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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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국론>과 나라살림

건국론 표지

<건국론>을 음미했습니다. 원불교 2대 종사 정산의 작품입니다. 대종사 소태산의 도반이자 수제자이고 후계자였습니다. 출간 시점이 탁월합니다. 1945년 10월, 광복 직후입니다. 나름의 ‘준비시대’를 거쳤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도둑처럼 온 해방’에 임하는 ‘정치적 영성가’의 치열하고 치밀한 태비가 놀라웁습니다. 운동기 의암 손병희는 도전(道戰), 언전(言戰), 재전(財戰)을 준비했습니다. 건국기 정산 종사는 도치(道治), 덕치(德治), 법치(法治)를 앞세웠습니다. 항쟁의 단계를 지나 건설의 단계로 이행한 것입니다. 저항은 차라리 쉽습니다. 창업과 수성이야말로 정치의 극점입니다. 도치와 덕치는 도덕정치이니 동학의 후예로써 낯설지 않은 발상입니다. 백미는 역시 법치에 있다 하겠습니다. 불교적 도치와 유교적 덕치에 법가적 경세론을 결합시킨 것입니다. 혹은 동방의 정치사상에 서방의 정치기술을 접목한 것입니다. 개벽에 개화를 접속시켰습니다. 혼란하고 혼탁했던 해방정국에 이미 동서문명회통의 전범을 일찍이 선보인 것입니다.

정산 종사

하기에 종교와 정치에 대해서도 득의의 관점을 제기합니다. 정교일치도 아니요, 정교분리도 아닙니다. 성이 속을 압도하는 신정도 아니요, 속이 성을 능가하는 세속정도 아닙니다. 종교는 근본을 닦는 집이요, 정치는 마무리를 다스리는 기관이라 하였습니다. 근본과 말단을 두루 고루 아울러야 원만하고 원대한 문명세상이 열리리라 하셨습니다. 하여 ‘정교동심’(政敎同心)입니다. 한 마음에서 비롯된 두 영역이 종교와 정치로 역할을 분담하는 것일 뿐입니다. 고로 “주의는 일원주의요, 제도는 공화제도라” 일컬었습니다. 각지고 모난 마음부터 원만하고 원대하게 다듬고 보듬어야 합니다. 그 일원주의 사상을 물질화하는 것이 바로 공화제도입니다. 하여 공화제는 단순히 선거제나 민주제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필히 종교와 교육을 통한 ‘정신적 자각’을 요청합니다. 수양과 수행이라고 고쳐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각자의 마음을 반성하여 항상 그 개선에 전력을 다하는’ 자각한 민중들의 정치가 바로 공화제입니다. 계급의식의 각성을 촉구했던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계층, 지역, 젠더 등등의 온갖 분별심에서 훌훌 벗어난 한마음을 연마할 것을 격려하고 독려했던 것입니다. 응당 그 일원주의 공화국이라 함은 노동자(프롤레타리아)국가도 아니요 시민(부르주아)국가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인이 주인 되는 20세형 민주주의를 훌쩍 넘어선 만인이 성인되는 원만한 군자국가, 원대한 보살국가, 원숙한 개벽국가였을 터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기웃거리고 소련에 갸웃거리는 개화 좌우파의 짓거리를 흉내 내지 않는 줏대 있는 개벽파로 떳떳할 수 있었습니다. 실로 21세기가 요청하고 있는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의 맹아입니다.

