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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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당과 지옥 이야기
  • 뜻으로 본 서학사
  • 진보적 문화예술운동 한 길을 걸은 과묵한 사람, 박인배
  • 유학의 근대적 전환및 전통사회구조의 재건 – 량슈밍의 향촌건설실험 사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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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설:

중국 향촌건설운동의 역사를 언급할 때, 첫자리에 놓이는 인물은,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던 량슈밍梁漱溟이다. 신향촌건설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중국 인민대학의 원톄쥔 교수가 실제로는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량슈밍의 ‘제자’를 자처하는 이유도 자신이 그의 여러가지 문제의식쁀 아니라 사상과 실천이 함께 하는 태도를 이어 받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량슈밍의 사상과, 그가 참여했던 ‘향촌건설운동’에 주목하는 것은, 이 운동이 단순히 ‘농민, 농촌, 농업살리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100년전 중국과 우리의 조상들이 겪었던 근대화의 단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자주적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한, 그의 치열한 사고와 실천을 복기하면서, 강요된 근대화가 남긴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뿐 아니라, 인류가 공히 경험하고 있는 후기 근대의 문제에 대한 해답도, 얻어낼수 있을지 모른다. 근 100년전에 그가 통찰했던 바와 같이 서구의 근대문화는 이제 생태적, 사회적 제약에 직면하여, 문명의 전환 혹은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요구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역자도 거주 경험이 있고, 지금 거주지인 광저우에서 근거리에 위치한 이웃도시 홍콩에는 원앙차라는 음료가 있다. 커피와 밀크티를 뒤섞은 음료인데, 동서양의 장점이 조화를 이룬 먹거리로 홍콩의 문화를 상징한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만, 세간의 평은 정반대이다. 동서양의 단점이 만나 최악의 맛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중국 광동인들의 실용정신이, 식민지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기회주의적 토양안에서, 서구의 물신주의와 만나, 약자들을 금융과 부동산 엘리트들의 노예로 만든 도시가 바로 홍콩이라는 평이 있다. 역자도 대체로 후자의 평에 동의하는 편이고, 10여년전 한번 원앙차를 맛본 이후, 다시 찾은 적이 없다. 량슈밍은 동서양 문화가 모순과 충돌이 아닌, 조화와 창조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 문명의 연속성이 담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서 살펴볼 인류 문명의 단계적 발전과정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추가적으로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량슈밍에게 있어, 중국전통사회내의 국가는 정치와 사회가 분리되지 않았고, 법제도보다는 예속禮俗에 의해서 통치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면, 중국 공산당 정부가 여전히 국가와 사회가 상당부분 통합된, 당국가 party-state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과 법보다는 현대적 예속禮俗인 당의 방침이나 인간관계가 우선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중국의 사회 체제는 한국이나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비교하면, 여전히 전통사회의 요소를 상당부분 유지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있다. 그래서, 중국의 근대화 경로를 이웃 국가들과는 전혀 다르게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이나 러시아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이미 다른 근대화의 경로를 밟고 있는 이웃 국가들을 관찰하면서, 사회의 새로운 발전 모델에 대해서 모색해 볼 수도 있다.


 

개요:

량슈밍은 중국사상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종의 사회적 실험을 통해서 중국사회구조의 개조를 꾀했다. 그는 전통과 현대라는 일반적 대립 구도에 의한 근대화 논의를 뛰어 넘어, 유학이 주체가 되는 전통문화 자원의 정수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하고 유학과 현대사회의 상호 융합을 추진했다. 향촌건설 실험을 통해 전통유학의 참된 정신과 서방의 과학기술 및 단체조직론을 일체화시키는 작업을 시도했고, 동서양의 모델을 융합한 새로운 향촌 조직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유학이 그 골간이 되는 중국 전통문화의 정수를 현대사회에서의 가치와 효용측면에서 재발굴하여 전통문화의 창조적 전환과 창의적 발전을 실현시키려고 했다. 량슈밍의 1930년대의 이러한 탐색은 여전히 현실적 의의를 갖고 있고, 새로운 방법에 대한 영감을 준다.

미국 시카고 대학 연구자인 Guy Alitto는 량슈밍의 사상과 생애를 연구했으며, 그와의 생전 대화를 토대로 몇권의 저서를 남겼다.

 

미국 학자 Guy Alitto는 량슈밍을 ‘마지막 유학자’라고 칭한바 있는데, 이는 오랜 동안 오독되어, 유학자를, 화석화했거나 이미 낡아빠져서 중국인의 일상에서 더이상 실제적 영향력이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관점을 유행시켰다. 하지만, 정작 영어에서 last라는 단어는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현대학술사상 량슈밍은 최초로 중국문화를 비판적으로 개조, 계승, 발전,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지식인이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 했던 유학자이다. 중국의 근대화는 전통사회의 자연적인 진화와 이에 따른 고유경로를 통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서방열강의 강요에 의해 택하게 된 생존방식이었다. 량슈밍에게 있어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중국의 전근대과정에서 단절되어서는 안되며, 그 특질을 보유한 채,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문화의 전승이 특히 중요하다. “저의 가장 큰 책임은, 유학과 현대학술과의 접점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제가 1930년대에 주도했던 향촌건설 실험은 실재적인 문화운동이고 저의 향촌자치 이론이 바로 정치문제, 경제문제 현안을 다룰 뿐 아니라 인생대도를 실현하는 지점입니다.” 필자는 중국사상사에 있어, 량슈밍의 진정한 독창적 사상이 그의 향촌건설 이론과 실험에 기본적으로 체현되어 있다고 본다.

