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21
  • 굿바이! 100년의 급진, 그리고 새로운 100년, 생태문명과 신향촌의 건설
  • 러시아는 왜 한반도 상황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까?
  • 폼페이오와 볼턴이 또 국제사회에 행패를 부렸다
  • 16세 소녀의 외침 “우리의 미래를 빼앗지 말라”
  • 좌파 포퓰리즘,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새로운 정치
       
후원하기
다른백년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The Future is Gaebyeok!

싱가포르에서 접하셨다는 “The Future is Asian”이라는 책 제목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 식대로 바꾸면 “The Future is Gaebyeok!”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벽파를 자처했다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개화학이 아닌 개벽학에서 찾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학술대회를 디자인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대화마당을 만들어 간다면 지금처럼 생기 없고 늘어지는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학술대회 자체를 개벽해 나가면 되니까요.

토착적 근대화 학술대회

그래서 오는 8월 15일-16일에 열릴 한일공동학술대회 「지구적 근대와 개벽운동」은 오랫동안 실천 현장에 계셨던 분들도 모실 예정입니다. 협동조합운동의 이남곡 선생님, 공동체운동의 유상용 선생님, 한살림운동의 김용우 선생님 등이 참여하시기로 했습니다. 이번 학술행사는 2017년 가을부터 원광대에서 시작된 ‘자생적 근대와 개벽사상’ 학술대회의 시리즈로, 벌써 4회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대중의 관심과 논의의 수준도 높아지고 있고요.

이번에는 지난 2년간의 축적을 바탕으로 익산을 벗어나서 서울에서 판을 벌일 생각입니다. 일본에서는 기타지마 기신, 오구라 기조, 가타오카 류 교수님을 비롯하여 총 다섯 분의 발표자를 모실 예정인데, 모두 한국사상과 개벽사상에 조예가 깊은 ‘지한파’ 학자들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경희대 김상준 교수님의 「후기근대에 다시 보는 동학혁명과 개벽사상」을 비롯하여, 소태산평전의 저자 김형수 작가님의 「신동엽이 노래한 자생적 근대」, 정지용의 시와 주체의식의 저자 김영미 선생님의 「정지용의 자생적 근대문학」, 그리고 선생님의 「중국의 ‘개벽파’, 량수밍의 향촌건설운동」 등의 발표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자센터 삼일절 행사
은빛순례 매듭마당

이번 기획은 작년 학술대회가 끝난 직후부터 6개월 동안 준비하였는데, 발표자들이 하나같이 ‘개벽’에 공감하고 계시는 분들이라 한층 더 심화된 학술마당이 되리라 기대됩니다. 제 개인적인 바람인데, 내년 학술대회 때에는 개벽포럼에 연사로 오시는 은빛순례단의 도법스님이나 ‘다른 백년’의 이래경 이사장님, 하자센터의 공공하는 청년들도 발표자로 모시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론과 실천, 대학과 현장의 소통과 연대를 쌓아나가면 개벽학의 얼개가 조금씩 잡혀지겠지요.

그래서 하노이의 북미회담 결과에는 크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총애를 받으나 욕됨을 당하나 놀란듯이 하라”(寵辱若驚)고 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길을 묵묵히 가면 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 밝히신 향후의 계획에 크게 공감하고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연구자의 자세로 올해 ‘범개벽파’의 집합지성이 쏟아낸 각종 3.1혁명론을 요령껏 갈무리”하는 일이야말로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이고, 선생님이야말로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한국 근대

“삼일절은 개벽절이다!”는 선언은 대단히 통쾌합니다. ‘개벽’으로 한국 근대를 다시 보아야 한다는 제 생각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삼일만세운동은 ‘동학농민개벽’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치 80년대에 전대협이 전국의 대학생 조직을 규합하고 대규모 행사를 기획하는 경험을 해 보았듯이, 1894년에 한국인들은 이미 전국적으로 판을 짜 본 것입니다. 그래서 25년 뒤에 재현하기가 수월했을 것입니다. 이 양자에 걸쳐 있는 인물이 손병희입니다. 손병희는 동학을 재건한 최시형의 제자이자 천도교의 창시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아직까지는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각 종교계는 물론이고 학계와 정치계에서 다양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동학농민운동과 삼일만세운동의 연관성>에 대해서 ‘사상사적’ 맥락에서 접근한 연구는 못 본 것 같습니다. 3.1운동은 천도교가 주도했고, 천도교는 동학의 후신이며, 동학농민운동과 3.1만세운동은 모두 비폭력평화운동을 지향했다는 정도의 연관성만 지적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사실 ‘자생적 근대’라는 관점에서 보면 삼일만세운동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의 곳곳에서 개벽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프롤레타리아작가로 분류되는 포석 조명희(1894~1938)의 시어(詩語)는 생명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 차 있는데, 저는 이것이 동시대의 일본이나 인도의 생명주의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동학‧천도교의 영향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생명의 수레>라는 시에서는 ‘우주생명’이라는 동학‧천도교 개념을 사용하고 있고, 1925년에는 개벽지에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조명희는 단순한 ‘프로작가’라기보다는 동학‧천도교의 생명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개벽적 프로작가’ 정도로 분류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더 쉬운 예로는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나 <금강>을 들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동학사상을 담은 개벽문학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또한 ‘개벽’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흔히 ‘모더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시인 정지용도, 김영미 선생님의 해석을 참조하면, <향수> 같은 작품에서 천지인(天地人)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 점으로 보면 ‘코리안 모더니즘’이나 ‘자생적 근대문학’으로 불려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전통적인 천지인의 세계관을 서양의 모더니즘이라는 양식에 담아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이런 점들은 오는 8월 학술대회에서 자세히 논의되리라 생각하는데, 이와 같이 그동안 잊혀지고 무시되어 왔던 개벽사상이나 자생적 근대의 흔적들을 드러내는 작업이야말로 개벽학의 기본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31일은 개벽의 날