다만 마음공부, 심학(心學)만 일방으로 강조했다면 <건국론>의 가치는 덜했을 것입니다. 제도공부, 실학(實學)이 튼튼하게 받쳐주어서 그 부가가치를 증폭시킵니다. 제5장 “국방”과 제6장 “건설과 경제”가 유난히 반가운 까닭입니다. 전기공업을 증강하고 지하자원을 개발하고 운수교통의 개수를 역설합니다. 일제의 자산을 공익재단 건설로 유도하여 국영경제와 민영경제의 조화를 탐구하는 대목도 미덥습니다. 발명과 기술을 강조하고 의학의 중요성도 밝히고 있습니다. 요즘말로는 혁신경제를 장려하는 것이고, 옛말로는 항산을 다지는 것입니다. 청빈(淸貧)에 안주하지 않고 청부(淸富)를 탐구했습니다. 난세에 쏘아올린 토착불교가 치세의 유학을 내포하여 건국기의 개벽불교로 진화했음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하여 종교인의 언설이라고는 해도 일말의 관념론도 허용치 않고 있습니다. 철저한 합리주의와 실용주의, 실사구시에 바탕해 있습니다. 그래서 어설픈 공산주의적 평등주의도 설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리자와 노무자의 공평한 대우, 리더십과 팔로우십을 저마다 제대로 갖출 것을 역설했습니다. 대종사의 강자 약자 공진화의 지혜를 현장과 현실로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소년 시절 <통감>을 읽히며 천년의 경세론을 익히는 등 반천년 유교의 토대 위에서 개벽의 자각을 얹었다고 하겠습니다. 하기에 원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론 또한 튼튼했던 것입니다. 나이브한 정신주의나 도덕주의와는 결이 다르고 격이 달랐습니다.

실로 사회과학 없는 동양학은 앙꼬 없는 진빵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의 한국 유교가 형편없이 하강한 데에도, 저는 사상의 부재보다는 ‘경세의 경험 부재’ 탓이 더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 역사 최장의 최고의 경세론을 근대 국가의 경영(Statecraft)에 접목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공자 왈, 맹자 왈 비아냥이 생깁니다. 치평(治平)의 노하우가 없다면 찻잔 속의 태풍, 공리공담에 그치는 맙니다. 성균관대학교의 신정근 교수가 이끄는 ‘선비민주주의 총서’ 시리즈를 흥미롭게 따라 읽고 있습니다. 민주와 민본을 회통시키려는 지적 작업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논문만 써서는 ‘선비 민주’가 이루어질리 만무하다고 생각합니다. 캘리포니아의 주정부 거버넌스 혁신처럼 필히 현실정치와 접목이 되어야 유학의 특장이 되살아납니다. 중앙정부와 서울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성균관대가 자리한 종로구에서라도 실험에 나서보기를 권장합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21세기의 개벽파 또한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살림과 경영의 연마가 없는 개벽학은 종이 위의 허풍으로 그칠 공산이 큽니다. 원광대학교의 개벽학 연구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익산시와 전라북도를 개벽시키지 못한다면 ‘개벽’이라는 간판을 내려놓는 편이 타지역과 중앙의 개벽파를 위해서도 이로울 것입니다. 유학의 현재를 비판하기보다는 개벽학의 반면교사로 삼는 엄정한 자기성찰이 필요합니다. 부디 개벽시(市)와 개벽도(道)와 개벽학이 공진화하길 바랍니다. 지역과 산업과 학문이 삼합을 이루어 삼투작용을 일으키는 시산학(市産學) 콘소시엄을 제안합니다.

<건국론>이 상징하듯 해방공간의 원불교도 세속 정치에 적극 개입했습니다. 유교의 현실 참여 정신 뿐 아니라 개벽종교들의 사회변혁 의지를 오롯이 계승했습니다. 미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부터 미륵이 되어 미륵세상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건국 노선으로는 중도와 중립을 표방합니다. 좌우의 이념적 편향성을 배제하는 중도를 내세웠고, 소련이나 미국 일방에 기울지 않는 중립을 앞세웠습니다. 중도와 중립은 기계적인 평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역동적인 균형, 중용의 현대화입니다. 방법과 방편은 ‘대국 관찰’(大局 觀察)입니다. 전 세계의 대국과 대세를 주밀하게 관찰함으로써 자국에 가장 적절한 방향을 찾아가는 주체노선을 확립해야 합니다. 정산은 “기미(幾微)를 통찰하고 고금을 짐작하여 부패해진 종교와 정치를 새로운 방법을 써서 다시 그 시대의 활물(活物)로 만드는 자가 곧 새 세상의 구주(救主)”라고 하셨습니다. 옹졸하고 편벽된 척사파도 아니요, 맹목적 추종으로 일관하는 개화파도 아닌 것입니다. 좌/우파 정치성으로 물든 세속의 이데올로그 또한 아니었습니다. 하기에 정산은 정치적 영성으로 성성하여 시중을 꿰뚫고 꿰찼던 달관의 구주였던 것입니다.

