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영, 사슴의 영혼을 간직한 채 불꽃으로 살다간 사람

영원한 청년운동의 지도자

권형택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민청련 부의장, 민통련 사무차장, 현 이야기채록사협동조합 이사장
칼럼_181109

서울법대 삼총사 사건

1976년 12월 8일, 철벽 같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철옹성에 균열을 낸 사건이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일어났다. 후일 ‘서울대 12.8 사건’. 또는 ‘서울법대 삼총사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졸업을 앞둔 서울법대 4학년 학생 이범영, 박석운, 백계문 등 세 명이 서울대 관악캠퍼스 5동 앞에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50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시위는 학교에 상주하는 수백명의 사복형사들에 의해 곧 진압되었고, 주동 학생 3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구속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철저한 언론통제 하에 있었던 국내 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아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은 다음날 아침 신문 1면에 이 시위를 보도하고 7면에 구국선언문 내용을 실을 정도로 비중 있게 다루었다. 선언문 내용 중에 한미간 외교마찰로까지 번졌던 ‘박동선 불법로비 사건 진상규명’이 있었던 것도 작용했겠지만 장래가 보장된 미래 엘리뜨 서울법대생이 졸업을 앞두고 유신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건이 이들에게도 범상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사건은 국내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박정희가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고, 일체의 체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탄압체제를 굳히고 나서 거의 1년 7개월 동안 저항다운 저항운동이 없었다.(1975년 5월 22일 시위, 일명 ‘오둘둘사건’이 거의 유일할 정도다.) 신동호의 표현대로 이 사건은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유신의 큰 바위에 거침없이 정으로 내리찍은’ 사건으로 보였다.(신동호, 『70년대 캠퍼스』, 환경재단 도요새, 2007) 또한 이 사건은 철벽 같은 유신독재체제 아래 질식할 것 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가뭄 속의 한줄기 소나기처럼 민주화운동세력을 고무하고, 학생운동의 투쟁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당시 고려대 학생운동권의 주역 중 한사람이었던 설훈(현 국회의원)은 이 사건 소식을 듣고 당시 느낌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충격이었다. 서울법대 졸업을 코앞에 두고 그야말로 출세 길이 보장되어 있는 그들이 모든 것을 접고 한국민주주의를 위해, 진정한 자유를 위해 감옥으로 걸어간 것이다. 어쩌면 긴조9호는 이들에게 이미 박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0년만에 다시 부르는 노래』, 자인, 2005)

 

이 시위 주동자 세 사람은 모두 서울법대 동기생이면서 서울대 학생운동을 이끄는 이념서클의 리더들이었다. 이범영은 농촌법학회, 박석운은 한국사회문제연구회, 백계문은 경제법학회를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유신체제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한두 번의 시위를 성공시킨다고 유신체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섣부른 시위는 얼마 안되는 학생운동 역량이 판쓸이 당하게 할 위험이 있고, 또 언론보도가 제대로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로 확산도 어려우므로 시위투쟁은 신중해야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그나마 능력 있는 서울대에서 투쟁의 물꼬를 터서 현상을 타파하고 투쟁의 횃불을 치켜들어야한다는 필요성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맨 먼저 학내시위를 제안한 것이 이범영이었다.

당시 박정희가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미국 정치인들을 매수하려고 했던 이른바 ‘박동선 사건’이 <워싱턴 포스트>에 대서특필되었다. 이범영은 당시 언론통제로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않고 있는 이 자료를 선배 이신범, 안평수를 통해 입수하고, 이것을 반유신투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1976년 11월 말쯤 이범영은 박석운과 백계문에게 박동선 사건자료를 보여주면서 이 사건을 폭로하고 이 사건 진상 공개와 더불어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제안했댜. 두 사람은 즉시 동의했고, 지체없이 시위준비에 착수하여 불과 10여일 만에 시위가 이루어졌다.

이 시위는 박정희 정권의 약점을 정확히 타격했다. 박동선 사건은 그 해 11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의 인권정책과 맞물려 한미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이 시위는 그러한 박정권의 약점을 잡고 흔들어버린 것이다.

