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7
  • 자연스러운 남자
  • 세계경제는 어디로, 그리고 한국은?
  • 마이즈루와 물의 길
  • 미국의 몽유병으로 세계가 무역전쟁에 돌입하고 있다.
  •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집단학습의 뿌리
       
후원하기
다른백년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783344928949316839/ 

 

<중국의 고추 식문화역사 中國食辣史, 2019>라는 대륙책의 번체(繁體)자판 타이완 출간이 최근 작은 소동을 불러 일으켰다. 출판사가 에디터의 ‘모두 바꾸기’ 기능을 이용해 ‘대륙’이란 표현을 ‘중국’이라 치환하고 인쇄했는데,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중국“이라는 문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화권에선 대륙이란 표현이 곧 중국을 의미하는 관행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이런 기호적 의미와 물자의 용도 치환은 중국인들이 처음 고추를 받아들였던 명나라 시절에도 벌어졌던 일이다. 중국 문헌상 최초의 기록에 의하면 17세기 항저우의 부유한 상인들은 빨간색 고추를 자신의 정원에서 이국풍 관상식물로 키우기 시작했다. 고추를 향신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 장강을 거슬러 올라간 대륙의 반대편 서쪽 산간지역 구이저우(貴州)의 묘족이나 토가족같은 가난한 소수민족들이었다. 이 지역은 내륙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없고, 교통이 불편하며, 국가의 전매정책 때문에, 값비싼 이 필수 양념을 많이 사용할 수 없어서, 대체재로 선택한 것이 바로 고추였다. 

[출처 : 펑파이 신문] 고추는 중국에 처음 받아들여졌을 때 관상용 정원 식물이었다

이렇게 생겨난 구이저우의 식습관이 역전파돼, 북쪽으로는 윈난과 쓰촨, 다시 장강을 따라내려가면서, 후난, 후베이 그리고 장시성의 산간지역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즐기게 됐는데 모두 내륙지역이다. 만성적인 소금공급 문제가 있고, 상대적으로 교역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인구는 많은데 토지가 부족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농업생산량이 적어도 바다에 인접한 지역은 소금을 구하기가 쉬웠고,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면 화폐수입을 통해 외부의 소금을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운 음식을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다.   

또다른 소금의 대체제로 목초액이나 신맛을 내는 각종 발효음식 등이 있는데, 이중 소금의 기본 기능인 전해질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은 목초액뿐이지만, 매운맛은 소금처럼 타액의 분비를 늘려서 주식을 많이 먹을 수 있게 돕는다. 귀주음식의 특징인 시고 매운맛을 뜻하는 쑤안라(酸辣)도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위에 언급된 지역들은 대개 쌀을 재배하는 남쪽이지만, 샨시(陝西)성을 통해서 밀과 잡곡이 주식량인 북쪽으로도 매운 맛이 전파됐다. 고추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 남북의 차이는 지리, 기후와 풍토의 영향으로 대단히 큰 편이다. 이러한 차이는 거칠게 말하자면 남북의 자연조건과 인문정신의 차이가 정치문화나 언어에 반영된 모습과도 유사하다. 즉, 북쪽은 고원이나 평원지대가 많고 교통이 편리하여 언어와 정치제도의 통일성이 높은 편이지만 남쪽의 복잡한 지리적 환경은 그 반대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고온 다습한 기후도 영향을 끼친다. 북쪽은 주로 고추가루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이 과정도 표준화하고 단일한 프로세스여서 맛도 동일한데다, 남자들이 주도하며, 공개적이고, 함께 만드는 공공성이 강하다. 남쪽에서는 생강이나 마늘을 더해서 발효시키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고추장을 만든다. 이중에는 두반장처럼 콩발효장에 고추를 첨가한 것도 있어, 한국의 고추장과 유사하다. 발효과정을 제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각 집안마다 레시피와 맛이 조금씩 차이를 갖게 되고, 이 내밀한 과정을 통제하는 것은 여성이다. 북쪽의 통일성과 남쪽의 다양성이 고추매운맛에도 각기 반영돼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대에 들어와 식품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다양성을 유실한 남쪽의 고추장이다.  