 

2. <삼동윤리>와 지구살림

다시금 때가 절묘합니다. 1962년 열반하셨습니다. 종법사에 취임하신 것은 1943년입니다. 식민지 근대화의 말엽에서 조국 근대화의 초입까지 원불교를 이끄셨던 것입니다. 4월 혁명, ‘군자들의 행진’은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5.16 반혁명, ‘군인들의 행군’이 남한의 근대화를 추동했습니다. 뒷배는 역시 미국이고, 모델은 다시 일본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일생 좌파와 우파를 오락가락했으나 개화파의 화신이었다는 점에서는 일관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구국의 영웅’이었다면 정산은 ‘구세의 성자’였습니다. 더 멀리 내다보고 더 깊이 나아갔습니다. 1961년 열반게송으로 발표한 것이 바로 삼동(三同)윤리입니다. <건국론>이 민족의 지도자로 쓴 글이었다면, <삼동윤리>는 만민족 인류의 스승으로 승화한 문건이라 하겠습니다.

삼동윤리의 첫째 강령은 동원도리(同源道理)입니다. 모든 종교와 교회가 그 근본은 다 같은 한 근원이고 도리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화합하자고 했습니다. 둘째 강령은 동기연계(同氣連契)입니다. 모든 인종과 생령이 근본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화합하자는 것입니다. 셋째 강령은 동척사업(同拓事業)입니다. 모든 사업과 주장이 다 같이 세상을 개척하는 데에 힘이 되는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화합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는 지구적 이상론을 설파하게 됩니다. 모든 종교와 사상, 인종과 민족, 주의와 사업은 물론 우주 만물이 대동화합하고 다 같이 공존공영하는 방법을 원리적으로 간결하게 제시한 것입니다.

당장 연상되는 책이 캉유웨이의 <대동서>입니다. 남한에서도 동방의 유토피아, 대동세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출시된 것입니다. 다만 인물의 품격이 다릅니다. 캉유웨이는 일생 선지자, 메시아 의식으로 충만했습니다. 반면 정산은 겸손합니다. 대자대비의 세계주의가 이미 불보살 성현들이 밝혀둔 이치라며 겸양합니다. 성현과 성인이 밝힌 진리를 민주화하고 민중화하며 세계화하는 것이 바로 ‘다시 개벽’이라 하겠습니다. 선천과 후천의 차이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고로 천하론의 업데이트라고도 하겠습니다. 정산 대사가 직접 “과거에는 천하의 도가 다 나뉘어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천하의 도가 모두 합하는 때이니 세계주의인 일원대도로 천하를 한 집안 만드는 데 힘쓰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동시대의 마오쩌둥이 삼국지의 천하삼분론을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삼개세계론(제3세계론)을 제기하고 문화대혁명을 수출하려 든 것과는 급이 다른 발상입니다. 천하위공의 가치를 폐기처분한 것이 아니라 더더욱 지구화한 것이니 21세기 하고도 10년이 더 흘러서 발족한 베르구르언 연구소(Berggruen Institute)의 신천하 프로젝트를 연상시킨다 하겠습니다. 지난해 베이징에서 열린 첫 회의에 이어 올해는 칭다오에서 후속 회의가 열립니다. 정산의 삼동윤리를 글로벌 공론장에 소개하려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삼동윤리는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와 긴밀합니다. 아니 1860년 동학 창도 이래 100년의 역사와 직결됩니다. 동학운동 2.0이 삼일운동이었고, 그 삼일정신을 다시 현대화시킨 것이 삼동윤리라고 하겠습니다. 삼일과 삼동을 함께 견주어야 20세기 개벽사의 등뼈가 바로 서는 것입니다. 개벽파의 전위세력으로서 천도교와 원불교의 위상 전환을 상징하는 바도 없지 않습니다. 천도교가 주도했던 삼일정신을 원불교적으로 세련화하고 세계화한 것이 삼동윤리라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종교연합으로 삼일혁명을 일으켰던 것처럼, 삼동윤리 또한 전 지구적 지평에서의 종교연합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불교의 계보와도 정합적입니다. 소태산의 일원주의가 정산의 삼동윤리를 거쳐 대산종사의 종교연합(United Religions)운동으로 부단히 진화했던 것입니다. 교파를 초월한 종교인식과 탈종교와 다종교를 아우르는 발상은 새천년 인류의 행방을 내다본 것이라 하겠습니다. 삼동윤리를 학술적으로 천착한 <미래사회와 종교>가 2000년에 출간된 것 또한 우연만은 아니지 싶습니다. 1900년에 이 땅에 나셔서 베푼 지혜가 2000년 이후 ‘다른 백년’과 ‘다시 개벽’의 영감이 되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새천년에 태어난 21세기의 신청년들, 밀레니얼들에게 딱 어울리는 발상이자 사상입니다.