량슈밍의 정신을 이어 받아, 실천하는 신향촌건설운동 조직중 하나인 량슈밍향촌건설센터의 로고

 

1. 지역문화로부터 현대성 자원을 획득한다

근대에 진입하면서, 근대성을 갖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량슈밍은 ‘향촌건설이론’에서 중국이 근대 국가로 거듭나야 함을 역설한다. 그런데 문제는 “ 한편으로는 민족의 역사와 고유의 정신을 지켜나가야 하고, 한편으로는 현실 환경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의 변화에 발맞추어 미래의 문화를 준비해야 한다.” 량슈밍은 아편전쟁이후 중국의 고유한 사회구조는 완전히 파괴됐고, 자연에 기반한 농업경제는 해체됐으며, 전통적 거버넌스 구조가 기초를 상실함에 따라, 중국의 고유한 정치, 경제, 문화 구조는 붕괴됐다고 생각했다. 옛 구조가 파괴됐는데, 새로운 구조는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이 장기간, 조직화되지 못하고, 스스로 통제 능력을 잃어버린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가 보기에, 서구문화가 침투함으로써 중국 고유의 사회구조가 파괴되었고, 그결과 동서양 문화가 충돌하면서, 중국 문화는 조절기능을 잃고, 실패하게 됐다. 국가는 빈약해지고, 사회는 낙후화하면서, 정치도 부패하게 되는 역사적 상황속에서, 량슈밍은 어려서부터 사회질서의 위기와 인생의미의 위기에 처하게 됐고, 사회를 개조하는 ‘중국의 문제’와, 삶의 의미를 재건해야 하는 ‘인생문제’를 함께 평생의 과제로 삼게 됐다. 인생문제는 생활, 생명의 최종의의를 탐구하는 것이고 중국의 문제는 중국문화와 사회의 현실적인 탈출구와 미래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의 저서인 ‘동서문화 및 철학’이 바로 중국의 역사변혁과 인생가치에 대한 문제를 핵심주제로 다루고 있다.

량슈밍의 역저 ‘동서문화와 철학’

 

‘동서문화와 철학’은 량슈밍의 인생, 사회문제에 대한 사상을 담고 있다. 5.4운동시기의 동서문화 비교논쟁을 검토한 후 최종적으로 선언한 결론에 가까운 이 저서는 출간 직후 격론을 불러 일으켰다. 량치차오梁启超의 ‘구유심영록欧游心影录’과 함께 가장 중요한 근대 초기의 계몽서적으로 일컬어지며, 량슈밍을 신유학의 창시자 중 한명으로 불리게 했다. 서양, 중국, 인도 삼대문화에 대한 비교를 통해 중국 문화의 미래 향방에 대한 고찰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유학의 전통을 바깥세상의 관점에서 다시 정의하려고 하였다.

량슈밍에 따르면, 인류사회는 ‘의욕意欲’에 의해 삼대 문화 시스템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즉, “의욕으로써 앞을 바라보며 요구하는 것을 근본정신”으로 삼는 서구문화, “의욕으로써 조화, 중도를 유지하는 것을 근본정신”으로 삼는 중국문화, “의욕으로써 돌이켜 뒤를 바라보며 요구하는 것을 근본정신”으로 삼는 인도문화. 이렇게 다른 사고방식을 통해 인간과 물질,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신의 생명이라는 인류 역사상의 삼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풀어서 이야기 하자면, 서구사회는 문제에 직접 맞닥뜨려서 해결을 하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국면을 개조해 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스스로의 요구를 만족시킨다. 중국은 문제에 직면해서, 직접 해결을 요구하지도 않고, 상황을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려 한다. 인도는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의 근본원인과 요구를 취소하려고 한다. 그는 ‘의욕’에 대한 이러한 다른 대응방식이 서구, 중국, 인도 삼대문화시스템의 본질과 심리의 기저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량슈밍은 이러한 방법론적 차이를 대립적인 방식의 비교라기보다는 시점에 따른 해결방법의 변화라고 보았다. 즉, 인류의 일반적인 발전 방식이 서구적인 모델이라면, 해결방법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때, 제2, 제3의 방향으로써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인도, 중국문화의 사고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와 중국문화는 때가 이르지 않았음, 즉, ‘조숙’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의 문화모델안에서, 서구문화와 중국의 문화는 모두 세계사적 의미가 있고, 다만 다른 발전 단계에 속할 뿐이다. 그래서 두 문화가 소통 불가능하고, 서구문화를 배우기 위해 우선 중국문화를 폐기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그의 ‘의욕설’ 및 ‘벌전단계론’과 같은 분석방법은 막스 베버의 ‘이념적 유형idealtypus’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상이한 문화유형에 대한 추상적 개괄이, 인류학, 고고학적인 근거에 바탕한 것은 아니고, 다만 20세기 초기에 유행하던 문화일원론의 관점을 철저히 배격했다는 것과, 중국문화와 서구문화가 각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긍정하면서, 동서양 문화의 논쟁 수준을 격상시켰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량슈밍은 인류가 서구문화로 대표되는 제1문화기에서 중국문화로 대표되는 제2문화기로 전환하는 시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서구의 이지理智의 생활방식에서 중국의 이성理性의 생활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했다.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서구문명에서 인간이 물질을 지배하는 동방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과학과 민주주의 정치가 야기한 문제들을 비판하는 루쏘, 베르그송과 사회주의의 각종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중국전통문화제도의 부활이 아니라 중국적인 理性에 의한 삶의 태도를 부흥시키는 것이 그 전환의 요체였다.