이 3인의 거사는 학생운동권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긴급조치 9호로 철통같이 무장한 유신정권 역시도 언젠가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고, 내부적으로 준비론이니 투쟁론이니 하는 논쟁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장기적으로 민중역량 강화를 위해 노동/농민 현장으로 투신하는 것과 함께 당면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변혁운동 과정에 있어서 동시에 요구되는 것이고 서로 배치되는 것이 전혀 아님을 이들이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4학년이 되면 현장을 준비하기 위해 일선투쟁에서 빠지는 학생운동의 오랜 관행도 무너졌다. 오히려 4학년이 앞장서서 학내시위를 주동하고 감옥에 갔다가 현장으로 가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이 사건 재판은 다음 해 봄부터 문래동에 있는 서울지법 영등포지원에서 열렸다. 이 재판에는 박형규 목사 등 수많은 재야인사들과 각 대학 학생들이 참석하여 법정을 뜨겁게 달궜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3인 주동자들은 재판관들과 치열한 법리 공방을 벌이면서 유신정권의 비리와 죄악상을 낱낱이 폭로함으로써 재판장을 민주화 교육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재판에 참석한 많은 후배 학생들이 이 재판을 계기로 무사 졸업과 편안한 인생 항로를 포기하고 반유신 시위를 주동하고 감옥으로 가는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필자는 여러 후배들이 그런 과정을 밟아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어찌 보면 필자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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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병곤 열사 묘비 제막식에서의 추도사를 낭독하는 이범영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맑은 사람, 이범영

이 사건의 주역이었던 이범영은 이후에도 민주화운동 한 길로 매진하여 18년간 우리 민주화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1994년 8월 12일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83년 김근태 의장을 도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창립을 주도했고, 1984년 민청련 집행국장, 1988년 민청련 의장, 1990년 전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전청대협) 의장, 1992년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 의장을 역임했다. 그의 이력에서 보듯이 그는 우리 민주화운동의 한 축이었던 청년운동을 세우고 대중화하는데 매진했고, 청년운동가로서 삶을 마쳤다.

1992년 한청협이라는 전국적 청년조직을 창립하고 청년운동의 지도자로서 뜻을 펼치려고 하는 바로 그 시점에 담도암이라는 불의의 치명적인 병이 그에게 닥쳤고, 2년여 동안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본인의 투병 의지에도 불구하고 주위 많은 동지들의 애도 속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가 죽고 10년이 지난 2004년, 그를 따르는 청년운동의 후배들이 『10년-청년지도자 고 이범영 10주기 추모문집』이라는 추모문집을 냈는데 여기에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근태 민청련 초대의장은 ‘사슴의 영혼을 간직한 채 불꽃으로 살다간 사람’이라는 추모의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김근태 장관은 이범영은 ‘산사의 새벽 이슬 같은’ ‘맑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가까이에서 그의 인간적 면모를 지켜보았던 김근태 장관의 심중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의 글 중에서 또 한사람 그의 삶과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노동운동가 조명자(김희택 민청련 전 의장 부인)의 헌사도 마음을 울린다.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공양한 사람, 사랑과 눈물도 가슴에 함께 묻고 간 사람, 그 건장한 육신을 암세포가 갉아먹을 만큼 낮과 밤 안 가리고 투쟁에 골몰했던 사람.

 

대학 시절

필자는 이범영이 회장으로 있었던 농촌법학회(농법회) 1년 후배로 대학 입학 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동안, 때로 가까이서 때로는 좀 떨어진 곳에서 늘 서로의 삶을 지켜보며 살아왔다. 그래서 그와는 민주화운동 선후배 관계 이상의 감회가 있다.

