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시간에는 미국과 중국이 펼쳐왔던 그동안의 세계 전략과 중국 공산당이 ‘학습’에 진심을 다하는 이유 등을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정치국 집단학습’을 탐구해보겠습니다. 특히 집단학습의 뿌리를 샅샅이 훑어보겠습니다.
잠깐! 집체학습? 집단학습? 뭐가 맞는 거지?
한국 학자들의 논문, 서적, 강연 그리고 언론사 보도에서는 ‘집체학습(集体学习)’이라고 직역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집단학습’이 적합한 표현입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중국어에서 集体는 ‘개인(个人)’과 대비되는 집단 혹은 단체를 뜻합니다. 또한 비슷한 뜻을 갖고 있는 集团, 团体 등의 단어와 달리 오직 集体만이 学习의 앞에 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集体를 집체보다는 집단 혹은 단체로 해석하는 게 적합합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집체생활 혹은 집체활동이란 표현은 쓰지 않고, 집단생활 혹은 단체 활동이라고 쓰는 것과 같은 차원입니다. 둘째, 한국어에서 종종 보이는 ‘집체교육’은 교육전용시설에 모여 집중적으로 실시하는 교육을 뜻합니다. 중앙정치국 집단학습은 평소에 회의, 업무, 행사 등을 주로 진행하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집체교육과는 그 정의상 차이가 있습니다. 셋째, 중앙정치국 집단학습은 영어로 Politburo Collective Study Sessions(PCSS)로 불리는데, Collective는 집체가 아닌 집단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이런 사항들을 고려할 때,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자들의 공부모임 ‘集体学习’은 글자 그대로 읽은 집체학습이 아니라, 실제 뜻과 맥락 그리고 어법을 고려한 집단학습 혹은 단체학습이 옳은 표현입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집단학습>으로 명칭합니다.
중앙정치국 집단학습의 뿌리
정치국 집단학습은 1950년 대에 싹을 틔우고 2002년에 공식적으로 제도화됐습니다. 공산당은 사상을 통일하고 조직을 구축하는데 있어 ‘학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학습은 ‘마오쩌둥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여겨질 만큼 중요했습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 전체가 ‘무한한 학교(无期大学)’로 변모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옌안에 근거지를 잡은 뒤 옌안대학, 항일군정대학, 루쉰예술학원 등을 세워 인재를 길렀습니다. 1942년에는 정치국 보다 위상이 높은 총교육위원회(总学习委员会)를 설립하고, 그때까지 여러 갈래로 나눠진 사상을 정리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정풍운동」 캠페인을 통해 간부들의 사상통일과 비전일치를 이뤄냈습니다. 또한 간부들의 단체 학습모임을 주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1953~1954년에 공산당 지도자들은 세계 10여 개 국가들의 헌법을 읽고 집단적으로 연구했습니다. 이는 중국 지도자들이 체계적으로 법률을 공부한 첫 시도였습니다. 1958~1961년에는 간부들이 각 계급별로 뭉쳐 소련의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도록 지시하고, 주요 지도자들도 삼삼오오 뭉쳐서 독서토론그룹을 만들었습니다. 마오쩌둥 자신도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등 주요 지도자들과 함께 ‘낭독회’를 꾸려 소련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등을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학습모임은 보통 3~4시간 동안 수십 페이지 분량의 글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모임 별로 학습결과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마오쩌둥은 여기에 자신의 해석과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정리된 자료들은 각 기관에 배포되며 정책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공산당 지도자들은 단체학습을 통해 경제발전 정책, 외교노선 결정 등 당시 중국이 당면한 문제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학습하고 토론하며 최선의 의사결정을 도모했습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라는 암흑시대를 거치는 동안 ‘교육’과 ‘학습’은 사람을 숙청하는 도구로 활용됐습니다. 즉, 잔혹한 고문과 일방적인 세뇌작업이 ‘학습’ 혹은 ‘교육’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것입니다. 마오쩌둥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조금이라도 어긋난다고 판단되는 간부나 인민은 ‘사상학습반’으로 쫓겨나 고된 ‘학습’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 결과 마오쩌둥 이후의 지도자들은 또 다른 문화대혁명을 방지하기 위한 ‘법치제도의 구축’, ‘법에 따른 통치(Rule of Law) 확립’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또한 대규모 개혁개방 정책을 이끌어 갈 간부들의 전문성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간부들의 역량을 강화하려고 중앙당교의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학습’은 공산당 간부들의 의무적인 행위로 자리잡았습니다. 1980년 공산당 중앙서기처는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을 위해 과학기술지식과 법률지식을 가르치는 강좌를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농업, 에너지, 자원, 인구, 환경, 컴퓨터, 우주기술 등을 주제로 하는 10번의 강의를 기획했고, 그해 7월 24일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첫 강의인 <과학기술 발전의 개황>이 열렸습니다. 1981년 진행된 <현대 과학기술과 농업 현대화> 강의에는 150명 이상의 지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각 강의는 10개 이상의 부서에 소속된 100명 이상의 전문가가 달라붙어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강의자료 작성부터 시범강의까지 적게는 수개월 길게는 1년에 걸친 준비과정을 거쳤습니다.