량슈밍은 중국의 문화가 다음 시기의 인류문화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한편으로 중국이 자체적으로는 제1문화기의 발전 목표인 근대화를 충분히 달성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중국문화의 부흥은 우선 중국사회의 개조가 전제가 되어야 함을 인정했다. 따라서 중국은 우선 과학과 민주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되, 공자의 인생태도를 견지하여 외부로만 향하고 물질을 우위로 삼는 ‘向外逐物’ 서구문명의 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서구문화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되 그 근본은 다시 개조하여 태도를 바꾸고, 동시에 중국의 원문화 태도도 비평적으로 재고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량슈밍은 불교의 일부 개념,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을 사상의 재료로,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과 태주泰州학파의 이론을 융합하여, 유학자로서 새롭게 유학이론을 해석하였다. 중국(동방)문화의 원류를 새롭게 발굴하고, 원시유학의 생명력과 지혜를 현대사회에 맞게 전환시켜내려는 시도였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유교사상은 생명정신을 직접 경험하고 인식함으로써 스스로의 특징을 형성한다. 변화, 대대對待, 대립對立을 뛰어 넘는 “무대 無對”를 생명본체로 삼고, 숭상직각崇尚直覺과 의욕조화지중意欲调和持中이 인생도리가 되게하고 반구제신反求诸身(문제가 생겼을 때, 외부에서 원인을 찾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봄), 낙천지명樂天知命 (우주의 법칙과 생명의 의의를 이해함으로써 근심이 없다.)을 인생이 추구하는 바른 길로 삼게 한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이야기한 ‘인仁’과 ‘강刚’의 개념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초공리超功利로써 사람의 정감, 직각, 의욕이 균형잡힌 중도를 이루게 하는 등의 감정을 특징으로 하는 인생의 태도인 것이다. 생활의 활발, 유창, 기쁨을 강조하고, 사람과 자연, 사람과 우주의 고도의 일치와 내재초월을 강조했다. 량슈밍이 보건데, 공자는 두개의 도구를 이용하여 이러한 생활을 만들고 유지했다: 그 하나는‘효제孝悌’의 제창 , 또 하나는 ‘예악禮樂’의 실시이다. 공자는 효제와 예악을 통해 종교 아닌 종교적, 예술 아닌 예술적 생활을 창조해 냈다. 그는 유가사상의 이러한 핵심가치관이 우리에게 안신입명安身立命의 터만을 제공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중국문화의 건강한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서구의 과학과 민주주의의 양대 정신을 제대로 소화하고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량슈밍은 ‘이성理性’, ‘인생태도’와 같은 개념을 사용하여 사회학적 ‘근대성’의 의미와 상통하게 하려 했다.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의 굴기가 프로테스탄티즘 이론에 힘입은 것이고, 유가나 도가의 이론과 실천태도는 이런 결과를 가져 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베버의 이러한 관점은 유교문화가 근대화의 장애물이라는 인식을 가져왔다. 량슈밍은 유가문화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철학적으로 베버의 관점을 반박하고, “유학사상으로부터 혁고정신 革故鼎新(솥을 뒤집어 상한 음식을 버리고 새 음식을 만들어 나눈다)하여 새로운 세대의 유학자들이 중국전통문화의 새로운 생기生机 (생존의 기회, 생명의 활력)를 보게 함으로써 유학이 스스로를 넓혀 새로운 물길을 트게 하려 하였다.”

 

2. 중국 사회 구조의 재조직화

량슈밍의 역저 ‘향촌건설이론’

 

만일 ‘동서문화와 철학’이 이론적으로 전통유학의 핵심을 회복시키려는 시도였다면, ‘향촌건설이론’은 유교가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지를 묻는 책이다. 량슈밍은 당시 중국이 겪고 있는 대부분의 심각한 문제들이 문화실조현상 때문이라고 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근대화의 임무가 제도의 재구축에 있다고 보는 반면, 량슈밍은 제도 밑에 숨어 있는 사회구조를 제대로 파악한 후에야 제도를 제대로 만들고 운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통사회의 조직구조를 바로 알아야 당시 중국을 어떻게 개조할 수 있는지 생각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엔 중국문화는 ‘조숙’한 (인류의 제2문화기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방열강이 중국사회에 전방위적으로 침투할 때, 중국전통 생활양태가 완전히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서둘러 ‘이이제이以夷制夷’책략을 구사하던 중국이 서방문화를 이식하는 과정에서 중국인의 문화정신과 서구인의 문화정신의 근본적인 충돌을 간과하고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기능’의 관점에서 동서양사회구조에 대하여 연구한후, 잘 알려진 결론을 도출했다: “서양근대사회는 개인본위의 사회가 됨으로써, 계급대립의 사회로 발전했다. 중국사회는 윤리본위이고, 직업분립의 사회이다”. “법제상이든, 예속禮俗방면이든 모두, 권리의 관념에서 출발”하는 서양인들과 달리 중국인들은 “서로 상대방을 중시하고, 개인 홀로는 존재감을 갖지 못한다. 마치 서로 타인을 둘러싸고 존재하는 것 같다”는 일종의 윤리본위의 사회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전통사회는 사농공상이라는 네가지 직업군의 구별로써 존재할 뿐, 서방과 같은 계급투쟁과 계급대립으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사회의 제도는 윤리본위로 구성되어 사회와 국가를 통합하는 것이지, 법률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중국은 법률제도와 상관이 없고, 오로지 예禮가 있을 뿐이다.”