이범영 형을 처음 만난 것은 필자가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한 직후인 1974년 3월, 서울대 교양과정부가 있는 공릉동 캠퍼스에서였다. 동숭동 법대캠퍼스에 다니던 그가 선배 한사람과 함께 농법회 신입생 모집을 위해 교양과정부에 왔다. 게시판에 붙어 있는 신입 회원 모집 공고를 보고 면접장소인 학생회관에 찾아가니 그가 있었다. 키가 크고 덩치도 큰데 좀 근엄한 얼굴을 하고 한 1학년 학생을 앞에 놓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조심스러우면서도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범영은 1974년 2학년 후반기부터 농법회 회장이 되어 서클을 이끌었다. 매주 신입 후배들의 공부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법대 서클룸에서 이루어지지는 세미나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때에는 대학원 선배들까지 참석하는 자리였지만 새파란 2학년 후배 이범영은 대선배들과 함께 당당하게 논전을 벌이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

1975년 서울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그 이전에 각 단과대학별로 이루어지던 서울대 학생운동이 전 대학으로 통합 확산하게 되는 계기를 맞았다. 이범영이 이끌던 농법회도 법대 이외에 전 대학에서 회원을 받아들여 역량을 키워나갔고, 1975년 초 학내시위가 활발해지던 시기에는 법대 동기이자 농법회 동기인 오용석, 조일래 등과 함께 학생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여 이끌었다.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되고 혹심한 탄압 속에 재야운동, 학생운동 할 것 없이 모두 숨죽이는 시기가 왔다. 이런 시기가 다음해 1976년 말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에 이범영은 후배들 양성에 주력하는데, 여름/겨울 농촌활동, 서울 근교로 나가 1박 2일로 이루어지는 회원수련회 등에서 이범영은 자상하면서도 때로 엄격한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규율을 위반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후배들에게는 따끔한 질책을 했다.

당시 일본 암파문고에서 발행하는 사회과학 이론서를 읽기 위해 서클 내에 일본어 강좌를 연 것도 이범영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망원동에 있던 그의 집에는 항상 후배들로 북적였다. 이범영의 어머니는 하라는 고시공부는 하지 않고 후배들과의 공부와 토론에 골몰하는 아들이 마뜩지 않았을텐데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라면이며 간식을 마련해 주었다.

1976년 12.8 시위를 주동하고 감옥으로 가는 이범영의 모습은 후배들로서는 파격이었고, 그래서 충격이 더 컸다. 그는 항상 유신독재의 뿌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리고 그 뿌리를 뽑는 변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일선에서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투쟁에 나설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양춘승, 김재현(현 경남대 교수) 등 가까운 후배들에게는 시위 계획을 얘기하고 현장에서 유인물 배포하는 등 협조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시위 후 조사과정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았고, 감옥 가는 일은 온전히 주동자 세 사람 만으로 끝냈다.

 

병역대책위원회 활동

그는 원래 학생시위를 주동할 때 감옥을 살고 나와서 노동 현장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학생시위로 감옥에 가는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일 뿐 저 강고한 억압체제를 분쇄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78년 8월 그가 1년 8개월 여 감옥을 살고 나왔을 때 그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고, 노동현장에 가는 일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병역문제였다. 일반인들은 통상 6개월 이상 감옥을 갔다 오면 징집이 면제된 것이 관례였다. 이른바 ‘정병육성’ 원칙에 의해 병역법 시행령에 규정된 것인데, 정부는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 간 사람들에게는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군대문제는 이범영 본인에게도 당장 닥친 문제이기도 했지만 계속 줄지어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감옥에 가는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병역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을 맡아 일선에서 뛰게 되었다. 군대 가는 문제로 군사정권에 도전하는 것은 레드 콤플렉스가 뿌리 깊게 존재했던 당시로서는 큰 모험으로 여겨졌다. 이 일로 그는 다시 수배 상태에 놓이게 되고 결국 1979년 10.26 직전에 체포되어 두 번째 징역을 살게 된다. 이 때 병역대책위를 함께 했다가 백계문, 천희상, 최인규, 최상일 등이 징역을 살았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1980년 이후에 학생운동으로 징역 간 사람들은 군 소집이 면제되는 혜택을 받게 된다.

어린 시절

이범영이 서울 법대에 간 것은 어머니의 꿈과도 관계가 있다.

이범영은 1954년 12월 28일(음) 강원도 원주 문막에서 아버지 이호봉 선생과 어머니 홍정숙 님의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휴전한 이듬해에 태어난 것이다. 1973년 당시 서울법대에 가는 것은 출세가 보장되는 엘리뜨 코스이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아들이 법대로 보낸 것은 6.25 전쟁을 겪은 한국현대사의 회오리가 아들에게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 때문인지 이범영을 잉태하고 어머니는 천둥 치고 먹구름이 몰려오는 꿈을 자주 꾸었다고 한다.

