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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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능한 시민이라는 신화
  • 아베 신조와 일본회의
  • 다르고도 닮은 세상에 대해, 라틴아메리카를 말한다
  • 남북경협은 위기에 처한 남한경제의 탈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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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백년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이번엔 다른 출발로 시작하고자 한다.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시작해보겠다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프랑스의 작가 폴 부르제가 한 말을 통일문제와 연관시켜 보려 한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연상하면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통일이 당장 되겠어. 우선은 평화야’, 또는 ‘통일이 밥 먹어주나?’ 그런 말과 상관있다.

언뜻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한 꺼풀만 벗기고 들어가면 엄청난 불편한 속뜻(딜레마)이 숨어있다. 사실상 통일에 관심 없거나,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통일 그 자체를 반대하고 있을 수도 있어서 그렇다.

다시말해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문제였으니 통일이 밥 먹여줄 리 없고, 사실상 먼 미래 일로, 혹은 인식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것이다.

과연 괜찮기는 한 것일까?

전혀 괜찮지 않다. 먼저는, 헌법조항이 계속 사문화되는 그런 우가 발생한다.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되어있고, 제4장 제1절 66조 ③항에는 대통령의 의무에 대해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라고 명확히 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각 주체들이 이를 수행하려 들지 않는다? 뭔가 잘못되어 있고, 책임 방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다음으로는, 통일이 저절로 된다든지, 또는 오는 것이 아니라면 통일을 위한 (목적의식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전혀 그러하지 못하다면 이는 통일을 방기하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다시말해 전 국민이 통일과 관련해 생각할 수 있게끔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부르제가 말했듯이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게’끔 교육도 해야 하며, 정부는 정부대로 정책을 통해, 실천이행을 통해, 그렇게 다양한 형식과 방법을 통해 통일을 ‘생각’하게끔 해내어야 하는 것이 그 국가적 책무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지 못하다.

비교 대상이 조금은 엉뚱할 수 있으나, 다음의 상상에서 그 후과가 얼마나 큰지 잠깐 한번 생각해보자.

IQ가 똑똑할지는 모르겠으나 사고가 시대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이지 않고, 도덕·윤리적이지 않다면 당시 70% 내외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서도 “문재인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극언과 함께, ‘이딴 게 무슨 대통령’이라며 ‘문재인을 탄핵하자’고 했던 그런 인물(김준교 자유한국당 청년최고위원 후보)들이 판을 치고, 카이스트 교수라는 사람(이병태)은 “직지심경과 한글에는 구텐베르그의 인쇄술과 달리 보통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혁명적 효과가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사유와 자기성찰이 사라진 사람과 민족에게 볼 수 있는 그런 극단의 한 형태가 그렇게 창궐한다. ‘생각과 사유가 사라진’ 민족과 국가가 맞이해야 될 미래의 ‘암울한’청사진이다.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는 그런 시그널이다. 비례해서 민족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자본과 물질의 힘이 이끄는 데로만 향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른바 세속적 인격체만 형성되어 미래는 설계되지 못하고, 삶은 반복되고 행동은 ‘경직’된 패턴(a pattern)만 난무한다. 다시 말하면 ‘익숙한 습관만을 견고하게’ 하여 ‘생각하는 그 능력자체’를 소멸시킨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의 행동에 무엇이 문제가 있는지, 뭐가 잘못되고 있는지, 뭐가 부족한지, 뭐가 성찰되어야 하는지를 잃어버리는 그런 괴물 아닌 괴물이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이가 분단체제와 연동하게 되면 그와 비례해 분단적 사고는 계속 공고화해지면서 커지고, 그렇게 분단적 사고에 익숙하게 되면 분단적 사고가 마치 정상적인 것 인양 착각하게 되고, 그렇게 착각되어있다 보면 통일염원은 온데간데없어진다.

마치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도 같다. 분명 ‘악’인데 모두가 공범의식을 느끼고 있으니 그 누구도 그 ‘악’이 나쁜 것인 줄 모른다.

‘잊힘의 평범성’도 그 ‘무관심’이라는 그런 집단공유를 통해 정당화된다. 통일을 모두가 외면하니 외면하더라도 이미 모두가 그 ‘무관심’에서 공범자가 되어있으니 통일(에 대한 문제)을 잊는다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가?

