 설레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너무 설레었던 나머지 택시를 타고 장소에 급하게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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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아기가 되는 일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이상, 사랑하면 사랑받고 싶다. 사랑에 대한 갈망은 갓난 아기 때의 기억을 호출한다. 가장 연약하고 불안했던 시절을 상기한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생명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 포유류 새끼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모체로부터 분리되어 세상으로 발사된 후 겪어야 했던 곤경. 하나가 둘이 되어 느끼는 외로움. 그때 모부의 사랑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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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에 관한 글을 쓰려는 차에 마침 버섯이 떨어졌다. 버섯은 채식 생활에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요소다. 버섯 농부에게 주문을 넣고 며칠 뒤 양양에서 생표고버섯이 담긴 택배가 도착했다. 기온이 높고 습한 여름철에는 금방 상하기 때문에 얼른 박스를 열어 환기를 시키며 곧바로 손질한다. 한여름에 자연농 재배 버섯이 나오지 않는 이유다.  1킬로의 표고버섯 중 3분의 1은 냉장 보관해 열흘 안에 요리해 먹고, 나머지는 머리와 밑동을 분리해 머리는 썰어서 냉동 보관하며 갖가지 요리에 사용하고, 밑동은 얇게 찢어 버섯 장조림을 만든다. 생표고는 수분이 잘 흡수돼 금방 상하기 쉬운 상태가 되니 요리하기 직전을 제외하고 물에 씻지 않는다. 혹은 웬만하면 씻지 않고 먹는다. 유기농으로 자란 버섯은 웬만하면 흙만 대충 털어먹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버섯을 좋아한 적이 있었던가? 감자탕, 제육볶음, 된장찌개, 반찬 등 기존에 먹던 음식에서 항상 부가적으로 존재하는 재료였다. 그의 존재감은 탕수육 소스에 들어간 당근처럼 미비해 남기기 일쑤였다.  육식을 끊고 식물성 식재료의 세계를 접하며 가장 먼저 매료된 건 버섯이다.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만가닥버섯, 목이버섯, 팽이버섯, 노루궁뎅이버섯, 송이버섯, 새송이버섯, 양송이버섯, 송로버섯, 잣버섯, 깔때기버섯, 방망이버섯, 뽕나무버섯, 우단버섯, 배꼽버섯, 애기버섯, 부채버섯, 긴뿌리버섯, 먹물버섯, 볏집버섯, 풍선끈적버섯, 젖버섯, 꾀꼬리버섯, 나팔버섯, 턱수염버섯, 노랑망태버섯···. 한국에서만 97여 종의 식용 버섯이 자라지만 익숙한 열댓 가지 남짓만 시중에 유통된다. 버섯 우린 채수의 담백한 풍미를 맛보면 멸치나 고기 육수 따위는 그립지 않다. 원초적인 자연의 무궁무진한 맛을  재발견할 때마다 채식하길 잘했다는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다행히 동물도 아니다. 버섯은 균으로 분류된다. 어쨌거나 살아있는 생물인데, 그것도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생존한 생물 중 하나이자 조상이다. 그만큼 생태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생물이 수명을 다하면 균이 사체를 분해해 다른 생명을 낳는 초석인 유기물, 즉 비옥한 토양이 된다. 인류도 6억 5천만 년 전 균류에서 갈라져 탄생한 유기체다. 우리가 음식을 섭취해 에너지를 전달받고 배설하면 거름이 되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자연이라는 거대한 순환 시스템은 모두 유사한 형태를 띤다.  동물을 먹는 행위는 내가 피울 수 없는 생명을 취하고 순환을 막는 어리석은 짓이다. 채소가 풍부하면 고기는 필요 없다. 인류의 진보와 함께 육식을 중지하는 것이 운명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고결하고 건강한 식습관을 가져야 한다. 풍요로운 양분이 축적된 땅에서 자란 식물을 먹는다는 것은, 오랜 시간 지구에 생존하며 저장된 생명의 유전자를 섭취하는 미적, 미각적, 미학적인 의식이다.    구운 새송이버섯 새싹 샐러드 입맛 없고 요리하기 귀찮은 날을 위한 별미. 구운 버섯의 풍미와 싱그러운 새싹 채소가 기운을 북돋는다.  ᄋ 재료 : 새송이버섯, 새싹 채소, 썬드라이 토마토, 소금, 후추, 스테이크 시즈닝, 파슬리, 올리브유, 발사믹 식초, 레몬즙 1.   새송이 버섯을 일정한 두께로 세로로 썰고 한 면에 칼집을 낸다. 2.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중약불에 버섯을 뒤집어가며 노릇해질 때까지 굽는다. 소금, 후추, 스테이크 시즈닝을 한 꼬집씩 뿌려 간을 맞춘다. 3.   접시에 구운 버섯과 새싹을 올린다. 새싹에도 소금, 후추 를 한 꼬집 뿌리고 레몬즙, 올리브유, 발사믹 식초를 두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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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손이가 돌아왔다. 왕손이는 나의 원죄와도 같은 존재다. 2010년, 스무살 때 나는 서울에서 잠시 자취를 했다. 난생 처음 오피스텔에 혼자 살았다. 평생 부모님과 같이 살다가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외로울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자마자 서울에서 나홀로 타향살이를 하니 외로웠다. 당시 만나던 애인은 통금이 11시였다. 나는 <혼자가 되는 시간>이라는 노래를 작곡할 정도로 밤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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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1일은 세계 비건의 날. 1994년에 비건 소사이어티의 루이즈 월리스가 제정했다. 11월 11일이 빼빼로데이인 건 숫자 11이 빼빼로를 닮아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만 비건의 날은 도저히 모르겠다. 아마 월리스 씨가 비거니즘을 지향하기 시작한 날이려나.  ‘비건의 날’을 기념하는 건 아니지만, 근래에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새 식구가 생겼다! 이름은 왕손, 12세, 잉글리시 코카 스파니엘, 남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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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 발족 이후 저는 여러 매체에 비거니즘 관련 글을 썼습니다. 가장 큰 화두는 ‘비거니즘’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였습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사상과 운동을 한국에 도입하면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채식주의’는 너무 한정적이었습니다. 먹는 것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물주의’나 ‘중생주의’, ‘짐승주의’ 역시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저는 비거니즘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역사를 알아보고, 나아가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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