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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현대물리학은 우주를 역동적 상호의존의 생성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존재론이 서로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달리 설명하면 불교는 존재를 시공간 사건들의 연기적 과정이라고 보고 있으며 현대물리학은 존재를 시공간 사건의 인과적 과정으로 보고 있기에 결국 서로 동일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으며 오늘날 이러한 존재론을 사건론 또는 생성론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를 지배해온 서구의 존재론을 존재를 과정이 아닌 고정불변의 동일한 존재로 보는 실체론이라 할 것인데 이는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으로 부터 연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존재는 사유와 일치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한편 사유는 이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인간이 다른 자연보다 우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성을 인간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여 이성을 가진 인간은 비이성, 즉 감정을 가진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세계를 우월한 이성과 열등한 비이성으로 나누어 이성의 비이성에 대한 지배와 피지배를 당연시하는 서구의 이분법적이며 계서적인 피라미드의 질서와 그를 지탱하는 실체론이 서구의 문명을 특징지웠으며 서구의 산업화로 인하여 이러한 존재론이 오늘날 아무런 비판없이 우리에게도 이식되었으나 이러한 계서적인 세계관은 우리 전통적인 유교적 계서주의와 중첩되어 더욱 많은 모순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의 자본주의 또는 생태계의 위기는 2천5백년을 내려온 서구의 이분법적이고 계서적인 실체론의 결과이기에 단지 시스템을 바꾸는 차원을 넘어서서 생명체는 물론 무기물마저 우주의 동등한 일원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등가적으로 존중해주는 생성론으로 존재론을 바꾸지 않는다면 인간중심주의 및 강자독식의 실체론으로 인해 분명히 인류는 조만간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생성론을 존재론으로 받아들이는 현대물리학과 불교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양자역학은 닐스 보어가 제창한 코펜하겐 해석을 정통해석으로 인정하므로 이를 중심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칼럼_181217
현대물리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Niels Bohr)

 

첫째, 양자역학의 이중성, 중첩성에 대하여

이는 존재는 고정불변한 동일한 속성만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양립할 수없는 이중적 속성이 중첩되어 있다고 보는 존재론입니다.

예를 들면 일상적인 판단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의 단일한 속성만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현대물리학은 존재는 단일한 속성이 아니라 서로 모순되어 병립할 수없는 이중적인 속성이 동시에 중첩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모든 존재는 파동성과 입자성이 동시에 중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실체론에 입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의 허구성을 폭로하는데 예를 들면 그가 주장한 모순률이 진리의 형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A는 비A와 동일할 수가 없으며 반드시 A와 비A는 모순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형식논리학인데 위 이중성, 중첩성의 이론에 의하면 존재는 서로 모순되어 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A와 비A가 서로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실재는 서로 모순된 속성을 중첩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 양자역학의 입장입니다.

이로 인해 실재는 하나의 동일한 속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서구의 전통적인 존재론인 실체론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왜 존재는 이중적 속성이 중첩되어 있을까요?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우주가 자기언급self reference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는 반야심경에서 세상을 관하는 자는 반드시 관자재보살일 수 밖에 없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우주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자기를 포함하는 자기언급일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우주의 구성요소들은 서로 무관하게 독립된 실체들이 아니라 서로 내재적으로 생성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기에, 즉 우주를 바라보는 나와 관찰대상으로서의 우주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한 몸이기에 나와 대상은 서로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대상은 가시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그 뿌리는 한 몸이기에 A는 비A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불교적으로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경전이 금강경이라 할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러한 사상을 압축하여 표현하기를 A는 비A이지만 잠정적으로 A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라고 이르고 있는데 이는 양자역학의 이중성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양자는 비록 파동이지만 이를 잠정적으로 입자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라는 명제와 동일하다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자는 평소에는 입자성을 띄지 않고 있다가 단지 의식있는 관찰자가 관찰할 때만 입자성을 띄게 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눈으로는 파동성을 확인할 수가 없기에 양자를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관찰할때만 나타나는 입자성의 이름으로 부르고자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할 것입니다.

이에 따라 불교는 우주는 자타불이이며 색심불이라고까지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파동함수의 붕괴에 대하여

양자는 관찰자가 관찰을 하게 되면 파동(확률파)의 파동함수가 붕괴되면서 입자로 나타나는데 이는 원래 어딘가에 있던 입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을 통해 입자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의식있는 관찰만이 파동함수를 붕괴하여 입자를 만든다고 보는 것으로 이는 본래 존재는 인간의 관찰과는 무관하게 실재한다고 보는 서구의 실재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 위 코펜하겐해석과 아인슈타인은 죽을때까지 논쟁을 벌였으나 아인슈타인은 끝내 존재의 실재성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파동함수붕괴이론은 우주 삼라만상을 인간의 의식있는 관찰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보고있기에 이를 불교에 대입해보면 유식사상의 일체유심조에 해당한다할 것입니다.

하여 부처는 니까야(아함경)에서 4성제의 고를 설명하기를 고가 생기는 이유는 우주 삼라만상은 인간이 유위로 창조한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즉 인간은 자신이 만든 매트릭스(인공의 가상현실의 틀)에 사는 것을 모르고 마치 실상인양 집착하고 살고 있기에 삶은 기쁘던 슬프던 또는 기쁘거나 슬프지 않아도 고라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만든 허상을 실재인양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칼럼_181217(1)
닐스 보어(왼)와 아인슈타인(오)

 

셋째, 상보성, 불확정성원리에 대하여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주의 존재는 이중성을 띄므로 결코 한 가지 기준으로 설명할 수가 없으며 반드시 두 가지 기준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는데 이를 닐스 보어는 상보성원리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상보성원리중에서 우주를 위치와 속도로 표현한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라 할 것입니다.

