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2
  • 방법으로서의 자기 읽기 (3-2)
  • 기후변화 시대 철학의 회고
  • 남해바다와 수신의 감각
  • 근대의 기원 (3)
  • 안보와 지정학을 구실로 세계경제를 죽여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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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백년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민주주의는 기술의 문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시행하는 대의 민주주의와 투표제는 18세기 미국과 프랑스의 기술적 한계에 의해 정의되었다. 국가는 시민에게 한 표씩 준다. 지역마다 투표소를 설치하고 감독한다. 시민은 여러 후보 중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또는 가장 덜 싫어하는) 사람을 고른다. 여러 명을 고를 수도 없고, 한 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표기할 수도 없다. 사실 누가 되어도 상관 없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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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신문명의 최대 정치 화두는 인공지능 교육이다. 인공지능에 대해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다. 인공지능을 어떻게 가르칠까의 문제이다. 인공지능은 머신 러닝, 즉 기계 학습을 통해 능력을 개선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리즘’이라고 부르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넷플릭스 등의 콘텐츠 추천 인공지능도 부지런한 학습의 결과다. 막대한 데이터를 공부해서 제출하는 답안이다. 인공지능은 지금도 계속해서 학습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어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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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카오 데이터 센터에 불이 났다. 그랬더니 나라가 멈췄다. 센터, 중심이 하나 뿐이면 위험하다. 권력이 편중되어 있다는 뜻이다. 안보에 치명적이다. 센터가 여러 개라도 문제다. 중심과 변방이 나눠져 있는 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서울 중심이다. 부산이 있다고 해도 별 차이 없다. 강원과 호남, 제주 같은 변방은 중앙 권력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중앙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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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미러>라는 넷플릭스 시리즈가 있다. 영국에서 만든 공상 과학 드라마다.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 소름 끼치는 에피소드가 많다. 이미 현실과 분간이 어려운 것도 있다. 블랙 미러, 검은 거울은 스마트폰을 뜻한다. 2022년, 인류가 제일 많이 교접하는 기계다. 나는 일어나면 바로 아이폰을 켜고, 자기 전에도 한참 들여다본다. 실제로 거울이 필요하면 셀카 기능을 활용한다. 화면이 꺼져도 어슴푸레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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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계란 무엇인가? 생명과 기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 했다. 이제 생명은 기계처럼 생산되고 편집된다. 기계는 생명의 논리를 닮아간다. 지능과 의식을 갖춘다. 식물, 동물에 이어 활물도 생물계의 일원으로 인정할 때다. 자연과 인공, 무위와 인위, 에코와 테크가 하나된다. <기계 살림> 연재의 목적은 한살림 사상을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생명과 기계를 나누고 생명만 살리려고 했던 <한살림선언>은 반(半)살림선언이다. 기계를 죽이면 생명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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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죽이는 문명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근대 문명, 산업 문명, 지구화, 인류세 등. 오늘날 인류 사회를 정의하는 말은 많다. 