 

왜 통일해야 하는가?

기억을 더듬으면 비록 우리에게 이미 그것이 과거가 되어버렸다 하더라도, 한 때 우리에게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절박하고도 절절하게 심장 박동 수는 그렇게 약동했다.

더 ‘늦지 않게’ 그 감동과 심장 박동수를 되찾아야 한다. 빛바랜 개살구도 아니어야 하고, 옛 추억을 듣기 위한 낡은 레코드판도 아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도 있다.

원치 않게, 원래는 같은 민족이었던 우리 한민족이 외세의 힘에 의해 분단되어졌고, 그 토대는 결국 전쟁과 체제경쟁이라는 부속물을 낳았고, 결과도 분단고착화가 더 심해지는 그런 불행과 맞닿았다. 장장 70여년을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그렇게 한 세기가 다가온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불행이 우리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 원인은 누가 뭐래도 ‘외세의 의한 분단’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는 정상적이지가 않는 것이다. 즉, 우리가 자초한 불행이 아닌데, 왜 우리가 그러한 업보를 짊어지고 끙끙거려야만 한단 말인가?

벗어나야만 한다. 외세의 장난에 꼭두각시처럼 그렇게 장단 맞추는 그런 못난 민족이 되어서는 결단코 안 된다.

분명한 이유도 있다. 이 원인제거를 우리 스스로 끝장내지 못한다면 민족적 불행은 계속되고, 경제와 수출로만 먹고살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럼으로 같은 민족이라는 그 당위가 결코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는 그런 앙칼짐은 지금도 한물간 그런 20세기의 담론이 결코 될 수 없으며 지금도 여전히 ~ing하는 그런 현재이다.

그렇게 분단으로는 분명 밥도, 평화도 얻지 못한다.

반론하시겠다고? 얼마든지 그렇게 하시라. 하지만, 당신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예를 들어 그렇게 반론하고 싶어 하는 그 예는 ‘정치적으로 볼 때 반드시 같은 민족이라 하여 같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살 필요는 없지 않는가?’는 하나는 보았지만, 둘은 보지 못하였다는 치명적인 약점 하나가 있다. 다름 아닌, 우리 한반도에는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그런 ‘부정확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래 당신들의 말을 100% 수용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우는 원래 이들 두 국가가 같은 한 민족이었지만, 지금은 각각 다른 한 국가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으니 꼭 같은 민족이라 하여 같은 한 국가를 이루고 살 필요는 없다는 그런 논리를 성립시키려 한 것이니, 즉 ‘같은 민족이라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반드시 같이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논리를 성립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인식논리에는 대한민국(이하, 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조선)과의 관계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와의 관계에서는 비교될 수 없는 그런 전혀 다른 결정적 차이 하나가 있음을 스스로 간과시킨 것이다.

이른바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 존재하는 그런 민족성은 ‘같은’ 생물학적 동질성뿐이지만, 한국과 조선 간에 존재하는 그런 민족성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 존재하는 그런 같은 생물학적 동질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집단으로 형성된 그런 공고한 민족적 동질성을 갖고 있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같은 그런 단순비교가 성립하지 않아서 그렇다.

같은 언어, 같은 핏줄, 같은 문화, 같은 역사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 그것이고, 그것도 단군민족형성이래로 1천여 년 동안 그렇게 ‘함께’ 살아온 그런 민족국가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한국과 조선 간에는 그렇게 ‘있고’와 ‘없고’가 명확한 것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민족이 반드시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를 이뤄야만 되는 이유가 분명 있다.

민족자주성 회복문제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당신들은 독일의 분단과정과 통일되는 과정을 비교해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겠으나, 여기에도 그 결정적 차이는 분명 있다. 전혀 다른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다름 아닌, 한반도의 분단은 독일과 같이 분단이라는 그 현상이 똑같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갖고 있다는 말이고, 그러하기에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그런 대목이라는 말이다.

설명해보면 한반도의 분단과 독일의 분단이 같은 민족이었던 한 국가가 민족 스스로의 힘과 결정으로 분단을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같다.(: 현상에 의한 같은 결과)하지만, 독일의 분단은 전쟁을 일으켰고, 그런 전범국가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제질서가 독일분단을 강제해내었다면, 이를 똑같이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한반도는 패권전쟁을 일으킨 것도, 다른 국가를 점령한 것도 아닌데 그 책임을 물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되었어야 했다? 전혀 정상적이지 않는 결과인 것이다.

