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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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의 새 바람

2012년 1월 박원순 서울 시장이 연극 연출가 박인배를 세종문화회관 사장에 임명했다. 어떻게 보면 수십 개 서울시 산하기관 중에서 한 명의 기관장을 임명한 것으로 그다지 특별하다고 할 수도 없는 인사였다. 그러나 이 인사가 세인의 입길에 올랐다.

우선 세종문화회관과 박인배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세종문화회관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비싼 티켓을 구해서 감상하는 클래식 음악이나 연극, 오페라 공연 같은 고급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거기에 평생 민중공연예술에 종사한 박인배는 그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게다가 박인배는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인사였다. 박인배는 연출가 또는 무대감독으로서 민중공연예술의 창작과 보급에 종사해 왔지만 한국의 주류 공연예술에만 익숙한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었다. 그 이전 노무현 정권 시절 판소리꾼 김명곤이 국립극장 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도 세인의 입길에 올랐지만 김명곤은 그나마 영화 ‘서편제’로 세상에 잘 알려진 배우였다는 것이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여러차례 감옥에 간 적이 있는 박인배의 민주화운동 전력이 보수언론의 표적이 되었다. 조갑제와 함께 대표적인 보수언론인인 김필재는 박인배를 ‘국보법에 반대하는’ 좌파 인사로 지목하고, 박 시장의 박인배 사장 임명을 ‘초록은 동색’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코드인사’로 폄하했다.

이런저런 논란 속에서 박인배는 2012년 1월 10일 세종문화회관 사장에 취임했다.

그의 취임 일성이 또한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전체 시민과 함께 하는 세종문화회관을 만드는 데 매진하겠다”고 밝히고, 그를 위해서 “극장 자체의 수익성보다는 시민들의 문화향유권 확대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강조했다. 이런 그의 포부는 이후 세종문화회관의 정책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는 우선 세종문화회관을 고급예술 공연장에서 25개 자치구 문예회관과 연계한 명실상부한 서울시의 공연예술 허브로 탈바꿈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서울시극단과 뮤지컬단 등 세종문화회관에 속한 9개 예술단의 자치구 문화회관과의 연계공연을 추진하여 ‘시민의 삶터로 찾아가는’ 예술을 구현하고자 했다. 또한 산하 9개 예술단의 공연제작과 운영 노하우를 활용하여 자치구 문예회관과 함께 공동기획을 통해 공연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창작수준을 향상시키고 향상된 공연제작물을 자치구에 공급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민참여형’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다양화했다. 예컨대 아마추어 관현악단이 참여하는 ‘생활예술 동아리 축제’를 연다거나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연극을 만들어보는 ‘시민 연극교실’ 등을 시도했다. 그리고 민간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창작 공모와 창작 활성화 사업도 시행했다. 이 모두가 예술 문화의 주체를 전문 예술인에서 시민에게로 돌려야 한다는, 즉 ‘일반 시민이 스스로 작품을 고르고 평가하고 창작에까지 참여하는 활동을 함으로써 예술문화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오랜 소신이자 일관된 예술관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그의 새로운 공연 정책은 엘리트 의식에 젖어 있던 산하 예술단과 전문 예술인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또 어느 정도 예상된 바였지만 사업수지가 저하되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시 의회의 비판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일련의 획기적인 시도들로 해서 그동안 권위적이고 고급진 문화예술기관으로만 여겨져 왔던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이 대중에게 친숙하고 편안한 쉼터이자 문화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세종로 ‘국가상징거리’에 있는 세종문화회관에 ‘조용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중심에 박인배가 있었다.

 

시민에게 봉사하는 예술

이런 박인배의 예술관은 그의 70·80년대 오랜 민중현장 문화운동 경험이 바탕이 되어 형성되었다. 박인배는 1972년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진보적 연극 활동에 참여해왔지만 그가 현장노동자들의 문화활동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80년대 초부터라고 볼 수 있다. 80년 광주항쟁 직후 박인배는 대학시절부터 그와 함께 연우무대에서 연극반 활동을 해오던 박우섭(현 인천 남구청장)으로부터 자신이 관계하던 현장 노동자 문화패의 연극 작업을 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박우섭이 80년 봄 대학에서의 반정부활동으로 전두환 정권의 일급 수배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인배는 그 부탁에 따라 부평 산곡동의 한 노동자 연극반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공연했다. 이런 활동은 80년대 초반에 꾸준히 계속되었다. 이때 지역 노동자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본 경험이 박인배의 이후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인배가 본격적으로 노동자 대상의 문예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은 87년 말 극단 ‘현장’을 만들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87년 말에 박인배는 노동자 대상의 연극모임으로 ‘살림마당’이라는 정례 문화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의 작품활동의 성과로 극단 ‘현장’이 탄생할 수 있었다.