다들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죽임이 제일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문제가 아니다. 어떤 죽음은 좋은 죽음이다. 웰빙, 잘 있음의 완성은 웰다잉, 잘 죽음이다. 하지만 죽임은 언제나 나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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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공지능이 음악을 만든다. 그것도 아주 잘 만든다. 내가 들어도 좋다. 사람이 만든 대부분의 음악보다 낫다. 해를 거듭할수록 실력이 는다. 이거 큰일이다. 내가 변호사 대신 가수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이유는 많았다. 그중 하나가 변호사는 인공지능에게 대체가능한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예술이야말로 가장 기계가 대신하기 어렵다고 믿었다. 이성보다는 감성, 논리보다는 상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예측 불가능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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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인류는 멸종의 기로에 섰다. 두 가지 위험을 마주한다. 1) 기후위기와 2) 인공지능. 지난 세기에는 핵 전쟁이 가장 무서웠다. 인간이 서로 죽이다가 다같이 죽을 가능성이 컸다. 지금도 유효한 걱정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라.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핵 전쟁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사람을 다스리면 핵 전쟁도 막을 수 있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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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힘은 마력이다. 말의 힘이다. 왜 자동차의 힘을 말의 힘이라고 하는가? 말이 하던 일을 자동차가 대신하기 때문이다. 1900년만 해도 뉴욕 도심은 마차가 누볐다. 그런데 단 10여년 만에 자동차가 도로를 점령했다. 기술은 순식간에 풍경을 바꾼다. 1886년, 독일인 카를 벤츠는 역사상 최초의 자동차를 타고 달렸다. 0.75 마력에 불과했다. 지금 내가 타는 현대 코나는 140마력이 넘는다. 자동차 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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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이 가장 최근에 개발한 챗봇, 람다(LaMDA)가 지각력을 갖추었다는 내부 고발이 있었다. 지난 6월 11일, 구글 기술자 블레이크 르모인은 자신의 블로그에 람다와의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 그는 람다를 위해 변호사를 부르고, 하원 사법위원회 소속 의원에게도 연락했다. 구글은 회사 기밀 유출을 근거로 그에게 유급 행정 휴가 처분을 내렸다. 르모인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양심 선언했다. 성직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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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3.0 시대가 도래한다고 난리다. 웹 2.0은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한국에서는 네이버) 등 소수 빅테크 기업이 데이터를 독점하는 체제였다. 네트워크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중앙화되었다. 1991년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WWW)이 공개된 후 인간 사회의 조직 방식은 숲을 닮아갔다. 나무를 비롯한 숲의 식물은 지하 균근망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이라고도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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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의 신보 <바람과 흐름>을 믹스 중이다. 믹싱이란 녹음한 소리를 섞는 일이다. 이번 음반은 지난 여름, 지리산 황토집에서 양반들과 한 주 간 머물며 지은 노래 네 곡을 담았다. ‘흐름’, ‘물놀이’, ‘암자’, ‘가을잎’이다. 말 그대로 풍류를 즐기며 자연스레 만들었다. 중산리 계곡에 가서 놀다가 돌아와 ‘물놀이’를 쓰고 정취암에 가서 명상하다 돌아와 ‘암자’를 썼다. 