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8
  • 당 내려온다 힘이 올라간다
  • 발리에서 놓친 기회
  • 무한한 사랑
  • 살림과 전환
  • 발리의 G20 회의는 ‘현시기의 세계정부’임을 입증했다
       
후원하기
다른백년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잃어버린 30년 나는 80년대에 초중고를 다녔고 9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초중고 때 주로 배웠던 것은 ‘국가’에 관한 것으로 기억된다. 국어, 국사, 국민윤리, 국민의 의무, 국민교육헌장, 애국가 등등. 그리고 대학과 대학원 시절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였다.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도 푸코나 데리다를 한번쯤 언급해야 ‘멋져’ 보이는 시대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알게 된 사실은 그때 서양에서는 지구학이 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READ MORE

  인류세와 생명평화 이제 슬슬 연재를 마무리 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서양의 인류세 담론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작업에 치중했는데, 오늘만큼은 한국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그래야 <k-사상사>라는 주최측의 기획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류세’ 개념이 제창되었던 2000년에 한국에서는 ‘생명평화’라는 말이 탄생하였다. 그래서 나이로 따지면 생명평화와 인류세는 동갑인 셈이다. 생명평화 개념이 탄생한 해가 […]

READ MORE

   자연(nature) 담론의 대두 『자연의 죽음』(캐롤린 머천트, 1980), 『자연의 종말』(빌 맥키벤, 1989), 『자연의 정치학』(앤드루 돕슨, 1993), 『자연의 정치학』(니콜라스 로, 1993), 『자연의 정치신학』(스콧 피터, 1993), 『자연의 정치학』(브뤼노 라투르, 1999), 『자연없는 생태학』(티모시 모튼, 2007), 『자연없는 기후』(앤드류 바우서, 2018)…  서양에서 나온 생태학에 관한 책들을 일별하다 보면 1980~1990년대부터 〈자연〉을 주제로 한 책들이 부쩍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

READ MORE

  거장의 죽음 몇 년 전에 《뉴욕타임스》에서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2018년 10월 25일)하고 소개했던 브뤼노 라투르(1947~2022)가 지난 10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유작은 「사회이론 문제로서의 가이아(Gaia as a Problem of Social Theory)」였다. 이 논문은 올해 7월에 나온 공저 Writing Gaia: The Scientific Correspondence of James Lovelock and Lynn Margulis (Cambridge University Press)에 수록되어 있는데, […]

READ MORE

  심층지구와 표층지구 차크라바르티에 의하면, 기후변화는 그동안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행성(planet)을 자각하게 하는 사건이다. 그것은 globe의 심층에 있는 ‘깊은 지구(deep Earth)’의 현현이자, 깊은 시간(deep time)과 깊은 공간(deep space)과의 만남이다. 이 ‘깊이’야말로 그동안 근대 담론에서 소외되고 배제되었던 영역이다. 근대의 시공간은 globe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globe는 인간이 가공할 수 있는 ‘표층 지구(surface Earth)’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지구에는 […]

READ MORE

  글로브(globe)에서 플래닛(planet)으로 역대급 태풍으로 알려진 ‘힌남노’가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미디어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이런 제목의 기사들을 내보냈다.   태풍이 할퀸 포항  제주 곳곳 할퀸 태풍 부산 울산 할퀸 힌남노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말이 있다. 그것은 ‘할퀸다’이다. 이것을 지구인문학적 개념으로 바꾸면 ‘행성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에는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것을 […]