87년 대선에서 야권이 패배하기는 했지만 6월항쟁과 7·8·9노동자대투쟁의 성과로 수많은 노조가 탄생하고 아울러 노동 현장의 문화활동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극단 ‘현장’은 88-89년 2년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전국의 사업장을 누비면서 공연활동을 펼쳤다. 88년 1년 동안에만 공연횟수가 200회를 넘었고, 때로는 하루에 3회 공연을 소화해야 했다하니 그 엄청난 활동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박인배는 그 바쁜 공연 일정 중에서도 새로운 작품을 4개나 만들어냈다. ‘횃불’, ‘껍데기를 벗고서’, ‘금수강산 빌려주고 머슴살이 웬말이냐’와 박노해의 시를 모티브로 한 노래극 ‘노동의 새벽’이 그것이다.

노래극 <노동의 새벽>은 늘 만원을 이뤄 연장공연을 할 정도였다. 1988년 9월부터 10월까지 서울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성공적으로 초연한 후, 인천 안양 포항 울산 마창 등의 공장과 노동현장, 집회장, 그리고 지역 문화공간 등에서 총 200여회 이상 공연되었다. 지금은 우리에게 영화로 친숙한 배우 오광록, 박철민 등도 연기초년생이던 당시 <노동의 새벽> 무대에 올랐었다.

박인배는 공연과 작품 창작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 노조의 노동자 문화패들에 대한 교육을 계속하였다. 그 과정에서 박인배는 창작과 교육이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서클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의 이 당시 생각을 박인배의 부인이자 문예평론가인 이영미는 이렇게 정리했다.

“(박인배는) 수용자들이 그냥 공연을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예술작품을 만들거나 공부하거나 하는 교육이 있어서 그들 비전문인의 작품이 가지는 뭔가 미숙하지만 파릇파릇한 발상, 이런 것들을 다시 전문인들의 작품으로 들여와 전문적으로 발전시키고, 이것을 본 비전문인들이 또 거기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식의 전문인과 비전문인의 순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인배는 예술은 전문인의 영역이고 비전문인은 전문인을 모방하는 방식으로만 창작을 할 수 있다는 기존 사고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술의 주인은 사실상 비전문인이고 전문인들은 비전문인들에게 작품을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로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는 획기적인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박인배 생각은 예술이란 예술인끼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것이어야 했다. 비전문인들이 기교적으로는 전문인을 못 따라 가지만 실제 삶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비전문인이다. 따라서 전문인들은 비전문인들의 삶의 기반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박인배가 오랜 기간 노동자들과 함께 작품활동 하면서 체득하고 정리한 이론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모든 예술계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론이 그가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취임한 후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즉 시민들에게 문화향유권을 돌려주고, 세종문화회관의 작품 활동과 지역문화회관의 역량들이 선순환 관계를 맺는 지역 네트워크 정책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 이전에도 박인배는 그런 자신의 이론을 정책에 반영시킨 적이 있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이창동 문화부장관이 ‘창의 한국’을 내걸고 문화정책을 새로 짤 때 박인배가 추진반의 위원 으로 참여했다. 거기에서 그는 노무현 정권의 문화정책기조를 전문인 중심에서 비전문인 중심으로 바꾸는 데 일조했다.

이러한 박인배의 이론은 기존의 예술관 문화관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다.