전통 중국인들의 인간질서는 국가의 법제도가 아니라 예속禮俗으로부터 변화 발전해 온 것이고, 따라서 이를 중시한다. 그래서 ‘인정人情본위’의 윤리질서를 형성했다. 유교의 윤리적 명분은 습속에 의한 관념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관념으로부터 사람의 인격과 동시에 조직의 질서에 대한 이상적 기준이 만들어졌다.

동서방 사회구조 차이의 원인중 하나는 기독교의 발흥이다. 서구사회에서 기독교는 유일신 신앙으로서 가족과 커뮤니티/ 지역의 작은 신들을 제거해 버렸다. 이러한 엄격한 종교생활은, 한편 전통적 초급 사회집단을 제거하고 초가족적 교회조직을 형성했다. 장원제도, 장인들의 길드조직, 도시국가와 같은 제도들이 단체생활을 더욱 강화시켰다. 집단생활의 훈련이 서구사회의 공공관념과 기율습속, 조직능력과 법제정신 등 소위 ‘공덕公德’을 만들어 냈고 또한 이는, 다양한 이익집단간의 투쟁적 계급대립에 기반하고 있다. 내부사회질서의 유지는 외재적 강제력, 즉 법률적 수단을 통해서 보장되는 것이다. 헌법, 헌정 등 모든 대표적 근대서방 정치조직방식과 운영규범은 서구사회생활양식에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을 장기적으로 운용하는 과정중에 이러한 제도들이 일상의 구체적 생활속, 사람들간의 관계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즉, 이미 일종의 생활의 태도이자 습속이 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역사상 기독교와 같은 종교가 출현한 적이 없었다. 전체 사회는 비종교적인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교화教化가 중심이 되어, 점차 윤리본위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중국은 봉건사회의 해체이래, 주공과 공자의 교화를 통해, 예교禮教가 법률을 대리하고, 윤리가 정치를 대리하고, 직업이 계급을 대리하고, 도덕이 종교를 대리하고, 계급국가가 윤리사회에 녹아들어가게 함으로써, 천하가 국가를 겸하게 하였다. 이렇게 왕조 혹은 문화가 집단을 가르고 정의하는 관념이 됨으로써, 일종의 ‘왕조중국’이나 ‘문화중국’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일반 근대국가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없다.

여기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서구적 근대화의 역사상, 정치와 사회의 분리가 근대성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량슈밍은 예속禮俗의 관점으로 사회를 이해했다. 즉, 이는, 정치를 사회안에 녹아들게 함으로써, 서방 사회사상의 전통에 부합하지 않고 “society“의 함의와도 다른, 예악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교화하는 전통중국의 기본 모델과 연관이 있다. 량슈밍과 동시대의 적지 않은 학자들이 사회를 일종의 예속禮俗으로 이해했는데, 이를 단순히 전통사회의 미발달 및 미분화 특성으로만 볼 수는 없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 량슈밍이 예속의 관점에서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정치와 사회의 복잡한 관계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볼 수 없게 하는 단점이 있지만, 꼭 인식의 오류라고 할 수는 없다. 서방의 ‘사회’개념의 독해가 꼭 유일한 관점이라고 볼 수도 없다. 서구적 근대화 모델이 꼭 유일한 모델이라고만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량슈밍의 이러한 사회독해법과 그 학술적 가치는 보다 깊은 토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량슈밍이 논의하고자 한 핵심이 이점은 아니다. 그의 동서방사회구조의 차이점에 대한 논증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의 이러한 논의는 향촌건설 실험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그는 이를 통해 하나의 시스템적 국가건설의 구상과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신사회건설의 출발점은 단체조직이다. 량슈밍은 서방사회의 “개인본위, 계급대립’과 대비되게 중국은 ‘윤리본위, 직업분립’의 사회로서의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각한 결함도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과학기술의 결핍, 그리고 단체조직 능력의 결핍이다. 그래서 “이상사회의 성공 조건은 한편으로는 생산기술의 진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조직의 합리적인 결성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중국사회의 산만함을 비판하고, 단체의 중요성과 조직 구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당대 중국 문제의 근원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문화모델안에서, 접시위에 모래를 흩뿌린듯 산만하기 그지 없고 조직화되지 못하는 중국의 향촌으로부터, 중국의 ‘오래된 정신’과 윤리관계의 원칙위에, 중국이 하나의 단체조직을 결성할 수 있다면, 동서양의 구체적 사실을 융합시킨 결정체야만 했다. 이는 중국 고유의 정신을 위주로 하여 서방의 장점을 흡수한 것이 될 것이다.  중국 고유 정신의 두가지 중요한 지점은, 정의情谊(서로 상대방을 중시하고 돌보는 경애의 윤리), 그리고, 개과천선을 통해 인생을 향상시키고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자세인 인생향상人生向上이다. 이에 대비하여, 서방 근대조직의 장점은 네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단체의 조직능력, 이를 통해서 중국의 산만함을 개선할 수 있고, 두번째는 단체의 구성원이 단체 생활에 참여하는 자발성, 이를 통해서 중국인의 고질병인 피동성을 탈피할 수 있고, 세번째는 개인을 존중하는 태도와 규범, 이를 통해서 개인의 지위를 높이고, 개인 인격의 완성을 도모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재산의 사회화로서, 이를 통해 협력관계를 증진할 수 있다.