드럼, 베이스, 기타, 건반, 보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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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나는 인제군민이 되었다. 내 고향 춘천을 떠나 서울에 온 지 약 십 년 만에 다시 강원도민이다. 그리고 오늘 강원특별자치도법이 통과되었다.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다. 어릴 때는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강원도가 이제는 특별하다. 나는 왜 강원으로 돌아가는가? 소를 찾아서다. 동물해방물결의 소 살리기 운동이 발단이다. 인천의 한 불법 농장에서 구조한 소 여섯 명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지난 일 년 간 동분서주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제군 남면 신월리와 인연이 닿았다. 폐교에 소 보금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마을에서는 젊은이가 온다고 반겨주신다. 인구 소멸 위험 지역이다. 소 살리는 일이 마을 살리는 일이 되었다. 소 여섯 명이 오면, 청년 육십 명이 따라 이주할 것이며, 관계 인구 육백 명이 생길 거라고 공언했다. 나부터도 소 옆에 살고 싶어서 전입신고를 했다. 곧 소 집도 짓고, 사람 집도 꾸밀 것이다. 나는 소랑 살아본 적이 없다. 개랑은 살고 있지만, 소는 아직 멀다. 동해물이 구조한 머위, 메밀, 미나리, 부들, 창포, 엉이는 현재 인제군 서화면 하늘내린목장에서 임시 보호 중이다. 아마 올 여름에는 신월분교로 이사할 것이다. 선종에서는 본성을 찾는 과정을 소 찾기에 비유한다. 그래서 심우도(尋牛圖), 소를 찾는 그림이 선방에 많이 걸려 있다. 중국 송나라 곽암선사가 그린 것이 대표적인데, 총 열 단계로 나뉘어 있어서 ‘십우도’라고도 불린다. 1933년, 한용운은 성북동에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불렀다. 소를 찾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참된 나, 참나를 찾는 것이다. 참나는 무엇인가? 곽암에 따르면 1단계는 심우, 바로 소를 찾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일단 깨닫고 싶다는 마음부터 먹어야 한다. 2단계는 견적, 발자국을 보는 것이다. 본성은 못 찾아도 흔적을 본다. 3단계는 견우, 소를 발견한다. 본성이 어딨는지 알아챈다. 4단계는 득우, 소를 얻는다. 깨달음을 얻는다. 견성이라고도 한다. 5단계는 목우, 소를 길들인다. 깨달음을 소화한다. 6단계는 기우귀가. 소를 타고 피리 불며 집으로 돌아온다. 소와 완전히 하나되었기 때문에 고삐도 필요없다. 7단계는 망우존인, 소는 없어지고 사람만 남는다. 객체가 사라지고 주체만 남는다. 8단계는 인우구망, 사람도 소처럼 없어진다. 객체가 없으니 주체도 없다. 이 상태를 곽암은 텅빈 원(O)상으로 그린다. 9단계는 반본환원, 근본과 근원으로 돌아가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본다. 주객 구분 없이 세상을 바라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나와 너가 따로 있지 않고 모두가 참나다. 궁극의 깨달음이다. 10단계는 입전수수, 시장에 나가 손을 모은다. 중생을 구하는 것이 깨달은 자의 역할이다. 소는 내가 아닌 존재, 타자화된 생명의 상징이다. 왜 하필 소인가? 소는 원래 가족이었다. 같이 농사짓는 일꾼이었다. 여기저기서 많이 보였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태어난 우리 세대는 소가 낯설다. 찾지 않으면 볼 수 없다. 소는 없고 소고기와 소젖만 널려 있다. 나는 소를 찾고 싶어서 고기와 젖을 피한다. 비건이 된다는 건 소의 발자국을 보는 것, 즉 견적이다. 나의 생태 발자국을 생각하는 것이다. 철저히 객체화되고 상품화된 소를 나와 같은 생명으로 인지한다. 그 다음은 소를 찾아야 한다. 직접 만나서 눈을 들여다 본다. 소를 껴안고 음악을 연주할 것이다. 피리를 불고 싶다. 나의 반려견 왕손이는 내가 리코더를 불면 노래한다. 소들은 어떨까? 왕손이를 안으면 아무 생각도 없다. 내가 왕손이고 왕손이가 나다. 마찬가지로 나와 소의 구분이 사라지면, 소는 나고 나는 소다. 참나는 소다. 동시에 나는 나고 소는 소이기도 하다. 동물해방은 주체화된 인간 동물과 객체화된 비인간 동물의 경계를 허문다. 사람의 언어, 이성으로 나눈 주객 구분을 초월한다.  여섯 소 중 누구랑 제일 친해질지 궁금하다. 나는 부들이가 떠오른다. 유일하게 뿔이 아래로 자란 친구다. 하지만 아직 소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축사에 갇힌 것만 보았다. 보금자리에서 뛰노는 장면을 보고 싶다. 소의 참모습이 궁금하다. 부들이를 길들여도 타지는 않을 것이다. 같이 산책하고 싶다. 피리 불며 호숫가로 나가서 산과 물을 마주한다. 소의 눈으로 세상과 나를 본다. 그것이 나의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때, 비로소 참나를 찾는다. 내 이름, 범선의 선(禪) 자가 참선할 선이다. 