 

어린 시절과 대학 시절

박인배는 1953년 부산 동래에서 아버지 박성렬 선생과 어머니 최해순 님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여 삼청초등학교로 전학했고, 성북초등학교와 경복중학교,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박인배의 부친 박성렬은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는데, 4·19혁명 직후 교원노조 활동을 한 것이 발단이 되어 교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서 사업을 시작하였다. 박성렬은 이과 취향으로 뭔가 손으로 만지고 만들기를 좋아하여 새로운 석유곤로를 발명하기도 했고, 그것으로 큰 돈을 벌기도 했다고 한다. 박성렬의 사업은 부침이 심하여 회사를 세웠다가 엎어지고 쓰러지기를 반복하였다. 그래서 박인배의 어린 시절 기억은 명암이 엇갈렸다. 이사도 많이 다니고, 좋은 때는 자가용 타고 다니다가 어떤 때는 몰락하여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북적대며 살았다.

박인배는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잘하여 서울대학에서 가장 고득점자가 간다는 문리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2학년인 1973년 여름 연극반에 들어갔다. 뭔가 특별한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고등학교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호기심에다 연극 특유의 집단작업이 주는 액티브한 매력에 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박인배는 이과생 중에서는 책을 폭넓게 읽었고, 비교적 문학 예술적 소양이 있는 편이었는데 그 점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박인배는 사회성도 강한 편이어서 1학년 때 학생회 부회장도 했고, 교지 ‘형성’ 편집부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박정희가 10월유신으로 독재정권의 영구집권을 꾀하던 상황 속에서 원혜영(현 국회의원) 등 고등학교 선배들의 영향으로 자연히 민주화운동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 ‘형성’ 편집부에서 선배들로부터 한국사회의 모순된 현실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도 했다.

박인배는 대학 4년 동안 연극반과 ‘형성’ 편집부를 오가며 바쁜 대학생활을 보냈다. 연극반에서는 박우섭, 김지현 등과 함께 연극 ‘셋’, ‘다섯’을 공연했고, 1974년에는 ‘광염소나타’, ‘돼지꿈’, 1975년에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해직사태를 다룬 ‘진동아굿’을 공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형성’ 편집장과 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

 

민주화투쟁 일선에 나서다

1975년은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흩어져 있던 각 단과대학이 한데 모인 해였다. 박인배는 관악 캠퍼스 첫 시위인 4월 3일 유신반대 학생시위를 주동했다가 체포된다. 학생운동 선배로서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는 구속 6개월 만에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해 11월 선배 원혜영 등과 함께 시위를 준비하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구속 되었다. 이 사건에서 박인배는 2심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 받았고 복역하다가 이듬해 1976년 9월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박인배는 뭔가 쓰고 싶어서 형 박춘배에게 볼펜심을 뭔가 쓰고 싶다고, 흰 면이 많은 시집을 넣어달라고 부탁했고, 형은 무슨 부탁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춘배, 인배 형제는 2년 차이지만 얼굴도 아주 닮았고, 중고등학교를 같은 학교에 함께 다녔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우애가 남달랐다. 형은 흰 면이 많은 시집을 한 권 사서 책표지 겉장을 뜯고 그 속에 볼펜심을 숨겨 감옥으로 들여보냈다. 박인배는 시집 흰 면에 일기를 쓰고, 그 쓴 면을 밥풀로 붙여 검열을 피해 밖으로 내 보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 부친이 경영하던 섬유회사 부산공장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던 박인배는 1977년 초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한다. 그러나 잦은 구속과 수배상태로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있던 박인배는 1978년 당뇨병으로 후송되어 의병제대하게 된다.

제대하고나서는 병 치료 겸해서 1979년 원혜영의 아버지 원경선 목사가 운영하는 풀무원 농장에서 1년 정도 근무하기도 했다.

10.26사태로 박정희가 죽고나서 마련된 1980년 ‘서울의 봄’. 박인배는 다시 학교에 복학하고 민주화운동과 연극무대로 복귀하게 된다. 1979-80년에 걸쳐 연극 ‘아일랜드’, ‘진동아굿’ 등을 후배들을 지도하여 만들었다. 이제 그는 연극반을 비롯한 진보적 문화동아리의 선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이 5.17쿠데타를 일으켜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자 박인배는 모든 것을 접고 불의한 정권과의 싸움에 나섰다. 5.17 전 4월 말부터 박인배는 친구 박우섭, 이내경 등과 함께 대방동에 입시학원을 차리고 윤전등사기를 구입했는데, 이 등사기는 5월 학생시위에 아주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이 등사기로 서울대 유인물의 80%를 공급했다고 한다. 5.17쿠데타로 복학생 전원에게 수배령이 떨어졌고, 박인배 역시 다시 도망자가 되었다.