샨시성 사람들이 사랑하는 여우포(油泼)면은 기름에 고추가루를 넣어서 면에 끼얹어 먹는 형태이다.

고추는 여러 경로로 중국에 들어왔다. 일본과 조선을 통해서 둥베이 지역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지만, 무역항인 광저우와 닝보 경로가 고추의 확산과 전파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초입에 이야기한 항저우의 사례가 근처의 닝보로부터 유입된 경우이다. 콜럼버스가 스페인 함대를 이끌고 신대륙에서 가져온 고추가, 이웃인 포르투갈 선원들에게 전해져, 대항해 시대에, 자신들의 무역항인 인도의 고어로 들여온 것이 모든 경로의 출발점이다. 이곳을 드나들던 중국의 무역상들은 그래서 꽤 일찍 고추를 접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신들의 식문화로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고추는 오랜기간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다. 고추와 함께 아메리카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구황작물 감자, 고구마, 옥수수가 있다. 수자원이 부족한 지역이나 관개가 불편한 산간지역에서 구황작물을 재배했는데 덕분에 인구가 격증했지만 과도한 농지의 개발로 토지가 쉽게 유실됐다. 이때문에 환경이 악화하고 자연재해가 빈발해서 다시 기아의 원인이 됐다. 한편으로 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농사에 적절한 땅은 모두 쌀과 같은 주곡 생산에 사용되면서 부식생산은 부차적인 일이 됐다 (이와같은 중국의 식량중심 농업생산정책은 배고픔이 해결딘 1984년에 와서야 중단되었다.)  농사기술도 발전했지만, 먹는 입이 더 빨리 늘어 명청시기에 지속적인 체제불안정 요소가 됐다. 하지만 서구의 산업혁명같이 판을 바꿔버리는 혁신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에서 최근에 크게 유행한, 탈출구 없는 경쟁을 의미하는 내권(內卷)이란 말은 원래 이런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어쨌든 “찬은 별로 없는데 밥을 많이 넘기기(下飯)” 위해 곁들인 채소류 반찬은 짠맛, 신맛 그리고 매운맛이 필요했다. 조선의 김치도 아마 그렇게 생겨났을 것이다. 저자는 조선의 고추 사용 기록 문헌으로 산림경제지를 드는데, 여기 김치를 만들 때 고추를 사용했다고 적혀있다.

다랭이 논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관개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서 재배가 가능한 모든 땅은 주곡에 할당됐고, 자투리 땅에 고추 등을 심었다. 사진은 구이저우의 다랭이 논

중국 서민과 농민음식의 전통은 장기보관이 가능한 가공음식과 곡물중심의 주식, 그리고 바로 소비할 수 있는 제철채소의 조합으로 이뤄진다. 즉 각종 염장 절임음식과 장아찌, 발효음식 등이 전자에 해당한다. 흔히 한국사람들의 머리속에 인상 깊게 남아있는 산해진미로 화려하고 기름진 중화요리가 아니라, 우리의 예전 집밥처럼 “밥과 짭짤한 반찬”으로만 이뤄진 가난한 밥상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매운 음식이 선호되는 지역에서도 청두, 창샤, 우한, 시안과 같은 대도시의 부유층은 매운 음식을 먹지 않았고, 향촌에 거주하는 지역향신과 지주들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원래 중국대륙이 원산지인 매운 향신료는 네가지가 있는데, 봉건시대였던 서주(西周)의 역사기록에 존재한다. 이중 중원 한족의 원류 화하(華夏)족이 사용한 것은 부추(韭菜)이다. 그래서 중국의 북부 사람들은 아직도 부추장을 즐겨 먹는다. 생강(生薑), 산초(花椒), 파(蔥)는 당시에는 중원바깥의 변경지역에 사는 만이(蠻夷)의 음식으로 여겨졌다. 고추를 비롯한 다른 향신료들은 나중에 외부로부터 들어 온 것이다. 