소태산 평전

실제로 20세기형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에서 21세기형 인터페이스(Inter-Faith)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작년 11월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의 집합적 지혜였습니다. 하노라면 미륵의 처소, 개벽의 성소 익산을 ‘글로벌 개벽시’로 탈바꿈시켜서 세계종교의회를 개최해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원불교에는 본디 그만한 원대한 비전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형수 선생이 쓰신 <소태산 평전>의 마지막 장 제목이 ‘인류세’였음 또한 가히 예사롭지 않습니다. 부디 일백년 전의 기백과 기상을 현대적으로 계승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3. 개벽 좌/우파의 대연정

홍석현

1980년대 대산 종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북조선과 통일 문제에 눈을 뜬 인물이 홍석현 회장입니다. 언론사 사주이기 이전 본디 학자였습니다. 공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를 두루 익힌 현대판 실학자입니다. 국제개발은행(IBRD)을 거치며 세계감각을 습득하고 KDI에 근무하며 한국 경제의 실상을 익혔습니다. 주미대사까지 역임하였으니 또래의 한국인 가운데 가장 경험이 넓고 식견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최근 그 분과 한국의 현재와 현실에 대한 진단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웃나라를 포함하여 세상사 돌아가는 것과 무관한 듯 정치하는 작금의 꼴에 대한 걱정과 비판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대국을 관찰하고 대세를 주시하며 대전략을 입안해야 할 터인데, 임기응변과 선거공학에만 능한 3류 학자들에게 휘둘리고 있노라 우려하셨습니다. 제가 ‘모던보이’ 개화좌파 시절이었다면 보수우파의 편향된 시각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깊이 수긍되는 대목이 없지 않았습니다. 아니 적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평화 오디세이

절로 정산의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개혁을 하려면 먼저 천하의 대세를 볼 줄 알아야 하고, 그 시운에 따라 그 시대를 향도할 바른 법이 있어야 하며, 또한 그 법을 운전할 만한 개혁되고 혁신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준비가 되지 않고 개혁만 하려 하면 시끄럽고 무질서만 초래할 뿐입니다.” 오늘에 비추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진단입니다. 민주화세력, 집권당의 준비가 태부족이었음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천하의 대세를 볼 줄도 모르고 법을 짓고 사람을 키우는 비전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촛불혁명으로 방벌시킨 지난 정권과 기질적으로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불투명하고 과거에 대한 투쟁만 선명하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입니다. 한쪽은 1970년대를 추억하고, 다른 쪽은 1980년대를 되새김질합니다. 2010년대 내내 ‘헬조선’은 복고풍으로 뒤덮이고 있습니다.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뒷심을 발휘하여 한반도 평화에 천착하는 홍석현 회장의 행보를 개화우파에서 개벽우파로의 회심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주 편에는 개화좌파의 선봉이었던 백낙청 선생이 계십니다. 홍 회장은 미국 서부의 최고 명문 스탠포드 출신이고, 백 교수는 동부의 최고 명문 하버드에서 공부했습니다. 두 분 모두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20세기 문명의 정수, 아메리카의 중화를 섭취했던 ‘신청년’들이었습니다. 생각의 크기는 경험의 폭과 깊이 결부됩니다. 사유의 사이즈와 스케일을 좌우하곤 합니다. 백낙청 선생을 오늘의 반열에 올린 저작이라 할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시리즈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 역시 세계적 감각이 탁월했던 글로벌 인재입니다. 20세기 말, 20대부터 써온 백낙청의 거의 모든 글을 몰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참으로 독특하다 여겼던 점이 바로 ‘마음공부’라는 말이 거듭 제출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리얼리즘이니 민족문학론이니 분단체제론이니 퍽퍽한 담론을 개진하다가도 이따금씩 마음의 공부를 강조했던 것이 당시에는 퍽이나 이채로웠습니다. 그 또한 원불교와의 깊은 인연의 소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의아함이 풀려났습니다. 그래서 창비 사단 가운데서도 유독 ‘개벽’이라는 말을 종종 구사하셨던 것입니다.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이라는 책도 출간하였죠. 그 연장선에서 창비의 싱크탱크인 세교연구소와 원광대학교가 함께 개벽담론을 공동 연구하는 모임도 곧 발족하게 됩니다. ‘개벽좌파’로 간주해도 어색하지 않을 동향입니다.

