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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술과 디자인을 보는 관점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역사학자 E.H.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어. 역사는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를 서로 소통시키는 역할을 하지. 역사적 소통을 위해선 먼저 역사가의 역할이 필요해.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관점을 갖고 있어야 해. 역사가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과거의 사실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니까. 여기서 관점이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맥락적 해석이야. 물론 역사가의 관점은 개인의 느낌이나 취향을 넘어 객관성을 인정 받아야 해. E.H.카도 역사가가 독자에게 인정받는 것은 관점과 해석에 있다고 강조하지.

역사는 관점이 중요해. 역사가가 독자와 소통하는 것은 정보를 해석하고 연결하는 관점이야. 아무리 많은 자료를 갖고 있다고 해고 자료를 꿰는 관점이 없으면 역사라 말하기 어렵지. 그래서 역사를 읽을 때는 반드시 그 역사를 쓴 사람의 관점을 알아야 해. 역사가가 어떤 시대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살피면 그 역사의 관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19세기 미술 역사의 학문적 기틀을 세운 사람은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 1858~1905)이야. 리글은 미술이란 작가와 관람자의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했어.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관점만큼 관람자의 관점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지. 리글은 작가와 독자의 관점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미술 양식이 출현한다고 생각했어. 혁신을 이룬 미술가들은 항상 독자의 일반적 기대를 뛰어넘었거든. 그래서 리글이 주목한 분야가 심리학이야. 20세기 서양미술사로 유명한 곰브리치(Ernst Hans Josef Gombrich, 1909~2001)의 관점도 ‘심리’야. 미술가의 심리가 작품 표현에 반영되고, 관람자의 심리가 작품 해석에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지.

기억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 에릭 캔델(Eric R. Kandel, 1929~)은 『통찰의 시대(The Age of Insight)』에서 리글이 ‘관람자의 참여’를 주장했다면 곰브리치는 ‘관람자의 몫’을 찾았다고 말해. 리글과 곰브리치 모두 개인의 심리를 미술사에 적용했지. 캔델이 말하는 심리는 감각에 의해 촉발되는 지각(Gestalt, 형태) 심리야. 그림 요소들의 형태와 배열에 대한 심리지. 시대마다 사물의 형태를 보는 공통의 지각이 있을 것이고, 이 공통지각이 그림의 양식에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했지. 공통지각이 변하면 그림의 양식도 변하겠지. 그래서 중세 미술과 르네상스 미술의 양식이 달라지는 거야.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The Story of Art)』도 이런 관점을 기반으로 쓰여졌어. 미술작품을 단순히 시대순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지각 심리 관점에서 시대와 작품을 분류한 것이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1950년에 출판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어. 역사를 구성하는 지각 심리라는 관점이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인기를 누리고 있지.

사실 내가 가장 좋은 미술사는 미술사학자 양정무의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시리즈야. 나도 한때 미술사 책을 써볼까 생각했어. 나름 역사책을 꽤 읽었거든. 『역사는 디자인된다』에서 제시한 역사 흐름 패턴을 미술사에 적용해 볼까 했지. 이런 구상을 할 때 우연히 양정무의 미술사를 알게 되면서 바로 좌절했어. 너무 좋았거든. 이 책을 읽으며 도무지 나는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해 바로 접었지.

양정무의 관점은 역사적 맥락이야. 역사적 흐름과 시대적 배경, 기술 발전 등을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통해 독자들이 미술작품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지. 저자의 역사 지식이 너무 풍부해서 이 책을 읽으면 미술사와 더불어 시대 흐름이 동시에 이해되지. 고수는 이것저것 말하지 않아.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주지. 양정무의 미술사가 바로 그런 책이야. 게다가 읽기 쉬운 질의응답 방식으로 쓰여져서 처음 미술사를 접하는 독자들도 충분히 배려하고 있지.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이 책은 반드시 소장해야 한다고 강요해. 책을 한권 사려면 내 책이 아니라 양정무의 미술사를 사라고 강조하지. 사실 한 권이 아니라 6권이지만.

나는 디자인 역사에도 관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현재 디자인 역사책은 대부분 유명했던 작가 혹은 유행하던 양식이 시간순으로 나열되고 있어. 작가 혹은 양식과 관련된 그때그때의 사건들을 소환해 디자인의 배경으로 삼을 뿐이지. 역사적 관점이 있다기보다 그냥 관련된 사건을 모아서 나열하고 있다는 느낌이야. 역사 구성에 앞서 정보를 모으는 수집(아카이빙) 단계에 그치고 있지.

현재 많은 디자인사가 전체를 관통하는 관점과 해석이 빈약해. 디자인 작품과 사건들도 공허하게 느껴지지. 디자인이 어떻게 등장했고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사람과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또 디자인 현상으로 그려지는 미래 비전이 무엇인지 등 디자인의 역사적인 역할과 책임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그래서 그런지 시중에 나와 있는 디자인 역사책들의 목차를 보면 흐름이 거의 비슷해.