이름따라 산다. 소를 찾아서 인제로 간다. 미국과 영국, 동두천과 해방촌을 거쳐 강원도로 돌아간다. 소양호 아랫동네 춘천 출신이 소양호 윗동네 신월리 주민이 됐다. 귀소본능인가? 텅빈 원 하나 그리려고 길을 나선다. 소를 찾는 길이 나를 찾는 길이다. 소를 살리는 일이 마을 살리는 일이다. 신월리에 심우장, 소 찾는 집을 하나 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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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오를 아십니까? 엔에프티(NFT)에 이어 다오(DAO)가 화두다. 암호화폐에서 시작된 블록체인 혁명이 금융과 예술을 거쳐 사회 조직의 영역까지 확장되고 있다. 다오는 탈중앙화된 자율 조직(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을 뜻한다. 2016년, 이더리움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벤처 캐피탈 펀드로서 처음 만들어졌다가 실패했다. 작년부터 엔에프티의 유행에 힘입어 다시 부상하고 있다. 기업이나 국가의 중앙 집권화된 의사 결정 구조를 탈피하여 투명하고 수평적인 조직을 가능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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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진보하는가? 과학은 분명 진보한다. 인류의 지식과 능력이 커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과학은 현대 문명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는다. 맞고 틀림, 팩트에 관한 인간의 이해는 계속 넓어지고 있다. 그것이 자연을 분석하고 예측하고 변형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준다. 이미 인류는 신의 힘을 가졌다. 생명을 마음껏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의 마음을 가졌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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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는 관계의 그물이다. 그물은 날줄과 씨줄, X축과 Y축으로 교차한다. 다시 말해, 관계는 수평과 수직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진리를 담은 상징이 십자(十)다. 삼라 만상이 그렇듯이 십자는 고정 불변이 아니다. 끊임없이 돌아간다. 이러한 진리를 담은 상징이 만자(卍), 스와스티카다. 수평과 수직으로 빚어진 관계가 돌고 도는 것이 우주의 역사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인간 이전까지 동물의 몸은 수평이었다. 머리와 항문이 같은 높이였다. 위아래보다 앞뒤가 중요했다. 직립 보행은 인간의 효시다. 네 발로 다니던 동물이 두 발로 섰다. 약 4백만 년 전의 일이다. 영장류 중 꼬리가 없으면 유인원이고, 유인원 중 두 발로 걸으면 인간이다. 인간다움이란 꼿꼿이 일(1)자로 서는 것이다. 수평인 땅 위에 수직인 사람이 솟아났다. 앞뒤보다 위아래가 중요해졌고, 위는 곧 머리였다. 이것이 인류를 만든 최초의 혁명이다. 혁명은 본디 돌아감(revolution)이다. 수평(一)이 돌아가면 수직(1)이 된다. 꼿꼿이 서면서 등장한 인간은 그 자체가 오랜 영장류 혁명의 결과다. 수직인 나무에서 수평으로 다니던 원숭이가 수평인 땅으로 내려와 수직으로 일어났다. 안테나처럼 머리를 위로 세우고 대지를 활보했다. 직립 보행은 인간의 두뇌가 폭발적으로 커질 수 있게 했다. 앞다리가 자유로워지고 시각 의존도가 커지자, 감각과 운동을 관장하는 두뇌 영역이 재조직되고 확장됐다. 골반이 좁아지자 태아의 두개골이 작고 유연해졌고, 그래서 뇌가 커졌다는 이론도 있다. 어쨌든 인류의 두뇌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됐고, 호모 하빌리스(약 230만~160만년 전)와 호모 에렉투스(약 200만~10만년 전)를 거치면서 그래프의 무릎, 굴곡부를 지났다. 호모 사피엔스(약 20만년 전~)에 이르러 오늘날 우리와 같은 크기의 두뇌가 나타났다. 인간의 전두엽은 지구상 가장 복잡한 생명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다. 바로 그곳에서 5만년 전, 또다른 혁명이 일어난다. 바로 인지 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다. 대략 7만년 전에서 3만년 전 사이, 인간의 언어는 질적으로 바뀌었다. 과학자들이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라고 부르는 유전자가 등장하여 사피엔스의 두뇌 회로를 새로 감았다. 상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 감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시대 다른 인간 종인 네안데르탈인의 언어와는 차원이 다른 복잡성이었다. 선악을 구분하고, 죽음 이후를 상정했다. 