READ MORE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사물 사물들이 힘을 갖고 있고, 그것이 인간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인민’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제인 베넷이 『생동하는 물질』의 마지막 부분에서 전개하는 주장이다.    비인간(nonhumans)을  인민(demos)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동하는 물질』, 96쪽.   여기에서 ‘인민’의 원어인 demos는 고대 그리스어로, democracy(민주주의)에서의 demo와 같은 말이다. 영어로 바꾸면 people에 해당하고 public(공민)과 상통한다. 따라서 “비인간=사물을 인민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은 사물을 정치적 행위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생동하는 물질』의 다른 곳에서는 “비인간 물질성을 정치적 생태학의 참여자로 인정한다”(266쪽)고 표현하고 있다. 『생동하는 물질』의 부제가 “사물들의 정치생태학”이고, 서두에서 “이 책은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자 <정치적 기획>이다”라고 선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물이 정치적 행위자로 간주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베넷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고 있다.   허리케인이 대통령을 실각시킬 수 있는가?  에이즈를 일으키는 면역결핍 바이러스가 동성애 혐오나 복음주의의 부활을 유발할 수 있는가?  – 『생동하는 물질』, 264쪽.   여기에서 허리케인이나 바이러스는 자연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현상으로 인해 정치적 지형도가 바뀔 수 있다. 요즘 같으면 코로나 대응이나 폭우 대책의 잘못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물도 정치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베넷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물들의 민주주의 이러한 관점에서 베넷은 먼저 종래의 정치 개념이 인간에게 국한되어 있었다고 비판한다.     생기적 유물론자의 민주주의 이론은 말하는 주체와 침묵하는 객체 사이의 구분을 일련의 차이나는 경향들과 변화하는 능력들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내 생각에 이것이 다윈과 라투르가 벌레 이야기를 했을 때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다. (…) 인간의 신체, 바이러스의 신체, 동물의 신체, 기술적 신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점차 강해지면, 능동적 주체와 수동적 객체의 세계를 가정하는 민주주의 이론이 한때의 빈약한 설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 『생동하는 물질』, 264-266쪽.    베넷에 의하면, 종래의 민주주의는 존재를 주체와 객체로 나누고, 주체는 ‘말하는 인간’, 객체는 ‘수동적 사물’로 각각 간주한 뒤에 ‘인간’에 한해서만 민주주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과 비인간이 ‘행위성’을 공통분모로 양자가 서로 얽혀 있다면, 양자를 주체와 객체로 양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베넷의 생각이다. 베넷은 이것을 논증하기 위해 존 듀이의 ‘공민(public)’ 개념을 가져온다.   공민(public)을 연합 행위(conjoint action)의 산물로 제시하는 듀이의 설명은 역동적인 자연생태계와 많은 점을 공유하는 정치 체계를 그려낸다. 이러한 주장은 (…) 비인간 신체들을 공민(public)의 구성원으로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어떻게 그들이 연합 행위에 참여하는지 뚜렷이 주목하는 (…) 행위 이론을 위한 길을 열어준다. […]

READ MORE

  제인 베넷의 예언 발 플럼우드가 지적했듯이, 인간이 다른 생물과 먹고 먹히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면, 인간 이외의 존재, 즉 〈사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즉 사물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고찰하는 것이다. 사실 〈인류세 철학〉의 핵심은 사물에 대한 철학적 탐구, 즉 〈사물철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물에는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에서부터 지구와 같은 거대 […]

READ MORE

  “지구민주주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지구 가족의 일원이고, 우리가 동물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Vandana Shiva, “Earth Democracy : Sustainability, Justice, and Peace” (2019)   벌레가 사람을 먹는다 서래 : 개미가 사람을 먹어요? 해준 : 맨 먼저 금파리가 나타나요. 낮이건 밤이건 10분 안에 도착해요. 피와 분비물을 먹은 다음에 상처나 인체의 모든 구멍에 알을 낳아요. 거기서 구더기가 나오면 그걸 먹으려고 개미가 모이죠. 그 다음에 딱정벌레하고 말벌들…. 그것들이 사람을 […]