중국에 대규모로 외래 농작물이 전해진 시기는 역사적으로 세번이 있다. 첫번째는 전한(前漢)시기 장건의 서역탐험이 계기가 됐고, 두번째는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이 활발하던 성당(盛唐)시기이다. 두번 모두 내륙의 서역교역로를 통했기 때문에 이때 전해진 물자의 중국어 이름에는 오랑캐 호(胡)가 많이 쓰인다. 전자로는 마늘, 호도(胡桃), 참깨, 오이, 포도, 후자로는 시금치, 자스민, 후추(胡椒), 수박, 당근(胡蘿蔔) 등이 있다. 세번째가 바로 신대륙 작물들이 전해진 명말청초이다. 주로 해상무역로를 통해 남쪽으로부터 들어와서 역시 오랑캐인 번(番)이란 글자가 들어간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세계의 교역과 경제 중심이 육로에서 바다로 바뀐 것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들어 온 작물들은 앞서 언급한 것 외에도 중국인들의 식생활과 라이프스타일에 큰변화를 가져왔다. 가지, 토마토(番茄), 호박 등의 작물이 중국 농민들의 여름 밥상을 풍성하게 만들었고, 기름을 짜낼 수 있는 땅콩이나 해바라기가 입맛을 크게 바꿔 놨다. 근대 시기에 들어온 작물들의 이름에는 양배추나 양파와 같이 서방세계를 뜻하는 양(洋)이 많이 사용됐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쓰촨 훠궈나 마라탕으로 대변되는 ‘매운맛 중국’은 지난 30년 개혁개방의 유산이며 도시화, 공업화와 함께 ‘만들어진 전통(invented tradition)’이다. 가난한 농촌 지역의 농민과 청년들이 연안지역의 대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이동했는데, 노동의 허기를 채울 간단한 한끼의 매식이나, 어쩌다 함께 어울리며 향수를 달랠 회식자리의 메뉴가 필요했다. 이때 신선하지 않은 저렴한 재료의 맛을 가리기 위해서는 매운맛 음식이 제격이었다. 고추를 이용한 요리는 조리법도 간단한 편이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이 이민노동자중 매운음식을 즐겨먹는 지역출신의 비율이 10%가량이나 그 미만에 불과한 곳에서도 매운 음식이 보편적으로 유행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중국 대도시의 이주 노동자(농민공) 거주지에는 유독 허름한 쓰촨 식당이 많다. 하지만 이 지역 출신 노동자들만이 쓰촨 요리를 즐겨 먹는 것은 아니다.

매운 음식은 미각이 아닌 통각이다. 그래서 이를 먹는 행위는 번지점프를 하거나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안전한 위험’ 체험을 통해 뇌를 속여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고 쾌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이를 순한 매저키즘(benign masochis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매운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정도의 고통을 참을 수 있을 만큼 신체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선호하게 된다. 또, 함께 매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서로가 고통이라는 비용을 지불하고 상호적 신뢰자본을 쌓아 단결을 도모한다는 보다 깊은 해석도 있다. 유사한 행위로 함께 술을 먹는 관행이 있었는데, 산업화 이전에 술을 만들고 소비하는 것은 귀한 식량을 낭비하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행위였다. 산업화 이후 저렴한 주류 생산이 늘면서 이런 의미는 줄어들지만, 과도한 고급술을 함께 소비하는 행위는 여전히 이런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만들어진 전통은 매운 음식만이 아니다. 중국의 8대요리, 4대요리와 같은 소위 ‘강호의 문파 음식(江湖菜)’은 신해혁명과 공산혁명을 거치면서 해체된 음식의 계급성이 상인들을 중심으로 지난 100여년간 새롭게 구성된 체계이다. 인류학자인 저자는 만일 혁명없는 산업화가 이뤄졌다면, 새로운 식문화의 소비주체가 된 도시중산층이 모방했을 음식은 전혀 맵지 않은 전통의 관료와 궁중음식(官府菜)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실제로 민국시기에 성업하던 후난의 창샤와 쓰촨의 청두 음식점들은 단순화한 관부채를 주요한 메뉴로 삼아 연회음식으로 제공했고, 매운 음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영국 중상류층 식문화가 혼입된 홍콩식문화에 매운 음식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이런 추론을 방증하고, 서구의 달달한 간식과 달리 매운맛이 석권하는 중국의 간식문화도 같은 이유를 댈 수 있다. 매운맛의 유행은 중산층이 예전에는 꺼려하던 서민문화를 수용하거나 그 영역을 침범하는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서구사회에서 감자와 프렌치 프라이가 보편화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원래 이런 관부채는 지역적 특성이 적었고 마일드한 맛을 가지고 있었으며, 형식성과 의례성이 강했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식재료도 사용할 수 없었다. 악어, 개구리, 뱀, 개고기, 취두부 등이 그 예이다. 과거에 급제한 연령의 중장년 남성은 치아 상태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식감도 부드러워야 했다. 그래서 저자의 비유를 따르자면, 특정한 구조를 가진 전통 가옥, 즉 관부채 등의 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그 개별 요소인 벽돌과 잔해를 이용해 완전히 새로운 구조로 지은 집이 현대의 강호채에 해당된다. 