“우리 세대는 전쟁을 많이 겪었잖아. 난리통에 죽는 사람을 오죽 많이 보았어? 그래서 걔를 법대에 보낸거야. 전쟁이 나도 법관들은 후방에 있지, 전쟁터는 안나가겠다 싶어서.” (『이 강산의 키 큰 나무여』, 나눔기획, 1995.)

그러나 이범영이 법대에 감으로써 박정희 군사독재와의 또 다른 전쟁터로 나가게 될 줄이야!

이범영은 여섯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상경하여 수송초등학교, 서울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법대에 보내겠다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범영은 공부를 곧잘해서 1973년 무난히 서울법대 행정학과에 합격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한 때는 여느 아이들처럼 공부보다는 보이스카우트라든지 하모니카와 요가 등 서클활동에 몰두하여 부모님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마음을 먹으면 꼭 해내는 집중력이 강한 아이였다. 그리고 진지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고3이었던 1972년 10월 이범영의 일기에서 그런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끓는 피!

이것은 젊음의 권리이다.

젊음을 잃고, 장년 노년이 되면

젊은 때의 모든 동기와 이상을 잃고 안일무사에 빠진다.

그렇지 않고 끝까지 신념대로 사는 사람도 많다.

그들이 위대한 사람이다.

죽을 때 무엇 아쉬움 없이 죽어야 한다.

욕심을 채우다 보내면 어찌 살았던 사람이랄 수 있을까?

들에 있는 한낱 잡초도 자기 한 일을 안다고 하지 않는가!

(『고난의 꽃봉오리가 되다 – 서울대학교 농촌법학회 50년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2)

 

구월동 시대

이범영이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은 1983년 9월 민청련 창립 때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쿠테타와 5.18 광주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 이범영은 복학했던 학교에서 제적 당하고, 거의 3년간 반 수배상태에서 생활한다. 이 기간에도 그는 소준섭 등과 함께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자료집과 유인물을 만들어 몰래 배포하는 활동을 한다. 이것은 훗날 민청련에서 제작한 광주 자료집의 초안이 되었다.

82년 무렵부터는 선배 신동수가 마련한 인천 구월동 아파트에서 박우섭, 문국주, 민종덕, 박승옥, 소준섭 등 수배자들과 함께 생활하는데 이 때에도 노동운동에 투신할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인근 아파트에 김근태, 이명준이 살고 있었고, 박계동도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런 인연이 나중에 민청련을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이 때 최열의 소개로 부인 김설이를 만나 결혼도 했다.

이 구월동의 수배자 모임 속에서 공개청년투쟁단체의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논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학생운동권에서 은밀히 회람되었던 「학생운동의 전망」이라는 팸플릿 작성에 참여했던 소준섭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전망」의 논리가 운동권 전반에서 확실하게 득세하면서 구월동의 ‘논의 구조’에서는 자연스럽게 공개적 청년 운동 건설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벽에 기댄 채 큰 눈을 굴리며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라고 공개 청년조직 건설의 필요성을 말했던 범영 형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소준섭, 『늑대별』, 웅진, 1995)

 

이 구월동에서의 논의가 팸플릿 「전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면 민청협 활동을 평가하면서 “70년대 청년 재야운동이 커다란 ‘상징성’을 가졌으며 대중에 대한 공개적 ‘스피커’의 역할을 담당하고 정권에 대하여 대외적 압력을 행사하는” 긍정적 역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불분명한 민중지향적 성격과 잡다한 구성층으로 인한 결속력의 약화, 진정한 대중적 기반이 없는 입만의 운동”이라고 매서운 비판도 가한다. 그래서 새로이 건설되는 청년운동은 진정한 대중적 기반을 갖는 조직운동이 되어야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구월동 사람들은 1983년 초부터는 구체적으로 공개투쟁의 가능성을 감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수배상태였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동태에 민감했는데, 1983년 들어서면서 많은 수배자들의 수배가 해제되었고, 이것은 이들로 하여금 공개투쟁단체의 필요성을 더욱 확신하게 해 주었다. 구월동 수배자 방은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어 해산하게 되었고, 각자 연고를 찾아 떠났다. 그러나 구월동 그룹 사람들은 공개투쟁단체가 필요하다는 강한 확신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무슨 일을 맡을지는 모르지만 그 단체에서 뭔가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민청련 창립과 투쟁