단체조직의 구체적 결성 방법은 향농鄉農학교였다. 량슈밍은 당시의 행정기관이 강제로 민중을 관리하는 방법으로는 민중의 내재적 도덕의식을 깨울 수 없을 뿐더러, 그들을 적극적으로 단체에 참여하거나 그 사업에 뛰어들게 할 수 없다고 봤다. 백성들은 결국 여전히 “접시위에 흩뿌려진 모래와 같은 존재”였다. 송나라 시대의 대유학자 뤼허슈 呂和叔의 <<여씨향약>>은 고대향약제도의 설계도로써, 지방자치의 법규일뿐 아니라 일종의 윤리규범을 담지하는 규율이었다. 량슈밍은 여씨향약을 기초로 이를 발전시키고 개선해서, 농촌에 새로운 사회조직형식과 예속禮俗을 형성할 것을 도모했다.   산동성 저우핑邹平현이 실험구로 지정된 후에, 량슈밍은 원래의 행정구역을 폐지하고 책임자를 물러나게 했다, 원래 7개의 구區를 14개의 향鄉으로 재편했다. 그리하여, 향에는 향鄉학교를, 촌에는 촌村학교를 설립하여, 향농학교가 행정기관이자 교육기관의 역할을 맡도록 했다. 이것은 전체 인민으로부터 결성된 하나의 단체조직이었다. 이러한 학교의 설립 목적은 정치적 습관을 배양하고, 지역민들의 단체생활 및 공공사업에 대한 주의력과 활동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학교의 성원은 이사, 학장, 학생 및 교원의 네그룹으로 나뉘었다. 마을에서 덕망이 높은 이들을 학교의 이사진으로 삼았다. 예전 행정구역인 향, 구, 촌의 우두머리였던 이들을 교장으로 삼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학생이 되었다. 이러한 교장과 이사의 임명은 량슈밍이 전통적 지역 엘리트의 지혜와 경험을 존중했다는 것을 잘보여준다. 학생이 된 마을 사람들은 단체를 중시하고, 마을의 공공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발표하게 했다. 이를 지속함으로써 농민들이 단체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했다. 향농학교에는 아직 교사와 조교가 없었다. 향촌건설 과정의 주요 커리큘럼은  ‘정신연마’와 ‘실용적인 생활기술’이었다. 정신을 연마한다함은 합리적인 인생태도와 수양방법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인생의 실제적 문제를 토론하면서 중국역사문화를 분석했다. 그 핵심은 ‘중국의 민족정신’이었다. 실용적 기술이라함은 마을에서의 협력, 농업의 개량, 구시대적 습속의 개선 등이었다. 다시말하면 농민들에게 과학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향농학교를 빌어, 다음과 같은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윤리정의情谊(경애와 우의)와 인생향상人生向上이라는 중국식 이성을 보존한다: 농민조직을 결성하여, 공동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고 협동의 요구를 만들어 낸다; 이 조직안에서 농민이 합심하여 비적의 침탈, 가뭄, 전염병, 농산물의 경제적 가치 하락, 도박이나 마약등의 문제를 해결한다; 자치의 기풍안에서 천천히 민주정치를 몸에 익힌다: 기계, 좋은 종자, 농약 등의 서방 과학기술을 농촌에 도입한다. 이러한 사회조직은 미래사회의 맹아가 될 것이며, 향과 촌을 새로운 사회조직의 단위로 삼아서, 향과 향이 연결되고, 점차 상위 행정조직인 현과 현이 연결되게 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전국에 새로운 질서의 정치연합체를 만들고, ‘앙시엥 레짐’(구질서)을 대체하여 현대적 의의의 국가를 만들고, 사회혁명의 목적을 달성하는 출발점이 될 터였다.

하나의 민주정신의 단체 안에 두가지 기본 요점이 들어있다: 첫째, 공민 참여정치의 권리, 둘째, 개인의 자유권리. 량슈밍은 특별히 향농학교가 새로운 정치적 습관을 배양하면서, 중국 고유윤리정신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특히 서방의 천부인권天賦人權이론에는 반대하였다.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을 원칙으로 삼고, 권리관념을 동시에 의무관념화하였다. 자신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다른이들의 권리가 침탈되는 것을 막고자했다. 량슈밍은 지혜를 존중하고 스승을 떠받드는 중국의 전통 정신과 공민참여 정신이 혹여 대립될 수 있더라도, ‘인생향상’의 정신이 아마도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으며 이러한 모순이 공민참여와 단체생활의 자발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그는 이러한 인치와 법치의 조화를 “인치의 다수정치人治的多数政治”와 “다수정치의 인치”라고 부른다.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 정신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 꼭 서방 정치제도를 복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민주의 정신은 두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차이를 용인하는 아량이고 하나는 다수의 생각에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민주정치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제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소홀히 한 것은 분명한 실책이다.

경제문제를 중시한 것도, 량슈밍이 다른 신유학자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협동조합을 만듦으로써, 량슈밍은 경제건설을 통해 향촌조직의 주요 사업을 만들어 냈다. 저우핑 실험구에서, 량슈밍은 신용, 산업, 소비, 운수 등 각종 협동조합을 만들고 또 현의 협동조합사업 지도 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는 실제 업무를 통해, 금융과 유통,  과학기술의 도입, 협동조합조직 촉진 등을 동시에 추진했다. 역설적으로 량슈밍의 향촌건설계획은 그가 별로 중시하지 않던 경제적 방면에서 큰 성취를 이뤘다. – 소규모의 기술적 도입과 경제 조건의 개선. 그의 연구부문이 추진한, 농업보급 사업과 학교가 농업기술과 효율을 개선시켰다. 그가 도입한 생산, 판매제도와 시장조직의 개선은 농가의 수입을 늘려줬다.