박인배는 수배 중에도 거처를 옮겨다니면서 광주학살의 진상을 폭로하는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 6월 경 도곡동에서 유인물 배포과정에서 경찰에게 붙들려 서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 속에 조사를 받던 박인배는 조사 중에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었다. 지병인 당뇨병이 심해진데다 제 때 인슐린 투여를 못하면서 쇼크가 온 것이었다. 당황한 경찰은 그를 급히 인근 적십자병원으로 옮겨 행려병동에 수용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담당 간호사의 도움으로 형이 보내준 사복으로 갈아 입고 극적으로 병원을 탈출하게 된다. 상부의 질책을 두려워한 경찰들이 이 사건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유야무야 처리하는 바람에 한 달쯤 후 박인배는 수배에서 풀리고, 활동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민중예술운동과 결혼

그해 8월 초 박인배는 수배 중인 박우섭으로부터 2가지 부탁을 받는다. 하나는 연우무대 정한룡과 연락하여 연극 ‘왕자’의 조연출을 맡아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박우섭이 지도하던 부평 산곡동 노동자 그룹의 연극을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박인배는 이 친한 친구의 부탁을 수락하고, 그 해 12월 ‘왕자’를 공연했고, 산곡동 성당으로 가 노동자들을 만났다. 노동자들과의 작업 과정은 나중에 ‘생활연극체험기’라는 글로 발표되었다.

1981년에는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통하는 신동수가 주선하여 박우섭, 김봉준, 연성수, 황선진 등과 모임을 갖고 문화운동의 진로를 모색했다. 그 모색의 결실로 1981년 가을 ‘비야! 비야!’, 1982년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의병 한풀이’ 등이 무대에 올랐고, 1983년에는 ‘허연 개구리’를 연출했다. 이 ‘허연 개구리’는 적십자 병원 행려병동에서 본 농약 먹고 죽은 아이를 모티브로 한 작품인데, 공해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작품이었다. 또한 이 작품은 고려대를 막 졸업한 조연출 이영미와 결정적으로 맺어지게 한 작품이기도 했다. ‘허연 개구리’는 5월 애오개 소극장에서 연우무대 워크샵 공연으로 이루어졌고, 박인배와 이영미는 그 다음해 초에 결혼했다.

부인 이영미는 1982년 말 자료를 얻을 목적으로 연우무대의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합평회에 참석했다가 박인배를 처음 만났는데, 이후 ‘허연 개구리’ 공연 준비를 하면서 급속히 가까워져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이영미가 박인배에게서 받은 인상은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 욕을 하거나 남의 뒷담화가 전혀 없는 점잖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300만원 짜리 단칸방으로 신혼살림을 차리고, 신혼여행도 유성을 거쳐 광주 황석영 집에 가 문화단체 조직을 협의하고, 진도의 ‘씻김굿’을 보는 일정으로 잡았다. 신혼여행 겸 업무여행이었던 셈이다.

 

진보적 문화예술운동을 지켜온 삶

결혼을 해서 든든한 반려자가 생긴 박인배는 1984년 진보적 문화운동단체 조직에 전념하여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을 조직하고 초대 사무국장이 되었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는 최초의 진보적 예술문화운동의 연합단체였다.

흔히 문화운동계에서는 김지하, 이애주, 임진택, 채희완 등을 1세대라고 부르고, 박인배를 비롯하여 박우섭, 김봉준, 연성수 등 72-75학번 세대를 2세대로 부른다. 1세대가 예술가 기질이 강하고, 기예도 뛰어나지만 조직적 소양이 약한 세대라고 한다면 2세대는 예술가 기질보다는 조직운동에 강한 세대라고 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연극반·탈반으로 출발한 이 2세대 중에서 80년대에 문화운동이 분화해 갈 때 각기 제 길을 찾아가고, 박인배가 연행예술운동에 남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박우섭, 연성수는 민청련 운동으로, 유인렬은 민요연구회를 거쳐 노동운동으로 갈라져 나갔다. 박인배만이 연극 연출가로서 공연예술 분야 문화운동의 핵심 조직가로 남았다. 박인배는 1984년 민문협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1990년대 민예총 정책실장 혹은 기획실장 등에 이르기까지 민족민중예술의 조직가로서 자리를 지켰다.