김영삼 전 총재가 1983년 5월 18일 광주항쟁 3주년을 맞이하여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고, 이 소식은 정권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으나 AP통신 등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고, 국내신문에서도 차츰 1단으로 ‘정치현안’ 등의 표현을 쓰면서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김영삼 씨의 단식은 운동권 청년들에게도 즉시 알려졌고, 공개정치투쟁단체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에 활력소가 되었다. 김영삼 씨의 목숨을 건 단식 소식은 청년들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우리도 모여서 뭔가 해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청년들의 마음 속에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 이것을 조직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 때 가장 먼저 발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이범영과 박우섭이었다. 이범영은 서울대 운동권 선후배들과 두루 연계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병역대책위활동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관계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범영은 오랫동안 구월동 수배자들 모임에서 함께 지내면서 기층민중운동과 더불어 선도적 정치투쟁이 시급하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범영은 서울대 후배 권형택(74학번), 이우재(75학번), 연성만(75학번) 등과도 자주 만나 논의했다.

박우섭은 대학시절 연극반과 극단 연우무대 활동 속에서 문화패들과 광범하게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당모임’이라는 이해찬, 황선진, 김도연, 이석원, 박성규 등 서울대 72학번들 모임의 연락책 역할을 했었고, 문익환, 백기완 등 재야원로 들과 장기표, 이신범, 조영래 등 중견 재야인사들과도 광범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장 노동운동권과도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광범하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개운동단체 설립에 관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OB그룹에서는 최민화와 이해찬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마지막에 누가 의장을 맡을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는데, 7월 말경 최민화의 집요한 설득으로 김근태가 의장을 맡을 것을 수락했다. 김근태의 수락으로 선도적 정치투쟁을 담당할 청년단체 건설 논의가 급진전되게 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1983년 9월 30일 돈암동 상지회관에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창립하게 되었다.

이범영은 새로 발족한 민청련에서 처음 1년 반정도는 주로 조직사업을 담당하였다. 창립과정에서부터 서울 각 대학의 단위조직을 연계하는 일에는 그의 광범위한 인간관계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김근태, 장영달, 박계동, 박우섭 등 표면에 나서는 집행부와 함께 그것을 뒷받침하는 각 대학별로 학생운동 출신자들로 이루어진 소모임이 구성되었는데, 이것을 계반이라고 불렀다. 이 계반은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는 비공개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언제 와해될지 모르는 집행부를 뒷받침하여, 회비를 걷고, 선전물도 배포하고 집회에 동원도 하는 일 등을 계반이 수행했다. 집행부가 구속되거나 하여 와해되면 신속히 후속 집행부를 복원하는 일도 계반의 임무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창립 초기에 이범영은 표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이 계반들을 조직하고 계반 간, 집행부와 계반을 연계하는 일에 핵심적인 역할를 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씨를 중심으로 한 야당이 투쟁성을 회복하고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을 광범하게 벌이면서 재야의 반독재운동도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래서 85년 3월 4차 총회를 기점으로 이범영도 집행부에 들어가 집행국장을 맡아 일선에서 대정부투쟁을 벌이게 된다. 김근태 의장은 당시 투쟁의 주력인 학생운동과 재야/야당을 연계하여 투쟁전선을 확대하는 일을 그에게 맡겼다.

 

대탄압 시대, 다시 수배자로

야당과 민주화운동 세력이 연대하여 활발한 투쟁을 전개해나가자 이에 위협을 느낀 전두환정권은 유화기조를 접고 민주 세력에 대한 대탄압으로 국면을 전환한다. 그 일차적 타게트가 학생운동과 재야 정치권의 고리 역할을 하는 민청련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85년 7월부터 김병곤을 시작으로 주요 간부 전체에 대해 검거령을 내려 김근태 의장 등 대부분의 간부들이 구속되거나 수배된다. 이 때 공안당국이 김근태 의장을 살인적인 고문으로 간첩사건을 조작하려 했던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 이 때 가까스로 검거를 피했지만 이범영은 전국에 지명수배가 되어 장기간의 도피생활에 들어간다. 이범영은 도피 중에도 장준영 등과 함께 지하에서 조직을 추스르고 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한 힘겨운 활동을 벌여 나간다. 1986년부터는 구속 간부 중에서 연성수, 권형택, 김종복이 석방되어 공개 집행부를 일부 복원하는 등 민청련 활동이 조금 활기를 띄기 시작하지만 이범영 등 지도부는 여전히 지하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87년 6월항쟁 이후까지 이어진다.