“중국 사회문제의 해결. 그 시작과 완성은 모두 사회의 지식인과 향촌민에 달려 있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지식인의 향촌 공동체내의 역할은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해결방법을 논의하고, 실행을 고무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고도의 전통수양법을 행하며 따라야 하고, 동시에, 서방현대과학기술을 장악한 지식인들은 응당 혼란에 처한 중국이 나아가야 할 바를 밝혀야 한다. 지식인들은 지역(농촌)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눈과 귀, 혀와 목구멍, 두뇌를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현대사회발전의 새로운 관습을 훈련하고, 양성하여 이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향촌을 부흥시킬 수 있다.

이러한 기초위에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한다. 이러한 신사회는 중국 구사회의 소극성을 적극성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서방근현대사회로 편향된 구조를 정상적인 정상형태의 인류문명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중국에 만일 하나의 단체조직이 출현한다면, “이것은 중국 고유의 정신과 서양문화의 장점, 양자가 구체적인 사실적 소통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단지 이론상의 소통이 아니다. 반드시 근본적인 조화소통을 통해 하나의 사실을 만들어야 한다. 중국의 정신과 서양의 장점, 양자가 조화적 사실을 이룰 때, 하나의 신사회가 현실이 되고, 인류의 신생활이 될 것이다” 량슈밍은 미래의 이상사회를 다음과 같이 그렸다: 농업의 공업에 대한 우선. 농업과 공업의 균형적인 발전, 향촌이 근본이 되고, 도시가 말단이 되게 한다. 양자는 서로 소통하고, 조화를 이룬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물질을 지배하게 해야 한다. 물질이 사람을 지배해서는 안된다; 윤리본위를 유지하여 서로 협력하되 개인본위 혹은 사회본위의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게 한다; 정치, 경제, 교화 삼자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성과 비폭력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한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역사상 일찌기 존재한 적이 없던 발달된 형태의 문명이다.

종합해서 보건데, 량슈밍의 새로운 사회건설방안은 향촌이 기본단위가 되고, 그 중심고리는 향농학교를 통해, 경제적인 생산과 분배의 사회화를 실현하고, 소비를 위해서 이윤을 남기지 않게 생산하며, 농업이 공업을 이끌고,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불량한 풍속은 억제하고, 모두가 커뮤니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커뮤니티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기초위에 권력이 인민의 자치에서 나오는 민주정치를 실현한다. 량슈밍은 가정본위의 전통 유교윤리주의를 개조하여 “서로 타인이 본위”가 되는 사회조직방식, 서방민주정치의 합리적 요소들은 선택 흡수하여, 새로운 조직형식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사회주권이 모두에게 귀속되고, 모든 사회 성원이 공공사업의 의무와 권리에 참여하는 것이다. 단체안에 도덕적 리더쉽을 유지하여, 전문가나 지혜로운 이가 교육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한다. 결정에 있어서 소수가 간단히 다수의 원칙에 복종하지 않도록 한다. 우선 교육과 궁리를 통해서, 민중의 단체사업에 대한 인식 수준을 고양한 후에 표결에 부친다. 이로써 보다 합리적인 결정을 유도한다. 단체는 구성원의 상호존중과 공동의 사명감을 강조한다. 단체의 존재가 구성원들의 “인간의 마음을 보다 선하게 하는” 상호교류의 과정에 기반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이 본래 단체의 통일을 이루어 낸다. 단체의 조직 건설을 통해서 분산, 고립, 빈약한 상태에 있던 농민들에게 절실한 이익을 가져오는 것뿐 아니라 자기 가족만의 단독 자주생활에만 익숙해있던 수천수백만 농민들이 조직의 형식을 통해서 집체 행동에 필수적인 모든 원칙과 제도 그리고 방법을 공부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관리 능력도 키우게 된다.

20세기 30년대에 중국 전역 수백곳에 향촌건설 실험구가 있었지만, 량슈밍의 저우핑 실험을 이론과 실천이 가장 밀접하게 결합한 사례로 본다. 저우핑의 향촌건설실험은 향촌의 사회질서, 경제발전, 문화교육, 풍속습관 등에 대하여, 모두 전통을 존중하는 기초위에 현대사회발전에 적합한 개혁을 실행하였다. 몇년 후, 실험구의 범위가 계속 확대하여, 1937년에는 산동성에서 향촌건설 실험을 하는 현이 70여개에 이르게 됐다. 그해에 일본의 침략으로 실험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일본의 침략이라는 외적 요소가 없었어도, 당시의 특수한 사회환경내에서, ‘향촌건설이론’ 스스로의 문제 때문에, 실험이 꼭 성공을 보장받을 수는 없었다고 지적한다. 량슈밍은 중국 문제의 해결은 중국 농촌 문제의 근본적 치유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에 의하여, 량슈밍이 부정하던 혁명 방식을 유지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다. 개량주의로도 볼 수 있는 량슈밍과 그의 향촌건설 이론은 각종 사회모순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30년대에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는 주의를 끌지도 못했다. 량슈밍 자신도 실패를 인정한다. “다 틀린 건 아니지만, 여하튼 내가 틀렸다.”