다시말해 미·소가 전후처리과정이라는 명분으로 개입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고, 외세에 의해 한반도가 분할· 점령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독일과는 달리 식민해방과정에서는 온전히 ‘원래대로’ 하나의 민족국가로 되돌아왔어야 했다. 그런데도 외세에 의해 자의적이고도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국토가 강제분할 당한 것은 우리민족으로는 너무나도 매우(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고, 결과도 국가적 통합성은 엄청 파괴되고, 그 민족동질성은 위협당하고 피폐화되어왔다. 비례해 당연히 민족자주성이 온전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선택한 결정이 아니니 당연히 고통과 아픔은 물론, 그 대가도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민족적 차원에서는 원래대로 자주가 그렇게 회복되지 못하였고, 못한 만큼 한쪽에서는 OECD 가입국인데도 진정한 주권국가인지 그렇게 의심받아야 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전략국가인데도 ‘가난한 국가’로 비아냥 받아야만 한다. 유일분단국으로 남아 ‘언제까지’ 그렇게 국제사회의 조롱거리 대상인지 모른다.

왜 그래야만 해야 하는가? 원하지도, 수모당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고통과 슬픔을 왜 한낱 외세의 농간 때문에 그렇게 끝장내지도 못하고, 병신같이 그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가?

결단코 그러면 안 되는 거다. 백번양보하여 우리 민족 스스로가 그런; 분단이라는 그런 선택과 결정을 했다면 이는 우리 민족 스스로가 그것을 감당해내어야 할 몫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는 한 국가를 이루는 가장 포괄적인 사회적 집단의 한 형태가 민족이라 했을 때 그 민족의 온전한 자주성은 완전한 국가통합으로 나타나야 하고, 그것이 또 정상이라 했을 때는 그 극복의 논거가 비록 민족자주성 회복이라는 그런 논거를 갖다 댄다하더라도 우리가 느끼는 그런 ‘무조건적인’ 당위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왜냐하면 우리민족 스스로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외세의 의해 그렇게 되었다면 이는 그 한 국가가 분단되어 겪는 슬픔과 고통, 비아냥들이 반드시 통합적 민족자주성과 반비례하게 되어 있어서 그렇다.

즉, 자의에 의해서가 아닌 타의에 의한 인위적 분단이기에 한 국가가 자주적으로 살며 살아가려는 민족적 요구가 철저히 거세당한 그런 민족적 불행과 고통은 비례되고, 그 비례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분단된 양쪽 모두에게 그대로 전이되며, 그렇게 전이된 그 고통과 불행은 분단에서 기생하게 되는 그런 만 악의 고통과 똑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찌 분단극복에 사활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외세의 강요에 의해 형성된 분단체제라면 더더욱 그러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분단과 민족적 자주성이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그런 문제이니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동시에 그런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단순히 남북관계를 과거의 분단 이전상태로 복구되는 그런 문제가 될 수 없다면 더더욱 그러해야한다.

이유는 민족자주성이라는 것이 자주적으로 살며 행복을 누리려는 그런 민족적 의지와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 텐데, 또 외세의 강요와 강권에 의해 짓밟힌 민족의 사회·정치적 생명을 되찾는 그런 것이 그 근본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이 그렇게 극복되어져야 하는 것이라면 이는 민족분단 극복이 단순 분단이전 상태로 복구되는 그런 민족통합으로만 볼 수 없어서 그렇다.

이름하여 그 민족의 사회· 정치적 생명인 자주성이 올곧은 방향으로 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주권국가로서의 부강조국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현실에서도 이는 외세에 의한 강제적 국토분할로 인해 파괴된 그 국가적 통합성을 회복하고, 또 민족분열이 장기화되면서 발생한 민족정체성위기를 민족동질성 수호와 그런 방향에서의 국가적 부흥을 통해 민족자주성이 완성되는 그런 민족사 최대의 절체절명의 위업이다.

 

통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통일이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업인 것이라면, 그렇게 사고되어져야 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문제에 귀 기울어야 한다. 분명하지만, 반드시 분명해야 하는 것은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철저하게 자주적이고, 민족대단결적이면서도 평화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지지와 협력도 반드시 필요하다.