READ MORE

  기화의 변화 1860년은 한국사상사에서 중요한 해이다. 이 해에 최제우는 경주에서 득도를 하였고, 최한기는 서울에서 『인정(人政)』을 저술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때가 4월인데, 최한기가 『인정(人政)』의 서문을 쓴 것도 4월이라는 사실이다. 동학과 기학, 기학과 동학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느껴진다. 『인정(人政)』에는 「경장(更張)」이라는 짧은 글이 수록되어 있다. ‘갑오경장’이라고 할 때의 ‘경장’이다. 따라서 ‘경장’은 지금으로 말하면 ‘개혁’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천하의 일에는 경장할 것이 많이 있다. 단 운화교(運化敎)에는 경장할 것이 없다. 단지 수시로 수행(修行)하여, 운화기(運化氣)에 어긋남이 없으면 될 뿐이다. 하루 이틀에서 한달 일년에 이르기까지 (운화기를) 잘 살펴서 따르면 된다. 천년이 지나도 마찬가지고 만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人政(인정)』 권12 「敎人門(교인문) 五」「更張(경장)」   과연 기학자(氣學者)다운 발언이다. 천만년이 지나도 ‘운화하는 기’에만 따르면 된다니 – . 게다가 <운화교(運化敎)>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는 점이 놀랍다. “기의 활동운화를 궁극적인 가르침”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일견 신비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요즘같이 대기가 불안하고 기후가 상승하는 시대에는 흘려 들을 수 없는 말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문장이다.   만약에 기화가 변하면 마땅히 경장을 해야 한다. 기화가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경장은 없다. (氣化若變, 則當有更張; 氣化不變, 則永無更張.)   최한기는 유학을 경장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기학’을 내놓았다. 그런데 지금은 기화가 변한 시기이다. 따라서 최한기의 논리대로라면 기학을 경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유학의 경장>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최한기도 크게 보면 유학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평천하(平天下)에서 안천지(安天地)로 사실 “유학을 현대화해야 한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다. 대학원 다닐 때 정인재 교수님께서 『대학(大學)』의 팔조목을 보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전통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않아서 제가(齊家)와 치국(治國) 사이에 〈화사(和社)〉를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사’는 “사회를 조화롭게 한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이미 20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과연 대가다운 통찰이다.  수신(修身) – 제가(齊家) – <화사(和社)>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 한국사회에서 종종 ‘공공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세월호 사고가 나던 해에 SBS에서 〈공공성 꼴찌 국가 한국〉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전통 유교사회에서는 ‘국가’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가정[家]과 나라[國]에 논의가 집중되어 있었다. 그 중간 영역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논의는 서양어 society의 번역어가 들어온 뒤의 일이다(가령 1931년에 나온 이돈화의 『신인철학』에는 ‘사회’라는 말이 무수히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저 도식에서 여전히 걸리는 게 있다. 바로 ‘천지(天地)’ 항목이 없다는 점이다. 요즘같이 생태위기나 기후변동이 심각한 상황이라면 천지를 안정시키는 것도 리더의 덕목이지 않을까? 아니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1992년에 리우(Rio)에서 있었던 <Earth Summit – Global Forum>에서는 세계 정상들이 ‘지구환경’ 문제를 놓고 회담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평천하’ 다음에 <安天地(안천지)>를 넣어 보았다. 平天下(평천하)가 Globe 차원이라면 安天地(안천지)는 Planet 차원이다. Global은 흔히 ‘지구적’이라고 번역되지만, 여기서 ‘지구적’은 ‘국제적’이나 ‘세계적’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Planet은 ‘행성 지구’라고 할 때의 행성로서의 ‘지구’를 가리킨다.  수신(修身) – 제가(齊家) – 화사(和社)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 – <안천지(安天地)>            격물(格物)에서 경물(敬物)로 그런데 이렇게 해 놓고 보니 또 하나 걸리는 게 있다. 그것은 ‘인간 이외의 존재(nonhuman)’에 대한 관심이다. 『대학』의 팔조목에는 사람 이야기는 있지만 사물이나 생물에 대한 배려는 없다. 물론 ‘격물(格物)’이 있긴 하지만, 여기서 물(物)은 주체라기보다는 객체에 가깝다. 주자학적으로 해석하면,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근대 시기에는 사물을 탐구하여 결국 자원으로 이용하지 않았던가? “아는 것이 힘이다”고 베이컨이 말했듯이 말이다. 게다가 요즘은 교육이 대중화되고 평준화되어 누구가 격물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심지어는 유튜브를 보고서도 격물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격물(格物)을 <경물(敬物)>로 바꾸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경물’은 동학사상가 최시형의 말이다. 최시형은 “사람만 공경해서는 도덕의 극치에 이르지 못하고, 사물을 공경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천지기화(天地氣化)의 덕에 합일될 수 있다”고 하였다(『해월심사법설』「삼경」). 즉 경물(敬物)이 되어야 경천이나 경인도 완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최시형이 ‘경’의 목적을 “천지기화의 덕과의 합일”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화와의 합일’은 최한기의 기학의 목표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최시형의 경물은 최한기의 기학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최한기의 기학과 최시형의 동학은 결이 다르다. 기학은 엄밀하고 방대한 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고, 동학은 영성과 수행을 강조하는 설법 중심의 신념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시형도 ‘기화’를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최한기와 다르지 않다(가령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以天食天(이천식천)의 원리를 동질적 기화와 이질적 기화로 설명하고 있다). 반면에 최한기는 최시형과 같은 ‘경물’ 사상은 설파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두 사상이 대화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국문학자 조동일 선생이 “최한기와 최시형을 합쳐야 한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