 

3. 중국의 사회와 지식전통을 재인식한다

량슈밍이 꾀했던 이른바 전통문화로부터 출발하여 현대사회의 요구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그의 근대화로 가는 다양한 경로에 대한 탐색과 그 학술적 가치가 생명이 다한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량슈밍의 <<향촌건설이론>>은 지식계의 충분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신유학의 계승자로서, 그가 유가의 심성心性이론을 명확히 하는 것에만 학술적 주의가 집중됐다. 이전의 학자들은 량슈밍의 사회제도에 대한 관심과 실제 사회참여에 대해서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량슈밍이 백년전 시작한 문화발전방향에 대한 토론은 ‘인생문제’와 함께 ‘사회문제’에도 천착한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도시와 농촌간의 균형발전 문제, 즉 쇠락하는 농촌 등의 현실적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도 그의 사고와 실천이 매우 빈번하게 토의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특히, 제도의 이상과 제도의 실천간의 모순을 느낄 때, 그중에서도 현대제도와 전통문화사이에서 습속이 일관되지 않아 생기는, 설명이 곤란한 지점은, 전통문화와 사회제도의 합리적 요소가 현대제도안에서 유효하게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량슈밍이 당시의 조건하에서 창조적으로 탐색한 시도는 완전할 실패라고 볼 수 없다. 량슈밍은 1950년대에 이미 일정한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리고 만년에 그의 글에서, 당시 자신이 영도했던 향촌건설 운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비록 오류는 크지 않았지만, 너무 이른 시도였다. 너무 앞선 시도였기에 실패했다”.

량슈밍이 생각하기로 서구의 근대화, 부국강병 구호의 영향을 받은, 중국 근대의 지식인과 엘리트들은 자신들만의 논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서방의 정치제도와 시스템 설계를 맹목적으로 도입하는데만 급급했고, 그 결과로 심지어는 자기 모순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의 제도가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라는 점이 근본문제라고 생각했다. 근본적으로 중국문화와 어울리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근대 중국의 발전 경로에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그런데 역사가 증명한 바는, 결국 공산당 혁명 방식으로 귀결됐다. 근대의 ‘민족국가’를 그렇게 ‘개벽’하였다. 그러나 중국혁명의 성공이 꼭 량슈밍의 이론과 실험이 실패했다는 결론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역사상 계승된 문화가치는 근대화에 부적합한 것일까. 이것은 량슈밍이 평생에 걸쳐 해결하려고 한 핵심문제였다. ‘5.4운동’이래 시작된 문화논쟁은 모두 하나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서방문화와 충돌하는 가운데, 중국문화는 어떻게 스스로를 변화시켜 현대적 생활을 창조할 것인가. 어떻게 전통의 모든 규범의 사유방식을 초월할 것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 당대의 지식 성과와 지혜의 결정을 결합하여 서로 조화하게 할 것인가. 새로운 문화의 내용을 창조함으로써, 전통문화를 갱신함으로써, 이를 통해 어떻게 중화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의 관건이었다.

근대이래, 중국은 서방열강의 침략을 받았고,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국면에 처했다. 이런 국면이 조성된 원인을 중국사상문화 특히 유학이 낙후한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관점은 신문화운동중 피크를 맞아 “공자를 타도하라”는 수준에 이르렀고, 모든 것이 서구화 돼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발전했다. 전통문화와 근대화가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이고, 청조말 중국의 쇠퇴는 전톰문화때문이라는 시각은 의심할 여지없이 조야한 논리이다. 유학은 사회에서 설자리를 잃고, 서구 한학자漢學者의 박물관에나 보존될 골동품 취급을 받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량슈밍이 버전 업그레드된 신유학을 열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신유가는 인류와 중화민족의 인문정신과 가치이성을 중시했다. 그들은 전통문화와 근대화의 이원적 대립구조를 뛰어 넘어서 동아시아/ 중화정신문명과 근대화, 근대성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사고했다. 근대화가 즉 서구화라는 관점을 비판하고, 유학과 현대민주의 공통점을 찾기위해 노력했다. 유학의 ‘내재적 초월성’ 함의를 발굴하고, 안신입명의 ‘위기지학為己之学’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 갖는 초월적 의의를 논증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노력은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시진핑 총서기가 지적한 것처럼, 유가사상은 당대 세계의 난제를 해결할 지혜의 보고이다. 공자와 유학의 의의에 대한 연구를 “당대 중국인의 정신세계역사를 인식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경로”로 격상시켜야 한다. 더불어 민족부흥의 ‘제도, 문화, 이론, 그 변화의 여정’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는 발전 모델을 만들고 이를 구성하는 거대한 학술공간을 형성해야한다. 이러한 의의를 살피건데, 우리는 1930년대 향촌건설 운동의 이론과 실천이 그 학술적 생명을 다했다고 보지 않는다.

량슈밍의 사상적 여정을 살피면, 문화의 문제에 대한 사고로부터 중국사회의 문제에 대한 사고로, 그리고 ‘향촌’의 문제로 깊이를 더해가는데, 이는 현대의 신유가와는 다른 문제의식으로 보인다. 1930년대의 시대배경에서 볼 수 있듯이, 향촌건설사조는 당시의 지식인 그룹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예를 들자면 타오싱즐陶行知은 난징에서 샤오좡曉庄사범대학을 설립하고 향촌교육에 임했으며, 옌양추晏陽初는 허베이河北성 띵定현에서 향촌운동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건설활동은 중국민족의 자구운동과 연계하여 원대한 포부를 품은 이들에 의해서 진행됐다. 당시 이 운동에 참가한 학술단체와 교육기관이 600여개에 이르렀으며, 각종 실험 프로젝트지역이 1000개 넘게 존재했다. 평화적 방법을 모색했고, 창업교육을 통해서, 농업개량, 유통금융, 협력증진, 지방자치와 자위책 마련, 불량한 풍속의 억제, 공공위생보건제도의 수립, 날로 쇠락해 가는 농촌경제의 부흥, 중국식 사회조직구조의 재건 등, 량슈밍이 이야기하는 모든 ‘민족자구책’을 실현했다.