1987년 6월항쟁과 그 해 12월의 대통령선거는 문화운동계에도 큰 파란을 일으켰다. 민주 진영의 모든 단체들이 겪었던 일이지만 문화운동단체 내부에도 대통령 후보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갈렸다. 한쪽은 정파적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좀더 통일전선적으로 범정파 연합으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자가 우세하여 노래와 문학 쪽을 중심으로 한 민문연(민문협이 이름을 바꿈)이 ‘민중후보 백기완선생 대통령선거운동 본부(백선본)’으로 갔다.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후자 입장의 사람들, 예컨대 박인배와 마당극 쪽 사람들은 민문연을 탈퇴하여 극단 ‘현장’을 만들어 나왔다.

박인배는 1989년 이 극단 ‘현장’을 이끌면서 앞서보았던 88-89년의 현장 공연의 성과로 생겨난 단체들과 극단들을 모아 서울노동자문화운동협의회(서노문협)을 창립했다. 그래서 민문연(나중에 노문연으로 재창립) 쪽이 이념적 선명성을 강조했다면 서노문협 쪽은 상대적으로 현장친화적이고 노동자들에게 어필하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도 박인배는 서노문협을 이끌면서 한편으로 민예총 정책실장을 하면서 창작 소집단들과 상층 문화계 명망가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꾸준히 계속했다. 극단 현장은 예술감독만 맡고 경영은 후배들에게 물려주었고, 대신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이사장(2007) 등 선배가 맡아야 하는 일들을 수행해야 했다. 한편 1990년부터 노천극장에서 수만 명의 관중을 상대로 대형 공연을 연출해오던 그는 1990년대 말부터는 서울단오축제 등 대형 이벤트 연출을 하게 됐고 2000년대에는 과천마당극제 예술감독, 안성 바우덕이풍물패와 바우덕이축제 예술감독 등으로 판을 넓혀갔다. 공연예술이 좁고 컴컴한 극장 바깥으로 나와 생활공간에서 주민친화적인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노력해왔던 그의 활동은 이렇게 축제 연출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사장실에서 퉁소를 배우다 – 세종퉁소모임

대통령선거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2012년 여름, 세종문화회관 사장실로 뜻밖의 손님 둘이 박인배를 찾아왔다. 서울대학교 5년 선배이고, 말지 편집장과 MBC 논설위원을 지낸 정상모와 서울대 2년 후배이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에 다니는 권형택이었다. 두 사람 다 민주화운동의 선후배로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던 사이지만 직접 찾아온 이유가 예사롭지 않았다. 용건은 정상모의 퉁소공연의 구성을 짜달라는 것이었다. 박인배는 민주인사들 사이에서는 운동권 공연의 실력 있는 연출가로 정평이 나 있었던 터라 그 자문을 받고 싶은 정황은 이해가 되었지만 평생 언론인으로 살아온 정상모가 대중공연을 할 정도로 퉁소 실력이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박인배는 가까운 선배의 간곡한 부탁인지라 기꺼이 돕겠다고 수락하면서 한가지 조건을 달았다. 그 대신 자기가 퉁소를 배울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정상모가 OK하여 즉석에서 거래가 이루어졌다. 퉁소모임을 만들어 1주일에 한 번씩 박인배 사장 방에서 배우기로 하고, 퉁소 선생은 정상모에게 퉁소를 가르친 스승인 용인의 퉁소 명인 동선본 선생을 초청하기로 했다. 퉁소모임을 조직하고 연락과 교습비를 걷는 등의 실무는 권형택이 맡기로 했다.

박인배는 오랫동안 마당극 연출를 했고, 안성 바우덕이 풍물패 예술감독을 4년간이나 했지만 자신이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었다. 계제에 퉁소를 배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함경도 민요 ‘애원성’의 퉁소 가락에 매료된 적이 있었던 터였다.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워낙 바쁜 자리라 교습장소를 아예 자신의 사무실로 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멀리 용인에서부터 동선본 명인을 모셔올 수 있는 좋은 유인책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예술공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종문화회관 사장실에서 퉁소를 가르치는 일이니까.