저는 이번 삼일절에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서양식 신정도 아니고 중국식 구정도 아닌 한국식 삼일절을 실질적인 새해의 첫날로 생각하면 어떨까 하는-. 아마 100주년이라는 특별한 시점이어서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은데, 뭔가 한 해를 여는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00년 전에 만세운동에 동참했던 한국인들도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3월 1일을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삼자는-. 그래서 3월 1일은 한 해를 시작하는 ‘개벽의 날’로 삼기에 충분합니다.

3.1백주년 만북울림

실제로 지난 3월 1일에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만북울림 행사에서 낭독된 <만북으로 열어가는 새로운 100년 선언문>에는 ‘개벽’이라는 말이 아홉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가히 ‘개벽선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삼일운동을 개벽운동의 일환으로 보겠다는 관점과, 개벽정신을 이어서 한국을 개벽하자는 의지가 담겨 있으니까요. 불교계에서도 비슷한 관점이 나왔습니다. 법륜스님은 삼일절을 앞둔 인터뷰에서 삼일운동을 “민(民)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개벽운동의 일환”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동학의 연장선상에서 삼일운동을 보고 계신 거죠.

반면에 20여 년 전인 1999년에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주최로 열린 3.1운동 80주년 행사에서 낭독된 <삼일정신현창선언문>에는 ‘개벽’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벽’에 상응하는 “새 하늘 새 땅”, “신천지(新天地)”, “새 세상 새 문명”, “생명과 영성”이라는 말은 나오고 있습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해월신사법설의 「개벽운수」에서 “新乎天, 新乎地”를 말하고 있는 것과 상통합니다. 아마 다양한 종교단체들의 모임이라서 ‘개벽’이라는 용어를 피해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이 20년간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자각적 근대”라는 표현을 빌리면, 이번 <만북선언문>은 일종의 ‘자각적 개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 ‘개벽’이 자각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무의식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셈입니다. 그래서 삼일만세운동도 개벽운동의 일환으로 보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지난 촛불시민혁명도 이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운동가 스티브 비코(1946~1977)가 ‘흑인자각론’과 ‘흑인의식운동’을 전개했던 것처럼, 지금의 개벽바람은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던 ‘개벽의식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석의 근대

동학‧천도교 연구자인 정혜정 교수님은 천도교의 근대를 ‘번역의 근대’가 아닌 ‘해석의 근대’라고 하였습니다. 서양 근대사상을 동학‧천도교의 틀로 재해석하여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선생님이 언급하신 오상준의 초등교서를 들었습니다. 저는 ‘해석의 근대’라는 표현에 무릎을 쳤습니다. 천도교의 사상사적 의미를 정확하게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오문환 교수님이 주목하신 오상준의 ‘공개인(公個人)’ 개념은 동학적 공인(公人)과 서학적 개인(個人)을 절묘하게 조합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학‧천도교에서는 모두가 전체의 하늘(한울)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인’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을 모시고(侍天主) 있다는 점에서는 독립된 ‘개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일종의 “따로 또 같이”와 같은 인간관입니다. 이 중에서 ‘따로’ 부분을 서양적인 ‘개인’ 개념으로 표현하고, 그 의미를 강화한 것이지요. 그래서 ‘공개인’은 동학의 천인(天人)적 인간관으로 서학의 근대적 인간관을 ‘해석한’ 개벽적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인의 진화사상을 들 수 있습니다. 지난 2월 21일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3.1혁명과 대한민국의 탄생」이란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는데, 이날 발표자이신 한림대 신주백 교수님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1910년) “사회진화론을 극복한 평화론”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탈(脫)진화론적 동양평화론이 양육강식에 입각한 이토 히로부미 식 동양평화관과 충돌하였다고 분석했습니다. 저는 이날 토론자로 참가했는데 대단히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서양의 진화론은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다름 아니었는데, 이러한 세계관에 거부감이 있는 한국인들은 평화사상에 바탕을 둔 ‘한국적 진화론’을 전개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1916년에 원불교를 창시한 박중빈은 “강자·약자 진화상(進化上)의 요법”을 설파하여 강자와 약자가 함께 살 수 있는 상생의 진화론을 전개합니다. 강자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으로 약자를 보호해 주고 진화시켜야 영원한 강자가 될 수 있고,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아 배우고 힘을 길러야 강자로 진화하게 된다는 사상입니다. 마치 맹자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즐기는 것이고(樂天),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畏天)”고 한 것과 유사합니다.