이 때의 수배생활은 비록 남의 집을 전전하는 불안한 생활이었지만 이범영 개인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독서도 많이 했다. 6월항쟁 직후에는 청년운동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보다 대중적인 청년운동을 모색하기 위한 <청년운동 시론>이라는 장편의 글도 썼다.

이따금 아내 김설이와 아장아장 걷는 큰 딸 건혜, 아직 젖먹이 둘째 딸 승민이도 야외에서 몰래 약속하여 만날 수 있었다. 만남 장소로는 양평 용문사를 많이 찾았다. 추모문집에 실린 사진을 보면 벙거지 모자를 쓴 이범영이 승민이를 안고 해맑게 웃으며 앉아 있는 사진이 있다. 그 옆에는 아내 김설이와 건혜가 수줍은듯이 멋적게 서 있다. 1986년 가을 용문사에서 단란한 한 때를 보내는 장면이라고 되어 있다.

 

6월항쟁과 대선시기 활동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상당수 구속자가 석방되는데, 이 시기에 민청련도 김근태 의장을 제외한 간부 대부분이 석방되어 공개 집행부를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범영은 여전히 수배상태였고, 주로 유기홍이 정책실장을 맡아 일하는 강남신사동 비밀 사무실에 출입하면서 대선국면에서 민청련의 입장을 조율하는 일 등을 진행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화운동 진영은 선거전술을 둘러싸고 비판적지지, 후보단일화, 독자후보등 세 가지 입장으로 크게 갈라졌다. 김희택 의장 등 당시 민청련 지도부는 비판적 지지에 가까웠고, 또 이런 입장이 민청련 내에서 다수를 점했는데, 지도부의 브레인 역할을 해야 할 정책실은 이범영을 비롯해 후보단일화가 지배적이었다. 결국 10월 말경 민청련 내부에서 대의원총회를 열어 투표까지 가는 격론 끝에 비판적 지지로 최종 입장을 결정했다.

정책실을 이끌고 있는 이범영은 본인 의견과 달랐지만 조직의 결정에 승복하고 비판적 지지 전술에 입각한 선거정책을 마련하고, 선거국면에서 광주학살 등을 주제로 한 대국민 선전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일에 주력했다. 정책노선을 결정하기까지는 치열하게 논쟁하지만 조직적으로 결정된 정책에 대해서는 깨끗이 승복하고 그 정책이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민청련의 자랑스런 전통이었고, 이런 전통은 바로 김병곤, 이범영 같은 지도간부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정책실에서 함께 활동했던 유기홍(전 국회의원)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비판적 지지론에 반발하여 각 조직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후보단일화 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게도 함께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제안을 물리쳤다.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조직의 다수 의견에 승복하는 자세야말로 조직운동의 가장 기초적인 덕목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태도가 민청련을 분열시키지 않고 발전시킨 힘이 되었고, 이 훌륭한 전통은 이후 전청대협과 한청협에 계승되어 있다.(『이 강산의 키 큰 나무여』 141쪽, 나눔기획, 1995)

 

그에 대한 수배는 1988년 4월 말쯤 느닷없는 사건으로 풀리게 된다. 서대문 영천시장 부근 비밀사무실로 가던 중 길가에서 경찰에게 검문검색을 받고 갑자기 체포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지선 스님과 함세웅 신부님이 나서서 주선하여 이범영은 간단한 조사만 받고 이틀 만에 풀려났고, 수년간에 걸친 수배자 신세도 끝이 났다.