상보성원리와 불확정성원리는 우주를 상태성(위치)과 경향성(속도)으로 나누어 이중의 기준으로 설명하기때문에 불교의 변계소집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진공은 아무 것도 없다고 보는데 위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진공은 무한 에너지가 요동하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위 불확정성원리에 의하면 무가 유의 위치를 점하면(상태성) 그 즉시 무로 이동하고(경향성),유가 무의 위치를 점하면(위치성) 그 즉시 유로 이동하기때문에(경향성) 이를 불교적으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여 공의 진공은 무한한 색인 에너지로 가득찬 공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유와 무, 생과 사, 번뇌와 열반, 부처와 중생은 서로 다른 실체가 아니라 항상 중첩되어 교차하는 속성에 불과할 뿐이므로 위 이론들은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할 것입니다.

 

넷째, 존재론에 대하여

현대물리학은 존재중심의 존재론이 아니라 사건중심의 존재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정불변의 실체를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 사건들의 인과적 과정(흐름)을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현대물리학자 스몰린은 존재는 무엇이 아니라 단지 빠른 과정과 느린 과정밖에 없다고 설명한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우주를 사건의 과정들이 그물처럼 서로 얽혀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중심의 존재론은 그 사건의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평가하는 등가적인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도출하고 있으며 무기물이던 유기물이던 우주의 생성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하기에 모든 존재의 존재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자유와 평등의 세계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여 부처는 이러한 존재의 존엄성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존재론은 상호인과인 연기법을 자연법칙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언급하였듯이 시간의 개념은 하나의 환상illusion이라고 보고 과거나 미래는 모두 현재 속에 펼쳐져 있다고 보면서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로 유보시키는 삶을 벗어나서 현재에 충실하는 삶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불교의 현상중시 나아가 현재의 평상심을 중시하라는 마조 도일의 가르침과 일치한다할 것입니다.

 

다섯째, 인과론에 대하여

실체론과 근대물리학은 선형인과를 따르므로 항상 후행하는 결과는 선행하는 원인에 종속될 수 밖에 없기에 결정론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 및 오늘날 현대의 복잡계 이론은 비선형인과, 복잡인과, 상호인과를 따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확률론을 지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선행원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과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행원인에 수많은 조건들이 개입하면서 결과는 확률론적으로 결정되기때문에 선행원인인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기에 결정론이나 우연론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밟게 됩니다.

이러한 상호인과, 복잡인과를 가장 잘 보여는 것이 불교의 연기법이라 할 것입니다.

특히 상호인과는 현재의 수행을 통하여 과거의 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현재의 행위가 역으로 과거의 업을 희석시킬 수 있다고 보는 시간을 소급하는 인과율이 과학적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이는 현대물리학자인 존 아치볼트 휠러가 시간을 소급하는 인과율에서 증명한 바가 있습니다).

하여 불교에서는 현재의 수행과 기도를 통하여 과거의 업을 벗어나서 자유인으로 살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하여 설사 중생들의 기복적인 기도가 행하여 진다하더라도 이를 단지무지의 표현으로 평가절하하지 말고 그들의 순수성도 받아들여 주어야할 것입니다).

 

여섯째, 복잡계이론의 창발에 대하여

복잡계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구성요소들의 되새김feedback작용과 자기 조직화self organization과정을 통해 임계치critical point에 이르게 되면 이후 시너지효과로 인해 물리계가 급변하여 카오스로 가거나 또는 새로운 질서를 생성하는 창발emergence효과를 갖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주는 창발의 산물이기 때문에 우주를 이루는 구성요소로 설명하고자 하는 근대과학의 환원주의적 접근방식으로 절대로 알 수가 없기에 전체를 관할 수 밖에 없는 전일주의적 창발의 관점에서 보아야할 것입니다.

나아가 위에서 수행과 기도를 언급했듯이 누구라도 점수의 수행을 행하다보면 언제가 임계점에 이르러 돈오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선불교의 요체라 할 것입니다.

즉 점수가 없이는 돈오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복잡계이론에서 도출된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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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현대불교

 

일곱째, 윤회에 대하여

현대과학은 존재를 사건의 흐름, 즉 사건의 인과적 과정이라고 규정하고 있기에 서구의 실체론적 관점에서 윤회를 언급하다보면 반드시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윤회는 존재의 개념(연기법)인 사건의 인과적 흐름을 생과 사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기에 어떤 실체가 윤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몰린의 명제에서 언급했듯이 윤회는 사건의 인과적 과정에 불과하므로 윤회의 주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굳이 주체를 만들자면 사건이 주체이고 정보가 주체일 수는 있습니다.

결국 윤회는 존재는 사건(정보)의 인과적 과정이라는 연기법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기에 윤회는 인종을 불문하고 인류에게 공통하는 정신적 유산으로서 레비 스트로스가 주장한 인류의 ”야생적 사고’의 또 다른 원형이라 할 것입니다(신약성서에도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환생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여 불교의 아함경에서는 업은 있지만 작자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늘날 불교와 현대물리학은 당위의 규범이 아니라 존재의 법칙에서 존재론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이 아직도 마음의 문제와 우주의 목적인에 대해서는 명쾌히 밝히지 못하고 있기에 우리는 아직도 종교, 특히 불교와 과학의 융합을 통해 서로를 보완하여야 할 것입니다.

 

-종교와 과학의 융합을!

박헌권

수십 년간 시민운동의 경험을 통하여 얻은 성찰을 토대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의 융합을 통하여 21세기의 새로운 존재론과 우주론을 추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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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1. 김승훈 Posted on 2018.12.18 at

    선종의 맥인 조계종은 돈오점수를 부정하고 돈오돈수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꾸준한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기보다 전체적 깨달음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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