마찬가지로 천도교 이론가인 이돈화도 󰡔신인철학󰡕(1930)에서 서양의 ‘과학주의 진화론’과 대비되는 ‘수운주의 진화론’을 설파하였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약육강식의 원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동학’사상에 의탁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서구 근대사상을 나름대로 해석한 ‘해석의 근대’라고 볼 수 있겠지요.

풍물마당

 

유학의 개벽

이런 개벽파의 ‘해석’ 정신이 요즘에 ‘다시 개벽’으로 귀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이 ‘개벽’의 관점에서 삼일운동이나 량수밍을 이해하고 있고, 인류세나 포스트 휴먼을 내다보는 것도 그런 일환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량수밍이라는 학자의 존재는 제가 중국유학을 부러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조선이나 한국에서는 향촌교육을 하는 유학자는 들어봤어도 향촌운동을 하는 유학자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량수밍은 이론실학자가 아닌 실천실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보면 간척사업과 협동조합으로 시작한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과 비슷합니다. 지적하신 대로 진정한 생명유학, 생태유학의 개척자입니다.

량수밍은 대학원 과정에서 잠깐 배운 적은 있지만 ‘개벽’의 눈으로 다시 보니 완전히 새로운 사상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풍우란이나 모종삼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현대 신유학자입니다. 19세기 말의 량수밍에서 오늘날의 원테쥔에 이르는 계보는, 한국으로 말하면 19세기 말의 최시형에서 20세기의 윤노빈-김지하-장일순으로 이어지는 원주의 생명학파에 비견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유학이 진정으로 개벽되려면, 또는 ‘해석의 근대’와 같이 ‘해석의 유학’으로 거듭나려면,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사이에 ‘공공(公共)’을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신-제가-<공공>-치국-평천하” 이런 식으로요-. ‘공공’은 당연히 시민사회나 공공영역에서의 실천윤리를 가리킵니다. 달리 말하면 가족과 국가 사이에 시민이라는 공공집단을 넣어서 양자를 매개하는 거죠. 제 생각에는 전통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아직 이 영역이 철학적으로 확립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채워 보려고 노력한 것이 천도교나 원불교라고 생각되고요. 천도교의 ‘공개인’ 개념이나 원불교의 ‘공공’ 개념이 그러한 증거입니다. 개화파는 처음부터 수신(修身)에서 시작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태극소녀

실은 지난 3월 1일에 삼일절 행사를 보러 광화문에 갔는데, 대규모 태극기부대의 집회 광경에 놀람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치적 구호도 구호지만, 무엇보다도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가 어찌나 큰지 옆 사람 얘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광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법적으로 보장된 집회를 하는 것은 좋지만 공공장소에서는 타인을 배려하면서 자유를 행사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교토포럼의 공공철학은 실로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사이에서 공공(公共)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최근에 접한 이남곡 선생님의 논어: 삶에서 실천하는 고전의 지혜도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해석한 논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공유학’이나 ‘개벽유학’이라고 할 수 있고요. 이런 식으로 유학이 개벽되지 않으면 오늘날에 뿌리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학자가 향촌으로 뛰어드는 중국은 역시 유학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00년 후의 삼일절

마지막으로 삼일절 200주년을 공공(公共)하며 이번 답신을 마칠까 합니다. 선생님이 이사로 계신 ‘다른 백년’의 문제의식은, 그 이름에서 단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100년 후의 삼일절을 준비하는 데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학이라고 할 수 있고요. 지난주에 ‘다른 백년’의 이래경 이사장님을 만나 뵐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흔히 대학에서 만나는 교수님이나 미디어에서 접하는 경영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일종의 ‘영성적 경영인’이라고나 할까요?

동학의 ‘유무상자(有無相資)’를 이상적인 경제 원리로 생각하고 계셨는데, 동학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도상(道商)’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백년의 연장’이 아닌 ‘백년의 개벽’을 준비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한국사회가 조금씩 개벽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이 들었습니다.

(좌)개벽학당, (우)개벽포럼에의 초대

개벽학은 삼일절 200주년을 준비하는 ‘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라지지만 그다음 세대, 그다음 다음 세대를 위한 ‘공공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공공’의 차원이자 ‘세대 간의 공공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달부터 <개벽학당>과 <개벽포럼>이 시작됩니다. 이것만으로도 2019년은 ‘개벽학 원년의 해’라고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100년이 쌓이면 삼일절 200주년이 되겠지요.

조성환

『한국 근대의 탄생』을 썼고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번역하였다. 지금은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후원하기
 다른백년은 광고나 협찬 없이 오직 후원 회원들의 회비로만 만들어집니다.
후원으로 다른백년과 함께 해 주세요.
 
               
RELATED ARTICLES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