 

대중적 청년운동의 지도자로 나서다

수배가 풀려 집에 돌아온 그는 오랜 소망이던 노동현장에 들어가는 일을 실천에 옮길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후배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1988년 가을 총회에서 80년대 초반 학번들이 이범영을 의장으로 옹립하기 위해 철산동 집에 쳐들어가 농성하며 수락을 종용하였다. 새로운 대중적 청년운동론을 주도하는 민청련 청년운동가들이 이범영을 간판타자로 내세우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범영은 후배들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못해 후배들에게 6개월 시한부각서를 쓰게 하고 의장직을 수락하였다.

그러나 시한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6개월이 끝난 1989년 봄 총회에서 이범영은 박우섭과 함께 다시 공동의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이범영 역시 노동현장의 꿈을 접고 6월항쟁 이후 전국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청년단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에 불철주야 몰두하였다. 그의 원대한 꿈은 1차적으로는 1990년 9월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전청대협)을 창립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드디어 1992년 2월, 전국의 모든 민주 청년들을 한 대오로 묶어 세우는 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이 출범하고 이범영은 초대 의장에 취임한다.

처음에는 후배들에 등 떠밀리다시피 시작한 청년운동 조직사업이 큰 성과를 내자 이범영도 크게 고무되었다. 한청협 출범을 앞두고 이범영은 본가에 들러 어머니에게 “전국의 청년들이 약 5천명 올라오니 어머니가 총회에 참석하셔요. 문익환 목사 사모님도 오시고 시루떡 두 가마를 해서 나눠 먹으니 오셔서 떡 잡수세요. 어른들이 많이 오시니 꼭 오세요.”라며 간곡히 청했다. 자신의 활동에 항상 노심초사하시는 어머니께 자신이 의장으로 취임하는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것이 혹 빌미가 되어 수사관들에게 핍박당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행사장에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성당에 가서 아들의 일이 잘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고는 이범영이 죽고 나서 ‘그 때 가서 박수라도 쳐 줄 것을, 왜 그리 소심했는지…’ 라고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땅을 치고 후회했다.(『10년 – 청년지도자 고 이범영 추모문집』 340쪽, 청년지도자 고 이범영 기념사업회, 2004)

한청협 출범을 앞두고 민청련은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내부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범영이 추진하는 청년대중조직, 즉 문턱이 없는 대중조직은 결과적으로 비현실적이고, 민주주의를 일궈가는 사람이 참여하는 조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해소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이었다. 민청련 초창기 멤버들 중에는 상당수가 해소를 반대하면서 민청련 재건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청년운동의 주도권은 이범영 의장과 그를 따르는 일군의 청년들에게 넘어가 있었고, 결국 예정대로 민청련은 해산하고 곧이어 한청협이 창립되었다.

이범영은 91년 제2차 범민족대회를 주도하면서 다시 수배를 받기 시작했다. 운동에 입문하고 세 번째 맞는 수배였다. 그러나 그는 수배 중에도 전국청년조직 건설 작업을 전국을 돌면서 계속해 나갔다. 한청협 건설을 마무리 짓고 1992년 4월에 그는 다시 구속이 된다. 이번에는 징역을 오래 살지는 않았고, 5달 만인 9월에 출소하였다. 출소하자마자 그는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무서운 기세로 사람들을 만나고 사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이범영은 서서히 예전에 느끼지 못하던 피로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병마가 찾아온 것이다.

 

발병과 죽음

이범영은 93년 3월 경희의료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담도암이었다.

그러나 91년 말부터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주위 동료 후배들은 그의 심신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91년 12월 이범영은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김병곤 1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는데, 이 때 함께 참석했다가 서울까지 동행했던 권형택(필자)은 ‘(김병곤) 영전에 절하는 그 모습이 영 어색하고 안색도 좋지 않고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10년–청년지도자 고 이범영 추모문집』 46쪽, 청년지도자 고 이범영 기념사업회, 2004)

이범영 말년에 통일운동의 동지이자 직계 후배였던 한충목도 92년 서울구치소에서 이범영을 만나고 깜짝 놀란다. “의장님이 4월에 그리고 제가 7월에 구속됐어요.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운동시간에 잠깐 뵀는데, 그 때 우리는 서로를 보고 놀랬죠. 서로 몰라보게 야위었죠. 저야 원래 몸이 불어 있어서 살이 빠지는 게 반가웠는데 의장님은 그렇지 않잖아요. 혈색도 안좋고 바싹 마르셨드라구요. ‘저 양반 뭐가 잘못된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이 강산의 키 큰 나무여』 93쪽, 나눔기획, 1995)