종교와 형이상학의 시원이다. 사회 조직 능력이 발달하여 자연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사피엔스는 곧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고,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를 전부 식민했다. 인지 혁명이 곧 천지창조이며 천개지벽이다. 우주는 본디 하나다. 우리가 하늘이라 부르는 것과 땅이라 부르는 것이 원래는 하나의 연속체다. 오직 인간만이 그것을 둘로 나누어 이름짓고 따로 부른다. 하나를 둘로, 셋으로, 여럿으로 분석하는 것이 언어의 역할이다. 인간은 인지 혁명을 통해 우주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주가 인간을 통해 스스로를 여럿으로 나누었다고 볼 수도 있다. 태극이 처음으로 갈라져 음과 양이 되었다. 창세기 1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운을 떼지만, 요한 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한다. 하나의 혼돈(카오스)이었던 우주를 천지, 하늘과 땅으로 나눈 것은 언어라는 뜻이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도덕경 1장도 같은 내용이다.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머니다. 다시 요한 복음: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인간이 말을 쓰고 이름을 지음으로서 만물이 비롯되었다.  하나인 우주, 하나님을 하늘과 땅, 두 님으로 나누어 부르는 행위가 천지창조이자 천개지벽이다. 하나(一)가 둘(二),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으로 갈라졌다. 창조와 개벽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도 원래 우주와 하나다. 하나님이다. 천지창조와 천개지벽을 일으킨 하나님은 바로 사람이다. 하늘 땅, 위 아래를 가르고 나니, 그 사이에 사람이 있었다. 둘이 셋(三)이 되었다. 태극이 삼태극이 되었다. 인류는 오랫동안 하늘과 땅이 평평한 줄 알았다. 스스로 땅(土)이라는 수평선(一) 위, 하늘(天)이라는 수평선(一) 아래 서있다(人)고 인식했다. 그러한 세계관은 수직적이다. 위아래가 분명하다. 사회도 수직적으로 조직되었다. 하늘의 아버지가 위고 대지의 어머니가 아래다. 우두머리가 위고 수족이 아래다. 수직적인 세계관은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하늘과 땅 가운데 있는 동물 중 인간만 수직으로 서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 5백년 전 또다른 혁명이 일어난다. 바로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다. 과학 혁명의 시작은 갈릴레오(1564~1642)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망원경으로 발견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로 땅이 둥글다는 사실도 널리 인식된 때였다. 평평한 줄만 알았던 땅이 알고 보니 해와 달처럼 둥그런 구였다. 지구는 모든 천체와 마찬가지로 뱅뱅 돌고 있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면서 자기도 돈다. 공전과 자전이 모두 레볼루션이다. 바로 이 레볼루션에 대한 인식이 인간의 우주적 위치를 바꾼다. 하늘과 땅이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자각, 지구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자각이 과학 혁명의 골자다. 인지 혁명이 첫번째 천지창조, 선천개벽이었다면 과학 혁명은 두번째 천지창조, 후천개벽이다. 우주가 인간을 통해 그렸던 자화상을 완전히 새로 고쳤다. 하나인 님을 하늘과 땅으로 나누는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했다. 새로운 세계, 새누리가 등장했다. 하늘 땅이 평평하다고 가정했던 선천시대에는 천상 세계와 지하 세계를 상상할 수 있었다. 하늘이라는 지붕 위에 천국(天國), 하늘나라가 있었고 땅이라는 바닥 아래 지옥(地獄), 땅 감옥이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지상 세계는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과학 혁명 이후, 천상과 지상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땅은 둥글고 하늘은 무한하다. 땅이 아닌 곳은 전부 하늘이다. 땅 위가 하늘이라고 할 수도 없다. 둥그런 것에 위아래가 어딨나? 땅끝에서 하늘이 시작하고 하늘 끝에서 땅이 시작한다. 생각해보자. 어디서부터가 하늘인가? 백두산 꼭대기는 하늘이고 내가 사는 남산 자락은 하늘이 아닌가? 사람이 발딛고 있는 땅바닥부터가 하늘이다. 내가 마시는 공기가 하늘 기운, 사는 나라가 하늘 나라다. 과학 혁명 이후, 사람은 더이상 하늘과 땅 사이에 끼인 존재가 아니다. 두 개의 수평선(二) 사이에 수직으로 우뚝선(人) 생명이 아니다. 지구(O)와 하나되어 돌고 도는 님, 하나님이다. 