명확한 근거도 분명 있다. 앞의 ‘자주적’과 ‘민족대단결’은 분단의 성격에 따른 근거이고, 뒤의 ‘평화적’과 ‘국제적인 지지와 협력’은 분단극복방법에 관한 원칙문제이니 더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 외세에 의한 분단과 전쟁의 경험은 분단극복의 원칙과 방법을 그렇게 명확하게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먼저, 그럼 왜 자주적이고 민족대단결적어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상술해보자.

분단의 원인과 성격을 짚어보면 이는 금방 나온다. 한반도에서의 국토분단이라는 것이 미소가 일본군 무장해제를 그 명분으로 하여 진행된 그런 인위적 38선 분할이라는 것이 그 결정적 증거이고, 그로부터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그 근본문제에 외세를 반대하고, 전 민족이 단합하고 단결하여 전국적 범위에서의 자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그 통일의 본령으로 하게 되었고, 때문에 통일은 반드시 외세를 반대·배격하는 그런 자주적 원칙을 띠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통일 경험을 벤치마킹할 수는 있으나, 자주의 원칙과 민족대단결의 원칙은 반드시 한반도 통일에 있어서 그 고유성과 절대성을 띄는 그런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분단지속의 한 원인이 남북이 각기 자신들만의 정부수립으로 인해 생긴 분열요인, 즉 체제분단 성격과 그리고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 있음도 분명하다. 특히, 한국전쟁은 필연적으로 민족을 서로 원수가 되어버리게 한 그런 갈등적 상황을 발생시켰고, 비례해서 그런 아픈 상흔은 필연적으로 통일이 절대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만 이뤄져야 함을 강하게 역설한다.

또 다른 한편, 국제정치이론의 관점에 볼 때도 국토분단은 그 결과가 서로 다른 체제가 들어설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그 다름은 결국 체제경쟁과 함께 전쟁과 같은 그런 극단적 한 형태를 발현시켰다.

연장하면 전쟁은 그 대상동학의 관점에서 그 반대편인 평화와도 같을 텐데, 그렇다면 그 평화는 반드시 통일을 통해 완성시켜내려는 그런 속성을 갖기도 한다. 그 극단적 한 형태가 전쟁이고, 그래서 한반도에서의 전쟁(1950년)은 반드시 ‘통일전쟁’일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그 (통일)전쟁 역시 당시 미소라는 냉전질서를 뛰어넘지 못하고 그 하위체제로서의 남북체제로 포섭되고 말았기에, 그렇다보니 전쟁은 국제전이면서도 내전이었고, 내전이면서도 국제전인 그런 전쟁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도 38°체제라는 휴전체제를 낳았고, 그렇게 지속되어온 휴전체제는 분단을 더 영속하게 되는 그런 분단체제로 공고화되는 그런 참담한 결과를 낳게 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이렇게 그 결과가 참으로 값비쌌다. 또한 전쟁은 비록 재래식 무기가 사용되어졌으나, 한반도 전역을 초토화시킬 만큼의 가공할 재앙이었다. 인구재앙은 물론, 전 국토의 산업시설과 기반, 경제는 엄청난(상상도 못할 정도의) 후유증을 유발시켰고, 역설적으로 이는 향후 전개될 한반도의 통일방식을 철저하게도 평화적인 방식이 되어야 함을 각인시켜준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국토분단의 완전해소 없이 안정적인 평화가 없음도 분명히 하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작금의 분단현실이 이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고, 그렇게 냉전체제와 분단체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남북 간의 사소한 긴장도 전쟁으로 비화될 그런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고, 그렇게 시작된 한반도의 전쟁은 곧 세계전쟁(제3차 세계대전, 핵전쟁)의 화약고로 전환하게 되어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니 분단극복은 반드시 해야 한다. ■세계적 차원의 냉전해소와 ■민족적 차원에서의 평화와 번영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통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 핵심 사안임을 각인시켜준다.

이른바 통일의 완성도적인 측면에서는 자주적 독립국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내는 그런 본질문제로, 현실국제사회에서는 국제적 지지와 협력을 통해 냉전체제해소와 최종적으로는 UN가입에 의해 마무리됨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이중 특히 UN가입은 그 자체로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면모가 완결되어진다는 의미에서의 문제여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근대국가가 형성된 이후 분단국가가 재통합될 시에는 예외 없이 유엔가입이 이뤄진 사례에서도 그 사실이 확인된다.