한편, 젊은 시절에 덩샤오핑의 아내 줘린(卓琳 Zhuō lín, 1916~2009)과 함께 교육받기도 했던 저우위(邹瑜 Zōu yú, 1920~)는 1986년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습니다. 그는 <전국 인민의 법지식 대중화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중국 전역의 각급 간부들과 인민들에게 법률지식과 법의식을 보급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총서기였던 후야오방(胡耀邦 Húyàobāng, 1915~1989)에게 ‘법을 제대로 만들고 통치하려면, 지도자들이 앞장서야 한다. 정치국 지도자들이 먼저 법학 수업을 듣고, 법을 전국에 보급하는 데 힘을 실어달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결과 공산당 중앙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법률 강의가 중난하이의 화이런탕(中南海 怀仁堂) 회의실에서 열리게 됐습니다. 1986년 7월 3일, 중국 인민대학 법학과 교수 순궈화(孙国华 Sūnguóhuá, 1925~2017)는 <법학 기초 이론>을 강연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후야오방 총서기 등 정치국 위원 8명 등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1986년 8월 29일, 중국 정치법률대학원장 장진판(张晋藩 Zhāngjìnfān, 1930~)은 <중국 법률체계의 역사적 경험>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이 수업에는 중앙정치국, 중앙선전부, 국무원, 법원, 검찰, 등 주요 국가기관의 지도자 약 150명이 참석했습니다. 외교부 조약법률국장 왕허우리(王厚立 Wánghòulì, 1930~)는 <외교투쟁과 국제법>을, 중국정치법률대학 부총장 장핑(江平 Jiāngpíng, 1930~)은 <경제건설과 법률시스템 구축>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그리고 1988년 저우위가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법률강의 프로그램도 종료됐습니다. 이렇게 4번의 법률 집단학습이 끝나고, 후야오방은 지난 20년 동안 법률을 대중화하는데 힘쓴 저우위의 노고를 칭송했습니다. 특히 인민 약 7억 명과 공산당 현급 이상 간부 48만 명, 일반 간부 950만 명, 국유기업 종사자 1억 2000만명 등에게 법률을 교육하는 <법지식 대중화 5개년 계획>이 성황리에 진행됐다고 평가했습니다.

1989년 장쩌민은 일체의 통치권력을 얻었습니다. 법치주의 확립, 법률제도 구축에 대한 관심과 그 필요성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장쩌민 주석은 집단지도체제를 안착시키는 동시에 전국적으로 법치주의의 기풍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천안문 사태를 겪으며 세계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고 있던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중국은 법에 의해 통치된다’는 것을 보여줘야했습니다. 장쩌민은 1994년 “법률에 대한 강의를 표준화하고 제도화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 공산당 최고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법률 강좌 프로그램이 다시 꾸려졌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후야오방 시기 진행된 법률강의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1년에 1~2번씩, 총 12번에 걸쳐 법무부가 마련한 법률강좌가 전과 마찬가지로 중난하이의 화이런탕에서 열렸습니다. 1980년대부터 최고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과학/기술지식 강의와 법률지식 강의는 장기적인 시스템으로 안착하진 못했지만, 오늘날 중앙정치국 집단학습의 모체가 됐습니다.