량슈밍의 향촌건설이론은 일종의 특수한, 전통요소를 수용한, 중국식 근대화방안을 시도한 것이었고, 이러한 이론은 최소한 방법론상 상당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량슈밍은 중국이 당시에 근대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사명을 의식하고 있었다. 미래의 중국은 반드시 ‘단체생활’의 양태, 즉 단체생활 및 그 습관이든, 조직단체생활의 능력,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의 문제이든, 그러한 조직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중국인이 애초에 조직 능력을 갖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중국인의 삶과 마음의 기초위에 어떻게 이러한 생활을 심어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량슈밍은 사회기층민중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내었다. 유학의 실천성을 확대했고, 전통유학의 도덕실천을 경제활동이 내재된 사회적 실천으로 전환시켰다. 량슈밍이 보건데, 중국문화가 추구하는 합리적 생활과 인간질서의 최고 가치관은 바로 ‘합리성合理性’이었다. 이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뿐 아니라 인류자신에게 내재된 조화를 말한다. 이러한 종류의 ‘합리적 생활’의 ‘합리’는 합리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합가치성’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격상시키는 것이고, ‘욕망’만을 좇는 인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량슈밍은 이러한 가치의 긍정이 서방의 ‘향외축물向外逐物’ (외적인 것만을 좇는)적 인생태도를 바꾸어 인류사회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조화가 가능한 것은 사람 마음이 본래 선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성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질서의 유지는 ‘교화教化, 예속禮俗, 자력自力’으로 움직인다. 이성이 법률을 대체하는 것이다. 중국사회의 개조를 위해서, 전통문화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그위에 서방의 ‘단체조직’과 ‘과학기술’을 더하고, 조직과 현대화된 생산방식을 통해서, 농업이 공업을 이끌고, 민족의 부흥과 중국문화의 재건을 위해 물질적 기초를 제공한다. 량슈밍은 전통을 반대하는 큰 흐름 속에 새로운 유학을 창도하려고 했다. 유학의 ‘항상지도恒常之道’와 ‘인문예지人文睿智’에 진력했다. 그의 노력이 유학의 문화명맥을 보존했다.

Guy alitto가 주장하듯이 량슈밍의 작업의 진정한 의의는 세계범위내에서 일종의 공통보편적인 ‘非비보수, 非비전통현상으로서의 -근대화’에 대응하는 예를 만들어 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다른 국가나 지역의 문화전통주의자와 비교컨데, 량슈밍의 수월성은 그가 중국이 기초단계에서 서구적 근대화의 부작용을 피하기를 희망했고, 중국문화중에서 근대성 요소보다 나은 점을 분석하여 서구적 근대화의 경로를 수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 있다. 동아시아 근대화의 성공실천은 동방의 근대화가 꼭 서방의 충격에 의한 수동적 반응 현상이 아닐 수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국외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중국문화의 특징인 유교문화의 본토자원을 발굴하고 이용함으로써, 적극적인 참여하에 중국 국민의 도덕정신과 사회경제생활을 재건하고, 중국적 근대성에 합리적 자원을 제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량슈밍은 중국문화를 단순한 민족문화나 지역문화로 이해하지 않았다. 보편적이고 전지구적인 문화로 간주했다. 전통 유교의 시각으로 볼 때, ‘중국’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함의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더 큰 문화적 의의를 갖는다. 량슈밍은 문화와 정치의 두가지 의미를 ‘중국’ 개념에서 확인했다. 그는 보편성을 갖춘 중국 문화를 전심전력으로 사고하고 지켜나갔다. 또 민족국가의 부강과 독립의 길에 대해서도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향촌’이 중국전통문화의 담지체가 되고 또 보편적 의의를 지니고, 한편으로는 특수한 의의를 지니도록 했다. 그의 일생 공부의 최대 공헌은, 아마도 중국인으로서 근대화라는 목표를 고려하면서 서방사회의 이미 알려진 폐단을 극복하는 동시에 완전히 탈피 할 수 없는 배경요소로써 중국고유문화를 중시한 것이다. 현대중국 근대화 제도의 본래 토양위에 미래지향적인 방안을 설계한 점이 가장 중요하다. 량슈밍은 중국 문화를 일종의 ‘조숙’한 문화로 상상했다. 아마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량슈밍의 중국근대화와 근대제도 설계의 탐색도 실은 당시에는 ‘조숙’한 (너무 빨리 와서 성공할 수 없었던) 방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20세기 중국 사상사의 매우 중요하면서도 영구적 가치를 갖는 부분으로 남았다.

 

《산동사회과학》2016년 제10호에 게재된 논문이며, 번역자가 저자와 해당학술지의 동의를 득하여 번역 전재함. 

본 논문은 일본 아시아 문제 연구 기금의 지원으로 수행된 연구 결과임. 

李善峰(리샨펑)

중국 산동성 사회과학원 연구원, 산동성 사회학회 회장

주요 연구 분야는 사회연구방법, 사회발전 및 공공정책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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