해서 그 결론을 다음과 같다.

우선은, 우리통일에는 우리의 길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길은 독일의 길, 예멘의 길, 베트남의 길도 아닌 ‘우리방식’만의 통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의 경우는 국제전범국가로서의 모델이기에 우리와는 전혀 다른 통합의 경험이고, 그 방식 또한 서독으로의 흡수통합인데, 결과는 경제문제와 동서독 갈등문제가 여전하다는데서 우리 롤 모델((Role model)이 되지는 못하며, ‘양안제’라는 중국식 통일방안 또한 우리 한반도가 걸어온 역사와 처지, 분단과정에서 맞닥뜨린 분단경험과 실정이 중국의 그런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다.(그럼으로 중국식 또한 적용대상이 아니다.)

또, 통일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되어야 하는 그런 문제도 우리 스스로의 한국전쟁경험과 베트남의 경우 무력통일방식이었으나, 그 후유증이 지금도 현재진형으로 나서고 있고, 베트남의 경우는 여전히 완전한 통합의 갈 길은 멀고(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간의 갈등과 앙금이 완전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멘의 경우도 합의통일을 이룩하였지만 결국에는 다시 재분열 되었고, 이후 다시 전쟁을 통해 통합되었으나 ‘사실상’의 내전상태로의 돌입되어 있으니 그 합의통일이 갖는 한계 또한 명확하다할 수 있겠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통일방식이 철저하게 자주적이면서도 민족적 대단결이어야 하고, 평화적이면서도 국제적인 지지와 협력의 방식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과 연방통일정부와의 상관성

살펴보았듯이 한반도에서의 통일문제는 이렇듯 여타 분단국가와는 달리 남과 북만이 가지고 있는 그런 특수한 상황과 조건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우선, 보편적인 의미에서 제국주의의 한 식민국가가 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면서 나서는 과제, 즉 그 제국주의로부터의 완전한 독립해방(자주권 회복)과, 그 국가의 봉건성, 혹은 반(半)봉건성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는 그런 문제, 이른바 ‘자주화’의 과제와 ‘민주화’의 과제가 그렇게 통합해서 나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한반도에서의 통일문제는 여기에다 ‘분단극복(=통일)’의 과제가 하나 더 추가되어서 그렇다.

이유는 완전하게 독립해야 될 그 과정에서 그 형태가 ‘완전하지(=독립)’못했고, ‘불완전한(=분단)’ 그런 형태로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어서 그렇다. 그래서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자주권 회복문제는 분단을 극복해야만 완성되는 그러한 한 특성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그 외세와 그와 결탁했던 그런 예속세력의 민족분열책동을 반대하고, 전국적 범위에서의 민족적 단합과 단결, 자주권을 회복하는 그런 차원에서의 조국통일운동전개가 필요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해서 한반도에서의 통일문제는 그렇게 완전한 자주권 회복문제와 직결된다. 즉, 통일문제를 풀어야만 자주권 문제가 완전히 풀어질 수 있다는 그런 문제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 첫째에도 둘째에도 그 모든 본질에 전민족적인 힘과 지혜, 역량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그런 통일전선전략과 노선이 필요하고, 그 셋째에는 외세(특히, 미국)의 부당한 지배와 간섭을 극복해낼 수 있는 그런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두 조합은 반드시 앤드(and)적어야 한다.

이유도 비교적 명확하다.

첫째는, 전민족적인 힘과 역량을 모을 수 있는 그런 조직적 구심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만,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벽을 넘어설 수가 있어서 그렇다.

다시 말하면 조국통일문제가 주권국가로서의 미국반대 내용뿐만 아니라, 전국적 범위에서의 자주권 회복문제임으로 인해 전민족인 단합과 단결, 즉 남북해외의 모든 역량이 총집결해야만 가능한 그런 문제이기에 반드시 북과는 연대연합의 관점에서 민족공조를 해야 하며, 남(南)에서는 비록 그 정권이 한계가 있다하더라도 대북화해정책을 추구해나가는데 있어서는 적극 지지· 협력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비록 그 세력이 보수 세력이라 하더라도 6.15공동선언을 지지한다면 이들 세력들과도 연대·연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조국통일전선역량이고, 이는 다시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떠나 6.15공동선언을 동의하고 지지한다면 그 어떤 민족구성원이라 하더라도 다 함께 참여하는 그런 통일전선운동체가 되겠다.