수배상태에서 동가식서가숙하며 전국을 돌며 청년단체들을 묶어 세우는 무리한 강행군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마음의 갈등도 그의 정신력과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2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어느 날 집에 들린 이범영을 보고 어머니는 깜짝 놀란다. 얼굴에 검은 기운이 돌고 눈동자에 노란 황달기운이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급히 세브란스 병원을 예약하고 입원할 것을 종용했으나 이범영은 듣지 않고 봉원사 뒤 단식원에 들어가 단식을 시작했다. 조금 쉬면 나을 것이라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병세를 악화시켰다.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경희의료원에 입원했을 때는 얼굴색이 노랗다 못해 검은 빛마저 돌았다.

93년 6월, 입원한지 3개월만에 이범영은 위 1/3, 췌장 1/3, 담 전체를 떼어 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10일 만에 퇴원한 이범영은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서너달이 지나자 살도 붙고, 산보도 다니고 독서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기공수련도 열심히 하였다.

93년 말 겨울을 원주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청년단체 후배들과도 많이 만나고 담소를 나눴다. 겨울방학이 되어 양수리에서 엄마와 살고 있던 건혜와 승민이 두 딸이 놀러왔다. 이범영은 딸들과 왕과 신하놀이 연극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집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완쾌하여 활동을 다시 시작할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때였다. 94년 정초에는 문익환 목사께 세배도 갔다.

그러나 봄부터 병세가 점차 다시 악화되었다. 장상환 교수 소개로 산청에 요양을 갔다. 조금 병세가 호전되는 듯하여 20여일만에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올라온지 얼마 안돼 1994년 6월 장폐쇄증세가 있어 경희의료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는다. 수술 받은 후부터 병세는 급속히 악화되어 병원 측으로부터 치료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범영은 국립의료원으로 옮겨 마지막으로 치료를 시도했다. 그러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암세포가 폐로까지 전이되었다. 결국 그는 산소호흡기를 입에 문지 20여일 만에 친구 선후배들, 가족들의 간곡한 기원을 외면한 채, 그렇게도 극진히 사랑하는 한반도를 두고 떠났다. 어머니의 통곡을 뒤로 한 채… 1994년 8월 12일이었다.

 

불꽃 같은 삶과 죽음

그는 그보다 조금 앞서 세상을 떠난 김병곤에 대해서 사후에 그를 몹시 흠모하여 <우리의 영원한 청년투사 김병곤 동지> 라는 김병곤 평전을 썼다. 이 글은 1991년 집필하여 『내 청춘 조국에 바쳐-청년 투사 고 김병곤 동지 1주기 추모자료집』에 수록되었는데, 당시 그가 만나는 청년들에게 보내는 ‘김병곤으로부터 배우자’라는 내용의 서한 형식으로 쓴 글이었다. 고인이 쓴 글 중에서도 가장 힘이 넘칠 뿐 아니라 읽는 이의 가슴을 격동시키는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 글이다.

이 글 말미에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는 듯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청년동지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태도이다. 천수를 누리거나 난치병으로 생을 마감하는 죽음은 여기서 논외로 한다. 우리는 투쟁하다가 생명을 빼앗길 수 있다. 그것은 고귀한 희생이며 영예롭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는 투사 김병곤 동지로부터 배워야 한다. 모든 난관과 시련을 끝내고 민족의 봄, 민족의 부활, 자주 민주 통일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는 김병곤이 바로 그가 고등학교 학생 때 꿈꿨던 ‘신념대로 살다가 무엇 아쉬움 없이 죽는’ 사람이라고 보았고, 자신 역시 그렇게 죽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의 뜻대로 그는 민주화운동에 모든 걸 불사르고 불꽃처럼 살다 갔다.

그는 지금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묘지에서 그가 생전에 존경했던 문익환 목사, 김근태, 김병곤과 함께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공동선, 2017년 135호로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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