관료와 황족이 먹던 관부채는 ‘커먼센스’를 지켜야하고 의례성이 강해서 보기는 좋지만 그다지 맛은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도 격식을 중시하는 접대와 연회에 많이 사용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로 조리해서 먹는 등 조리법, 재료와 맛도 다양한 강호채가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게 됐다 .

고추와 매운맛의 문화적 상징기호는 초반에는 부정적이었으나, 점차 확산이 되면서 지역별로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식용 이전에는 약재로 사용되기도 했기때문에, 매운 맛의 한방적 효과와 해석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기를 머리로 올린다는 샹훠(上火) 그리고 몸안의 습기를 제거한다는 취실(祛濕)이다. 동절기에 몸을 데우기 위해 샹훠효과가 있는 매운 음식 특히 생강을 먹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샹훠는 부정적으로 해석이 된다. 특히, 광둥과 같이 덥고 습한 남쪽 아열대 지역에서는 늘 화기를 내리고 습을 제거하기 위해 량차(涼茶)와 같은 한방음료등을 상복하기 때문에 매운 음식을 금기시하는 편이다. 광둥의 덥고 습한 기후는 진시황이 군대를 보내 이곳을 정복하기 시작한 이래 늘 중원과 비교해서 부정적으로 해석돼 왔다. 처음엔 북쪽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기후와 풍토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곳을 고향으로 삼은 후대 광둥인들에게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남만(南蠻)의 자기 비하와 중원의 문화적 우월감이 고착화한 것이다.

홍콩, 동남아시아, 광둥지역에서 쉽게 마주칠 수있는 광둥식 량차는 다양한 효능과 종류를 가지고 있지만 샹훠와 취실이 가장 중요하다.

한편 쓰촨과 같이 겨울에도 안개가 많이 끼고 습한 지역에선 몸의 습기를 내보내기 위해 매운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광둥지역에 거주하는 쓰촨 출신의 이주민은 매운 음식을 선호하는 식습관을 유지하면서 습기를 내보내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같은 목적 때문에 량차를 선호하는 광둥사람들은 이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설명들이 과학적 논리가 아니라 문화적 상징과 기존의 생활습관을 합리화하기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추의 또다른 문화적 기호는 전복과 혁명, 방탕과 부정적인 기운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벽사(避邪)의 기능이다. 특히 계급사회를 타파한 혁명이 음식의 계급문화를 해체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와 달리 매운 맛에도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성격이나 출신지에 근거해서 여성들에게 흔히 쓰이는 라메이즈(辣妹子)라는 호칭은 과단성있고 상쾌하고 명랑한 성격, 풍류, 그리고 아름다운 몸매를 가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출처 : 펑파이신문] 고추의 문화적 상징은 현대에 들어와 긍정적인 요소를 더 많이 갖게 됐다. 이중에는 성적인 은유도 존재하는데 이는 서구문화의 영향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추의 문화적 상징의 전파력은 지역의 역량과도 관계가 있다. 매운 고추음식을 즐기는 지역중, 유독, 쓰촨과 후난지역의 음식이 상징성을 갖게 된 것은, 본래 이 지역들의 문화발전 정도가 높았기 때문이고, 이들 지역 출신들이 대도시로 많이 이동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과 마오저뚱 같은 유명인들이 각각 이 지역 출신이어서 더욱 상징성을 갖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윈난이나 귀저우의 매운 맛, 혹은 장시의 그것은 잘 부각되지 않는 편이다.      