READ MORE

  인문학의 전환 시카고대학의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 1948~)는 ‘인류세인문학’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2009년에 쓴 논문 「역사의 기후 : 네 가지 테제(The Climate of History : Four Theses)」에서 인류세 담론을 처음으로 인문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이후에 ‘인류세인문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차크라바르티’라는 이름은 국내에서는 아직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탈식민지 연구자로 저명하다. 대표적인 저서인 『유럽을 지방화하기 :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Provincializing Europe: Postcolonial Thought and Historical Difference)』(2000)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를 세계적인 학자로 만든 것은 역시 인류세인문학이다. 인류세인문학을 시작한 이후로는 라투르와 대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나이는 라투르가 한 살 더 많은데, 라투르가 묻고 차르라바르티가 답하는 형식이다. 이 대담은 2021년에 시카고대학출판부에서 나온 『행성시대의 역사의 기후(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은 「지구적인 것은 행성적인 것을 드러낸다(The Global Reveals the Planetary)」이다(이상은 허남진 조성환의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지구인문학 – 지구(Earth)에서 행성(Planet)으로」, 『문학 사학 철학』 67호, 2021년 12월을 참조하였다). 「역사의 기후 : 네 가지 테제」는 다행히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조지형 김용우 엮음, 『지구사의 도전』, 서해문집, 2010에 수록). 그것도 영어 논문이 나온 직후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책의 맨 끝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어떻게 유럽중심주의를 넘어설 것인가?”(부제)라는 문제의식에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의 주제와는 다소 동떨어져 보여서 맨 뒤로 밀려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인지도나 논문의 중요성 때문에 실리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보면 「역사의 기후 : 네 가지 테제」는 권두언으로 들어가도 부족하지 않을 논문이다. 그 이유는 이 논문이 인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나와있는 저자의 고백은 이러한 야심찬 기획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런 (기후) 위기에 가속이 붙으면서 나는 지난 25년 동안 읽었던 이론들, 가령 지구화 이론, 마르크스적 자본주의 분석, 탈식민주의 연구, 그리고 포스트식민주의 비평 등이 지구화를 연구하는 데에는 매우 유용하지만, 오늘날 인류가 처한 지구적 위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구사의 도전』, 352쪽. 번역은 가독성을 위해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즉 기후위기라는 현실 앞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공부해 왔던 모든 지식이 무용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차크라바르티가 학문을 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전공이나 분야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요청하는 학문을 하는 태도이다. 원불교 식으로 말하면 “현하(現下)”의 학문을 하는 것이다(“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정전』 제1 총서편, 제1장 개교의 동기).  100년 전의 과제가 물질문명의 도래였다면 지금의 과제는 기후변화의 위기이다. 그래서 이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고 차크라바르티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원불교가 ‘불법연구회’라는 자생종교를 창시하였듯이, 차크라바르티는 ‘인류세인문학’이라는 인문학을 개척하였다.   인류세인문학의 시작 그럼 구체적으로 「역사의 기후 : 네 가지 테제」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이 논문의 논지를 인류세인문학의 관점에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파울 크루천 등에 의하면, 지난 3세기는 인간의 행위가 지구 환경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인데, 이 시대를 ‘인류세’라고 한다. 인류세란 인간이 기후에 갇힌 생물학적 행위자에서 기후를 바꾸는 지질학적 행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지질학적 힘으로 존재하는 새로운 지질 시대를 지칭하는 인류세는 자연사와 인간사를 구분하는 오랜 인문학적 도식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근대성/지구화에 대한 인문주의적 역사의 엄정한 수정을 요구한다 / 『지구사의 도전』, 355-371쪽 먼저 이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인류세의 기점이다. 