백낙청

원불교좌파 백낙청과 원불교우파 홍석현을 동시에 숙고해보는 요즘입니다. <건국론>의 비전이 실현되지 못하고 분단체제가 확립된 것에는 외세의 탓 못지않게 개화좌파와 개화우파의 갈등과 반목이 치명적이었습니다. 원만한 마음을 조탁해가는 정신개벽을 수반하지 않는 개화파가 득세함으로써 원대한 국가 또한 이룩하지 못하고 옹졸한 분단국가로 귀착되었던 것입니다. ‘근본은 통 비어 두럿하고 원만하여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심지를 다진 개벽좌파와 개벽우파의 대연정을 궁리해 보고 있습니다. 좌/우의 갈등을 넘어서, 남/북의 분단을 넘어서 개벽과 개화의 대합장과 대합창을 견인할 수 있지 않을까 궁구해 보는 중입니다. 이념으로는 좌/우가 갈리되 마음으로는 ‘좌우 동심’에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여 정교동심에 좌우동심을 결합시키고 싶습니다. 20세기의 최대연합전선이었던 신간회는 개화 좌/우파가 선도하여 끝내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21세기의 최대연합노선 ‘신간회 2.0’은 필히 개벽 좌/우파가 선창하는 편이 이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유상종에서 구동존이(求同存異)로의 대전환, 두 분의 지긋한 원로가 감당해 주시면 감사할 일입니다. 북조선식 척사와 남한식 개화를 지양하는 분단체제 극복 운동의 대들보로서, 리셋 코리아의 디딤돌로서 개벽좌우파의 대연정부터 촉구하는 바입니다.

유교와 개벽을 논구해주신 글에서 다산의 ‘기독유학’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동방의 유학사와 서방의 서학사가 조우하여 빚어내는 빛나는 지구사상사의 풍경이 이채롭습니다. 다산을 기점으로 이미 유학사과 서학사의 삼투 작용은 심층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19세기 후반 기학과 동학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등장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신학과 유학의 회통을 선도하고 있는 분들을 다산의 후예로 접근하는 지점도 넉넉히 수긍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서학 2.0 천주교와 기독교는 20세기 후반 한국의 민주화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던 바입니다. 특히 ‘원주학파’ 장일순과 김지하 및 한살림운동 등 동학 3.0의 환생에 천주교의 매개 고리가 있었음도 절묘한 구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20세기 유학의 업그레이드를 복구했습니다. 다음 글에는 20세기 서학의 업데이트를 복기해보고자 합니다. 정교동심, 좌우동심에 동서동심(東西同心)까지 장착하여 ‘뜻으로 본 한국의 서학사’를 천착해 보고 싶습니다.

이병한(다른백년 이사)

다른백년 이사, 원광대 동북아연구소 교수, 유라시아 문명사학자. 저서로 『반전의 시대』, 『유라시아 견문』3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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