그리고 그 원칙은 앞서 얘기했듯이 이른바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 6.15남북공동선언에 동의하는 모든 민족구성원들이어야 한다. 이는 조국통일운동의 본령과도 그렇게 딱 맞아 떨어지는 이유이다.

둘째는, 그 첫째로부터 지금의 문재인 정부가 촛불정부다운 성격에 부합하게 정국을 운영할 수 있도록 최대한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도, 비록 낮은 차원이기는 하나 미국반대의 일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견인해내는 그런 광범위한 활동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유는 아래 ‘셋째는’에서 분명하게 약술되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편으로는 연속적인 민주정부로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최대한 지지·엄호해야만 지속적인 조국통일운동을 전개해낼 수가 있어서 그렇다. 뿐만 아니라 조국통일의 일 주체, 그것도 평화를 넘어 통일문제를 전면화할 수 있어서 그렇다.

또한,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조와 개량주의 경향을 정확히 구분하고, 정확한 미국반대와 반미자주화개념을 정립하는 것도 매우중요하다.

즉, 통일문제 해결을 위한 반미자주화와 한 국가의 주권적 의미에서의 미국반대에는 그 동일성도 있지만, 그 차이성도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해내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야만 전선을 최대한 넓혀낼 수 있고, 통일운동을 전진시켜 낼 수 있어서 그렇다.

예는 이렇다. 불평등한 한미동맹을 정상화하는 그런 문제, 불평등한 한미협정을 평등한 한미협정으로 정상화하는 그런 문제, 부당한 방위비분담을 재조정하는 그런 문제, 주권국가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워킹그룹과 같이) 그런 문제 등은 주권국가와 주권국가간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쌍무관계가 불평등해서 나타나는 그런 문제이기에 이 문제는 통일문제해결을 위해 나서는 그런 반미자주화와 같은 전략노선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른바 국가이익을 되찾기 위한 그런 범위 내에서 벌어지는 미국반대와, 조국통일문제와 연동된 그런 반미자주화는 철저하게 구분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한미군철수, 북(조)·미(혹은, 북미남중)평화협정 체결,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철회 등과 같은 그런 문제가 바로 조국통일문제와 연동된 그런 반미자주화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이를 철저하게 구분하여 국민들로 하여금은 조국통일운동의 동력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고, 문재인 정부로 하여금은 정상적인 한미동맹으로 전환할 수 있는 힘과, 그 바탕 하에 조국통일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반드시 주어져야만 한다.

셋째는, 그 정치적 의미로 볼 때 남측정부에 민주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인데, 그 최대치에 ‘자주적’형태의 민주정부수립이 있고, 그 최소치에 ‘민주연립’정부구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도 이 문제는 미국의 부당한 지배와 간섭을 이겨낼 수 있는, 달리 말하면 비정상적인 한미동맹 체제를 극복해낼 수 있는 그런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해내거나(그런 정부구성은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 (주체적) 역량 상 당장 어렵다면 민주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이 연합하는 그런 정부형태, 다름 아닌 민주연립정부 정도의 수준(민주당+진보정당 연합의 정권형태)은 되어야만 남북 간 통합성을 높여나갈 수 있는 그런 정책을 구사할 수 있어서 그렇다.

당장만 보더라도 한미워킹그룹에서 그 확인은 되고 있다. 여전한 미국의 내정간섭 극복 없이는 그 어떤 형태의 통일을 향한 여정이라 하더라도 그 한 발자국 띠기가 정말 어려움을 알 수 있고, 구체적으로는 개성공단 기업인의 단순 방문도, 결핵약품지원사업인 타미플루 지원사업은 인도적 지원(유엔에서도 허용하는 그런 문제조차)사업으로 미국의 허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그 반출을 허용 받아야 할 만큼의 현대판 ‘미군정(=현대판 조선총독부)’이 실시되고 있고, 나아가 철수할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도 주한미군철수 카드로 방위비 인상과 내정간섭, 북(조)·미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그런 미국의 모습, 또 북핵을 그 빌미로 해서는 동북아에서의 패권유지와 제재국면지속의 명분으로 활용… 이 모든 상황은 그런 정부(=자주적 민주정부이거나, 최소한 민주연립정부) 등장 없이는 아주 자그마한 통일진전은 고사하고, 지속가능한 남북교류협력 조차도 힘 든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뿐만 아니다. 통일문제가 완전한 자주권 회복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하는 것은 위에서 확인되었듯이 통일문제가 전국적 범위에서 완전한 자주권을 회복하는 그런 문제이기에 그 자주권을 짓밟고 있는 외세, 즉 현실적으로는 반미자주화의 문제를 포함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사실의 문제에 직면하면 더더욱 신중하면서도 지혜롭게 전선운동역량을 펼쳐야 한다.