인류세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대략 3세기 이전의 산업혁명으로 잡고 있다. 이 시기는 증기기관의 발명에 의해 화석연료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탄소 배출량이 급증함에 따라 대기 환경이 변하기 시작하였다(송은주, <포스트휴머니즘과 인류세>, 《HORIZON》(온라인), 2020년 3월 16일).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핵실험을 계기로 상황이 심각해졌고, 1990년대 이래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전개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류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와 시기적으로 겹친다. 따라서 인류세란 근대와 동일한 시기를 지칭하는 다른 명칭인 셈이다. 같은 시기를 다른 명칭으로 부른다는 것은 이해가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근대는 흔히 ‘이성의 시대’나 ‘자유의 시대’로 특징지어진다. 그런데 인류세는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가 된 시대”로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근대와 인류세는 인간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 근대는 인간이 진보한 시기로 알려져 있지만, 인류세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조건이 위협받는 위기의 시대다. 한편, 차크라바르티에 의하면 인류세는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나누는 근대적 인식도 무너뜨렸다. 인간이 지구 환경을 변화시키는 존재가 된 이상,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과 분리된 자연 개념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류세적 관점에서 보면, 근대란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침입한 시기이자 자연이 인간에 반격을 가한 시기이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이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침입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지듯이 말이다. 그래서 인류세는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천인합일도 아니고 천인분리도 아니다. 그것은 ‘천인착종’의 시대이다.   인류세인문학의 전개 「역사의 기후」가 나온 지 6년 뒤, 차크라바르티는 본격적으로 인류세 담론을 전개하였다. 2015년에 예일대학에서 행한 두 차례의 강연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in the Anthropocene)》이 그것이다. 국내에는 아직 번역이 안되어 있지만,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개념을 인류세라는 시대에 적용했음을 제목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인류세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조건을 다시 생각하자는 것이다. 또한 제1강 제목이 “획기적 의식으로서의 기후변화(Climate Change as Epochal Consciousness)”인 점으로부터 ‘기후변화’를 이 시대를 특징짓는 사건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인류세’와 ‘기후변화’는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인류세가 특정 시대를 지칭하는 개념이라면, ‘기후변화’는 그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강연 이후로 서구 인문학계에서는 인류세 담론이 분출하였다. 따라서 서양에서도 인류세 논의가 시작된 것은 겨우 몇 년 전에 불과하다. 국내에도 ‘인류세’라는 이름의 번역서가 출판된 것은 2018년이 처음이었다(가이아 빈스의 『인류세』와 클라이브 해밀턴의 『인류세』). 우리에게 ‘인류세’ 개념이 낯선 것은 당연하다.  참고로 차크라바르티의 강연이 있었던 2015년은 국제정치의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해였다. 이 해 12월에 전 세계 195개국이 참가한 ‘유엔 기후변화 회의’에서 지구온도 상승을 막기 위한 <파리협정>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6년에 차크라바르티는 「인류세 시대의 인문학: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칸트적 우화의 위기(Humanities in the Anthropocene: The Crisis of an Enduring Kantian Fable)」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의 첫머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READ MORE

  기후변화 시대의 인간의 행위 3년 전에 다른백년에서 <개벽파선언>으로 인사를 드렸는데, 이번에는 <K-사상사>라는 제목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것도 서신 교환이 아니라 단독 저술이다. 그래서 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귀한 기회를 주신 이병한 대표님께 감사드린다. 3년 전의 기획이 ‘개벽학’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됐다면, 이번 연재는 ‘지구학’으로 관심이 확장되었다. 따라서 이번 <K-사상사>는 지난 3년 동안의 지구학의 여정을 소개하는 자리가 될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