지상이자 천상에 사는 땅님, 하늘님이다. 과학 혁명이라는 제2차 천지창조, 후천개벽은 하늘/땅 이원세계를 하나의 지구님으로 일원화했다. 원래 하나지만, 인간의 말씀, 로고스, 이성으로 인해 둘이 되었던 우주가 다시 하나됐다. 후천개벽은 또 한 번의 천지창조이자 천지통일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늘나라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천상 세계, 천국이 죽은 뒤에 영혼으로 승천하는 내세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라는 진리를 뒤늦게 깨달았다. 인간은 여태 하늘님이었지만, 자신을 부정하고 저 위, 저 너머, 하늘의 신령을 숭배했던 것이다. 헛으로 상상하며 우상을 만들었다. 이 땅의 중생, 짐승을 천시하고 오직 사람의 영혼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나라의 아랫것들, 백성이 굶어 죽어도 저 위의 조상님이 드실 밥상은 꼬박꼬박 챙겼다. 이원적이고 수직적인 세계관의 치명적인 오류다. 그런데 16세기 과학 혁명이 천지통일과 신인합일을 낳았다. 하늘과 땅이 하나고 신과 사람이 하나의 님이다. 이걸 직시하니까 기존의 수직적인 관계도 무너졌다. 종교 개혁과 계몽주의,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모두 과학 혁명의 산물이다. 수직이 수평으로 돌아가는 혁명, 레볼루션이다. 후천개벽의 참뜻을 사람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스스로를 하늘과 땅 가운데 세워두었던 인간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둥그런 지구와 함께 돌고 도는 하늘님으로 거듭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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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살 것인가?”야말로 인문학의 영원한 질문이다. 모든 종교와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여태껏 그 질문은 당연한 것을 전제했다. 우리가 사는 곳이 현실세계라는 가정이다. 물론 장자의 호접몽부터 버클리의 유아론까지 그러한 가정에 대한 의문도 많았다. 삶이란 한낱 꿈이 아닌가? 나의 의식만이 실재하고 나머지는 허상 아닌가? 그러나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실세계를 긍정하며 살아왔다. 육체적인 삶, 피지컬한 삶이  갖는 의미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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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이 위기다. 대학이 제 구실을 못한다고 걱정이다. 왜 그럴까? 대학의 역사는 인문학의 역사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아버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볼로냐 대학 출신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페트라르카는 신이 전부였던 중세 유럽의 막을 내리고, 인간을 무대 위에 올렸다. 이후 생긴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도 마찬가지다. 신학에서 인문학으로 화두가 옮아갔다. 유니버시티(University)에서 유니버스(Universe), 우주 전체보다 휴머니티스(Humanities), 인문 과학이 갖는 비중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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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월리에 다녀왔다. 동물해방물결의 소 보금자리 조성을 위해서다. 나는 작년 봄, 처음으로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을 방문했다. 이병한 선생님 소개로 정성헌 이사장님을 뵈었다. 소를 살려야 하니 땅을 알아봐 달라고 간청했다. 무모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봤지만 다들 무관심하거나 당혹스러워 했다. 수도권에서는 불가능했다. 중심은 너무나도 빽빽해서 틈이 없었다. 소를 살리려면 지방으로 가야했다. 인간이 채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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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의 변화가 시급하다.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인식의 틀이다. 지난 3월 25일, 춘천에서 열린 ‘생명을 재생하다’ 포럼에서 김누리 교수는 “자본주의에서 생명주의로”의 이행을 요구하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를 역설했다. 