해서 앞의 미국반대는 자주적 민주정부형태가 아니더라도, 즉 민주연립정부(혹은, 촛불정부) 정도가 되더라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미국반대내용일 수 있고, 후자의 (반미)내용은 자주적 민주정부가 수립되어야만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그런 반미자주화의 내용임을 분명하게 각인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그렇게 정의해놓더라도 간과해서는 안 될 한 지점이 분명 있다.

다름 아닌, ‘낮은 단계가 해결되어야만 다음으로 높은 단계로 이행해나갈 수 있다’는 그런 사고와 정부구성의 형태 또한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를 구분하여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단계별로 나눠’ 버리는 그런 이분법적 약술방도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교조냐, 개량이냐를 가름하는 그런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고, 전략과 전술을 구사함에 있어서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쉬운 것에서부터 어려운 것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과 이를 이원화하고 분절적으로 사고한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니 더더욱 그렇다.

끝으로는 다시 조국통일문제의 본령얘기를 하면서 끝내려 한다. 앞서 내내 얘기했듯이 (조국)통일문제는 전국적 범위에서의 자주권 회복문제와 이를 위한 전민족적인 힘과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그러한 단합과 단결의 문제였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통일문제는 준비된 주체역량과 정부의 구성형태에 따라 그 소요시기의 걸 맞는 내용과 방도로 통일의 근본문제로 ‘지향’시켜 나가야 하는 그런 전략과 전술이 필요함도 알았다.

했을 때 여기서 그 중심은 주체역량의 문제를 남쪽의 단독역량만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고, 전민족인 힘(혹자는 이를 남·북·해외를 포함하는 3자연대의 원칙이라 부른다.)을 보는 것이다.

이유는 외세를 반대해야 하고, 외세가 개입되어 있는 그 통일문제를 풀기위해서는 북쪽은 북쪽대로, 남측은 남측대로 모든 통일애국역량은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광범위한 조국통일전선구축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에 상관없이 6.15남북공동선언에 동의하는 그 어떤 세력이라도 끌어안고 연대·연합하고자 하는 그런 통 큰 자세와 열린 마음가짐으로 조국통일전선에 최대한 많은 역량을 결집해 외세의 개입을 차단하고 단결의 힘을 과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당면한 조국통일운동과제를 명확히 제시하고, 그 핵심내용에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철회의 당위성과 연방연합 통일방안에 대한 대중적 합의운동, 비록 그 수준이 반미자주화의 관점에서는 낮을 수 있으나 그런 차원에서의 미군반대 운동도 적극 전개하여 대중들이 조국통일운동의 주인· 주체로 나서야 한다.

그러려면 반드시 남쪽(정부)만의 힘의 형태가 아닌, 전국적 범위에서의 광범위한 통일애국역량과 함께, 그러한 역량으로 보여 지는 통일정세는 비례적으로 분절적이고도 이원적이지도 않다. 다시말해 연대와 연합의 관점에서 서면 민족적 관점이 생긴다는 것이고, 그러면 조국통일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분절적이고 이원적인 인식문제가 남아있다면 이는 분명 조국통일문제를 남한관점에서만 본다는 것이고, 3자연대관점과 그 역랑의 총합으로 만들어지는 통일정세를 여전히 보지 못하다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할 문제가 그렇게 발생하고 있음이다.

 

통일뉴스, 2019년 4월 18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필자와 협의하여 수정 후 본지에 실린 것임).

김광수

정치학 박사(북한정치 전공) · 『수령국가』 저자 ·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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