집단학습의 공식제도화
2002년 12월 26일은 마오쩌둥의 109번째 생일이었습니다. 그날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중난하이의 화이런탕에서 제1차 정치국 집단학습을 개최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정치국 집단학습은 당과 국가의 사업을 발전하는데 필수적이다. 당과 인민이 부여한 중책을 잘 맡기 위해서라도 끊임없는 학습이 필요하다” 고 강조하며, 집단학습이 하나의 제도로서 잘 정착되고 오래도록 유지되기를 희망했습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중국 후진타오의 새 지도부는 전문가 및 학자와 정기적으로 협의하는 관행을 개척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중앙정치국 집단학습은 후진타오의 리더십과 관심을 바탕으로 꾸준히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2004년 9월 열린 제16기 4중전회에서 공산당은 <중앙당의 집정능력 건설 강화에 관한 결정>을 통해 공식적인 제도로 규정됐습니다. 후진타오는 집단학습의 성과를 더욱 강화하려고 ‘학습형 정당 건설(建立学习型政党)’이란 깃발을 높이 들고, “지도자급 간부들이 이론과 업무를 중점적으로 학습하고, 공산당 전체의 학습을 이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간 44번의 집단학습이 개최됐습니다. 2007년에 새롭게 꾸려진 제17기 정치국의 첫 집단학습에서는 “학습하지 않고, 학습에 애를 쓰지 않으면 반드시 낙오하게 되며, 우리가 짊어진 중대한 책무를 수행할 수 없다. 우리는 중국 공산당을 학습형 정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12년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넘겨받은 시진핑은 “공부를 잘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도 배움에 의지해 오늘에 이르렀으니 배움에 의지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며 중앙정치국 집단학습이 공산당의 학습기풍을 크게 발전시키고, 국정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처럼 후진타오 시기 공식적인 제도로 안착하게 된 집단학습은 2002년 12월부터 2023년 1월 현재까지 총 162번 개최됐습니다.
집단학습에 영감을 준, ‘학습조직’ 트렌드
국제사회의 각종 움직임들도 집단학습을 싹틔우는데 영감을 줬습니다. 1965년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회의에서는‘평생교육을 위한 제안’이 통과됐습니다. 1968년에 서구 사회의 학자들이 ‘학습형 사회’를 제시하고, 1972년 유네스코 회의에서도 이를 강조했습니다. ‘학습조직’ 트렌드의 정점은 1990년 미국의 피터 센게가 저술한 <제 5경영(The Fifth Discipline)>이었습니다. 이 책은 20세기 경영학의 바이블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학습조직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센게는‘학습하는 조직이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하는지’ 등을 체계적으로 제안하며 학습조직에 대한 이론을 구축했습니다. 이처럼 ‘학습조직’과 관련된 트렌드는 당대 경영인들의 세계관과 조직에 대한 인식 그리고 리더십에 혁명적인 바람을 불러 일으켰는데 공산당 지도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냉전시대가 끝나고 소련이 무너지는 것을 본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방향성을 잡고 새로운 사명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공산당의 통치능력과 그 수준을 계속해서 향상시키고자 ‘학습조직’ 이론을 탐구했습니다. 즉, 공산당이 목표달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습하는 조직이자 온갖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적응형 조직(Adaptive organization)으로 발전해야 장차 펼쳐질 세계질서에 대응하며 국가를 통치할 수 있을 거라고 봤습니다. 실제로 장쩌민 시기 공산당 지도부는 피터 센게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자문을 구했습니다. 2010년에는 중앙당교의 교수 종궈싱(钟国兴 Zhōngguóxìng, 1953~)은 ‘센게의 이론과 개념을 바탕으로 학습형 정당을 구축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제 5경영에서 학습형정당으로 (从第五项修炼到学习型政党)> 라는 대담집을 출판해 공산당과 정부 각급 기관에 배포했습니다. 여기서 센게는 ‘공산당이 학습하는 정당을 잘 구축하고, 학습하는 조직의 원리들을 잘 적용하고 운영해나가면, 세계에 큰 영감을 주는 모델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런 트렌드에 영감을 얻고 센게가 강조한 원칙들을 변형하여 적용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적인 이론들로서 학습혁신과 조직강화를 추구했지만, 실제 공산당의 학습시스템은 자체적인 역사와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즉, 공산당은 오래도록 이어져 온 ‘학습’ 유산과 국가발전 및 정권안정이라는 목표들을 결합해 중국 특색의 학습시스템을 현대적으로 제도화하며, 중국 특색의 학습조직을 구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중앙정치국 집단학습이 있습니다.