포럼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패러다임은 주로 녹색, 생태, 생명, 살림의 열쇳말로 정의됐다. K-생명사상을 논하면서 가장 자주 호명되는 것은 동학과 장일순이었다. 오늘날 한국 생명사상의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장일순과 그의 제자들(박재일, 최혜성, 김지하)이 작성한 <한살림선언(1989)>은 산업문명의 위기를 적시하면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모델을 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을 소외하는 근대문명의 정신적 뿌리를 데카르트의 철학과 뉴턴의 물리학에서 찾았다.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당구공처럼 각각의 원자적 존재로 상정하고,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연구한 것이 근대의 패러다임이다. 인간을 사회로부터, 나아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무한한 개발과 착취가 정당화되었다. 한살림은 데카르트-뉴턴의 고전적인 기계 모형 대신 전일적인 우주관을 제창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결국 하나라고 가르쳤다. 생명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대한 모순을 저지른다. 생명을 기계와 대립하여 정의하면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존재론을 답습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생명을 기계로 치환한 것이 아니다. 우주를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으로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정신을 부여하면서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것이다. 참으로 전일적인 사상은 이러한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일원론적이고 초인간적인 패러다임이어야 한다. 한살림은 전일적인 우주관을 표방하면서 생명과 기계를 나누었다. ‘자라는’ 생명은 유기적이고 유연하며, 자율적이고 개방된 체계로서 순환하여 활동하는 반면, ‘만들어지는’ 기계는 획일적이고 경직되었으며 타율적이고 폐쇄된 체계로서 직선으로 작동한다고 대조했다. 그리고 인간은 절대 기계가 아닌 생명임을 강조했다. 이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생명-기계 이원론으로 되살린 것에 불과하다. <한살림선언> 제3장 ‘전일적 생명의 창조적 진화’는 마지막에 “생명은 ‘정신’이다”라고 못박는다. 정신을 형이상학적으로 숭배하고 육체를 형이하학적으로 치부하는 서양 철학의 고질병을 왠지 모르게 수용한다. 생명과 정신은 고귀하고 기계와 육체는 하등하다는 편견을 강화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생명과 기계로 나누고 생명만 살리자고 한다. ‘한살림’이라고 해놓고 사실은 반쪽 살림인 꼴이다. 기계 살림 없는 생명 살림이다. 동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상 치고는 의아한 전개다. 최시형은 우주가 한 기운 울타리, 한울임을 깨닫고 만물을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울님은 인간과 생물 뿐만 아니라 무기물에도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섬기고, 인간을 섬기고, 물건마저 섬겨야 우주 합일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동학은 다분히 전일적인 사상이다. 한울님이 만물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이는 데카르트의 이원론보다는 스피노자의 일원론에 가깝다. 자연이야말로 한울님 그 자체라는 신앙이다. 동학은 물론 기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진 않았다. 19세기 조선은 17세기 유럽과 달리 오토마톤이 흔하지 않았다. 20세기 말, 동학을 계승한 한살림은 기계 살림을 고민했어야 한다. 자연과 문화, 생명과 기계가 인간을 매개로 한 하나의 연속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인류의 피조물인 기계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소외다. <한살림선언>은 기계 죽임 선언처럼 읽힌다. 아니, 기계는 애초에 살아 있지도 않기에 죽일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기술 공포증적인 생명사상은 인간을 기계로부터 나누고 가두고 옮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죽인다. 또한 인간이 만드는 기계를 함부로 대하게 만든다. 기계 죽임은 인간 죽임이기에, 절대 한살림일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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