2012년 8월 시작한 세종문화회관 사장실에서의 퉁소공부모임은 박인배가 사장직을 퇴임하는 2015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름도 ‘세종퉁소모임’으로 붙였다. 이 모임에는 많은 박인배의 선후배들이 거쳐갔다. 그리고 그 중에서 언론인 이명순 선생, 정상모 선생, 후배 권형택, 조용성, 정혁기 등 6-7명 정도가 고정멤버로 남았다.

함경도 북청이 고향인 동선본 명인은 북청사자놀음 전수자이기도 해서 북청사자놀이의 반주곡 ‘연풍대’, ‘검무곡’ ‘초·중·말장’ 등과 ‘애원성’ ‘벌목가’ ‘농부가’ ‘돈돌날이’ 등 함경도 민요를 많이 가르쳤다. 일주일에 한번 가지는 이 퉁소모임은 독재로 회귀하는듯한 어두운 정치상황에서 민주화운동 출신 동호인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됐고, 격무에 시달리는 박인배에게는 좋은 휴식이 되었다.

2013년 연말 퉁소인들의 정기공연이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렸다. 이 공연에 박인배도 ‘세종퉁소모임’의 일원으로 농민복에 쾌자를 입고 퉁소연주를 했다. 평생 민중문화예술에 종사한 박인배였지만 연주자로서 대중 앞에 서 본 첫 경험이었다. 2015년 정기공연에는 박인배가 함경도 민요 돈돌날이를 노래극으로 각색해 만들어 공연했다. 우리 민족에 친숙한 민속악기와 민속음악이 점차 서양음악에 밀려 사라지는 추세 속에서 노래극을 접목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해본 박인배의 작은 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지막 가는 길

2015년 1월 박인배 사장은 3년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연임을 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미련을 두지 않고 물러났다. 다음 사람을 생각하는 배려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20대 말부터 당뇨병으로 시작된 내장기관의 전반적인 부실은 세종문화회관 사장 3년을 지내면서 더 악화되어 있었다. 의사가 놀랄 정도로 심장은 비대해 있었고, 폐도 엑스레이 사진이 하얗게 나올 정도였으며, 신장, 간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박인배는 퇴임 후 1년 반 동안은 특별히 매인 데 없이 편안하게 지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었지만 부인 이영미가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 없이 지냈다. 모처럼 퉁소연습도 열심히 했다. 퉁소모임 장소는 퇴임 이후에는 권형택이 나가는 서울제일교회로 옮겼다.

그러던 2016년 8월 어느 날 불현듯이 병마가 찾아왔다. 집안에 들어서면서 휘청휘청하고 약한 마비가 오는 것을 보고 전에도 가끔 있었던 일이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자 부인 이영미가 급히 병원으로 옮겼다. 뇌경색에 의한 편마비가 온 것이었다. 병원과 집을 오가며 열심히 치료를 받아 증세가 상당히 호전되었다고 생각할 즈음 이번에는 침대를 내려오다가 주저앉아 척추골절이 왔다. 이때부터 병세가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일시적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간성혼수도 찾아왔다.

2016년 말부터 다음 해 3월까지는 부인 이영미의 헌신적인 간호 속에 박인배의 혼신을 다한 투병의 시기였다. 박인배는 계속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장애를 극복해 갔으나 간성혼수 상태는 계속 찾아오고,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갔다. 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조차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2017년 3월 이후에도 이따금 좋아지기도 했지만 금방 또 악화되는 상태를 반복하였고, 마지막에는 몸에 붓기가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큰 고통이 찾아오고,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2017년 5월 3일이었다.

박인배의 시신은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졌고, 많은 민주인사들과 문화계 인사, 그리고 그와 오랫동안 함께 했던 문화운동 선후배들과 가족들의 애도 속에서 민주예술인장으로 엄숙하게 치러졌다. 그리고 5월 5일 벽제의 화장장을 거쳐 경기도 장흥 대원정사에 있는 수목장터의 한 나무 아래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권형택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민청련 부의장, 민통련 사무차장, 현 이야기채록사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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