고추가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데 400년이나 걸렸지만, 지금은 절반 가까운 중국인이 즐기는 다양한 매운 요리와 과거와 달리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화기호조차 출현하게 됐다. 80허우인 저자 차오위(曹雨) 교수는 이러한 외래문물의 수용과 변용의 양상을 중국문화의 보수성과 개방성이라는 모순적 이원성으로 해석한다. 중화문명이 단절없이 안정되게 발전해온 원동력을 여기에서 찾는다. 그러니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인류의 보편가치들이 대륙에서 나름으로 꽃피는 것을 볼 때까지는 인내심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차오위는 최근 두번째 저작 <한번 씹어 이천년 一嚼兩千年>을 출간했는데 이번엔 “씹는 담배”로 알려진 중독성 열대식물 빈랑(檳榔)의 역사와 실태를 소개한다.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지역, 타이완 사람들에게 사랑받지만 구강암 유발 효과 때문에 중국내에선 작년부터 광고가 금지됐다. 지금은 주로 장거리 운송을 하는 화물트럭 운전기사들이 졸음을 쫓으려고 애용한다. 원래 이 식물을 씹기 시작한 것은 말레이지아 원주민 등의 오스트로네시안 계통 사람들인데, 이들은 타이완 원주민의 선조이기도 하고, 화하인들이 남하하기 전인 선사시대에 중국 남부지역에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곳에 살던 백월(百越)족 중 일부도 이들의 조상이었을 것이다. 남쪽으로 내려온 화하인들은 이 식물을 약으로 애용했는데,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들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남쪽지역의 물과 토양, 공기가 원래부터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방개념에서 나쁜 공기의 기운을 장치(瘴氣)라고 표현하는데, 빈랑을 씹으면 이를 피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미생물과 세균이 유발하는 배탈이나 각종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을 문화적 상상속에서 이렇게 형상화한 것이다. 

빈랑은 우리에게는 그다치 익숙치 않은 식물이지만, 이를 통해서 중국 남부지역과 동남아시아지역의 트랜스내셔널한 인종, 언어의 관계를 역사적, 인류학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있는 지점이다. 아버지는 광둥사람이고, 어머니는 후난출신으로 광저우 본토박이인 차오위는 남방의 다양한 풍토적 특성들이 매우 오래된 중원중심의 문화적 상상속에서 야만의 부정적이미지로 해석돼 왔음을 빈랑과 고추의 수용을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한편으로 커피, 차, 담배 등과 달리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빈랑은 왜 세계적인 기호품이 될수 없었는지도 설명한다. 그것은 오로지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서 발견한 이 식물을 당시에는 간택하지 않았다는 우연한 이유때문이다.   

차오위의 두번째 저작은 빈랑의 이천년 역사를 다루고 있다.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후원하기
 다른백년은 광고나 협찬 없이 오직 후원 회원들의 회비로만 만들어집니다.
후원으로 다른백년과 함께 해 주세요.
 
               
RELATED ARTICLES

1 COMMENTS

  1. 중뽕척결 Posted on 2022.11.02 at

    중공 좋아하는 중뽕 아저씨들 고추는 잘 작동하나요, 중공처럼 망가졌나요?

    Reply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