집단학습의 준비과정과 실제 진행 모습이 궁금해요!
주제 선정, 강사 선정, 시범강의, 본 강의 순으로 진행됩니다. 정치국 집단학습의 주제와 강사를 선정하고 준비하는 실행하기까지의 과정은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이 책임지고, 중앙판공청은 실무적인 부분을 지원하며 협업합니다. 총서기의 최종 승인에 따라 주제와 강사가 선정되면 사전 작업이 시작됩니다. 강사를 중심으로 한 연구단이 정해진 주제를 연구하고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이 때 여러 그룹이 동시에 같은 주제를 연구하며 경쟁하기도 합니다. 1차 초안이 완성되면 중앙정책연구실과 중앙판공청에서 검토하고 수정할 부분을 도출합니다. 더 이상 수정할 내용이 없을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렇게 주제와 강사를 선정하고 초안을 작성하기까지는 보통 3개월 정도가 걸립니다. 그 뒤에는 최소한 3번의 사전 예행연습 즉 시범강의를 하게 됩니다. 중앙정책연구실, 관계부처 담당자 등이 모두 시범강의를 들으며 강의 내용은 물론이고 강사의 목소리 크기, 어조, 억양, 말빠르기 등까지 세부적으로 하나하나 체크하며 피드백합니다. 마찬가지로 더 고쳐야 할 부분이 없을 때까지 반복합니다. 주제 하나가 집단학습 테이블에 올라가기까지 이렇게 오랜 담금질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원이 투입됩니다. 집단학습을 준비하는 자체가 인재를 양성하고 훈련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정치국 집단학습은 주로 중난하이 화이런탕의 회의실에서 개최되며 공산당 1인자인 총서기가 직접 주재합니다. 정치국원 24명은 필수적으로 참석하며, 해당학습의 주제와 관련된 고위 관료 및 관계자들이 종종 참석합니다. 강사는 당, 정부, 군대, 대학교, 연구기관, 학회 등의 전문가나 실무자 중에서 선발합니다. 이제까지 집단학습의 강사는 주로 45세에서 55세 남성 위주로 선발됐습니다. 학습은 80분 강의, 30분 질의응답 및 토론, 그리고 마지막 10분은 총서기의 발언까지 약 2시간 정도로 진행됩니다. 강연자가 2명 이상일 경우에는 시간을 잘게 나누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집단학습의 뿌리와 준비과정 및 실제 모습 등을 살펴봤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집단학습이 공산당과 정부 정책에 어떻게 전파되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간략히 알아본 뒤, 후진타오 시기부터 정치국이 어떤 주제를 학습했는지, 각 학습은 시대적으로 어떤 시사점을 갖고 있는지, 학습을 진행한 강사는 누구였는지 등을 알아보겠습니다.

태재연구재단 선임연구원. 작가. 유튜버 KoreaSeJin 코리아세진. 경제사회연구원 미래분과 위원. 비르투스 대표.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 홍보분과위원장. 어린 시절부터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군인이신 아버지를 따라 전국 곳곳에서 자연과 함께 성장하고 2011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최전방 야전부대에서 5년 간 복무한 뒤 사회발전에 더욱 기여하고자 2016년 육군 대위로 정든 군문을 떠났다. 건명원을 졸업한 뒤 뱅크샐러드에서 고객감동팀과 조직문화팀을, 클라썸에서 고객성공팀을 만들고 이끌었다. 2022년에는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저서로는 육사 생도생활 4년의 수련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나를 외치다!』, 이토 히로부미와 아베신조의 스승으로서 한반도 정벌이론을 집대성하고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 교육의 신, 산업혁명의 선구자 등으로 여겨지는 요시다 쇼인을 다룬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 한반도 근현대사를 조명하며 한국군의 기원을 밝혀낸 『한국군의 뿌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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