본래 디자인은 20세기 초 현대 미술의 한 갈래로 시작되었어. 미술 등 예술의 목적은 소통이야. 문학이나 음악처럼 미술과 디자인도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활동이지. 단지 다루는 매체가 문자나 음표가 아니라 시각적 이미지라는 점만 다를 뿐이지.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 역사의 관점은 ‘소통’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야. 리글과 곰브리치의 관점이 심리에 있다면, 윤여경의 디자인 역사 관점은 소통인 셈이지. 사실 심리도 일종의 소통이야. 작품을 중심에 두고 나와 너의 마음이 통하는 것이니까. 이런 점에서 내 관점은 리글과 곰브리치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어. 다만 지각 심리에 ‘감각’과 ‘생각’ 그리고 언어적 맥락을 추가했을 뿐이야. 그동안 크게 도약한 신경과학과 언어학을 업데이트했다고 할까.

그래서 디자인 역사에 대한 내 관점을 말하기에 앞서 신경과 언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 사람의 신경과 언어는 감정을 구성하고 생각을 소통하는 과정 그 자체야. 움직이는 동물은 모두 나름의 신경과 언어체계가 있지만 사람은 독특하고 정교한 언어망을 갖추고 있어. 사람은 감각 신경계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생각 신경계를 통해 정보를 이해해. 언어는 생각 신경계 정보를 사회적 소통으로 이어주지. 즉 개인의 신경망들이 언어를 매개로 서로 연결되어 사회적 신경망을 형성하지. 사람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이유는 ‘언어’란 생각이야. 사람은 수만년 전에 이미 신체 진화가 멈추었어. 곤충이나 다른 동물처럼 변화무쌍한 자연에 적응하는 강력한 신체 능력을 갖추지 못했지. 그럼에도 사람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아 번식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회적 언어망 덕분이 아닐까 싶어.

 

2) 소통하는 사람

사람이 세상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안’과 ‘밖’의 관계야. 그 이유는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지. 밖에 있는 무언가를 내 몸 안에 넣으려면 그 대상이 음식으로 괜찮은지 살펴야 해. 그러려면 사과나 바나나 등 껍질이 있는 과일처럼 ‘겉’으로 보이는 대상 ‘속’에 내 몸에 유익한 무언가가 있는지 판단 할 수 있어야지. 반대로 독버섯처럼 겉으로 볼 때 화려하고 맛있어 보여도 먹으면 죽을 수 있는 것도 있으니 늘 조심해야지. 그래서 안과 밖의 관계는 겉과 속에 대한 판단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도 이 기준을 충실히 따라왔어. 먹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 사건의 가치를 살필 때 겉으로 보이는 형태(형식)와 속 안의 의미(내용)를 구분하고 둘의 관계를 판단했지. 나는 사람에게 겉과 속(혹은 안과 밖)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이원론(二元論)과 같은 인류의 오랜 철학들도 이 구분에 근거한다는 생각이야. 동양의 음양론에서 양(陽)은 겉이고 음(陰)은 속이 아닐까 싶어. 플라톤은 동굴의 은유로 겉(그림자)과 속(이데아)을 구분했고, 기독교 신학도 사람(겉) 안에 신의 뜻(속)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지. 사실 데카르트의 육체와 정신 구분도 겉과 속의 도식을 충실히 따른 거야. 영국 사상가 존 로크도 1성질과 2성질로 겉과 속을 구분했고, 칸트도 사물의 겉은 알 수 있지만 속(물자체)은 알 수 없다고 말했지. 서양 철학은 늘 실재(겉)와 관념(속)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과학 분야도 현상과 이론이 겉과 속으로 구분되어 있어. 사람의 신경도 감각과 생각으로 겉과 속의 역할을 구분하고, 언어학 또한 형태론과 의미론으로 겉과 속을 구분하지. 이렇듯 인류의 사상들과 학문의 기본 개념이 겉과 속(안과 밖)을 구분하고 있어. 즉 이원론은 사람의 어쩔 수 없는 관점인 셈이지. 결국 먹고 싸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위에 나열한 다양한 이원론적 관점 중에서 나는 마지막에 언급한 신경과 언어가 소통의 근본적 바탕이라고 생각해. 안과 밖으로 구분하면 신경은 사람 내부를 연결하는 소통망이고, 언어는 사람이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소통망에 해당되지. 두 분야는 과학기술이 빈약했던 과거엔 잘 다루지 못했어. 우리 시대에 이르러 좀 더 면밀히 살펴볼 수 있게 되었지. 아무튼 사람의 소통을 이해하려면 신경과 언어를 이해해야 해. 둘 중에서 굳이 순서를 정한다면 먼저 사람의 신경과 언어를 요소결합체로서 분해해 보고, 다시 속성통합체 입장에서 신경망과 언어망의 연결을 살펴봐야지. 이 과정을 거치면 조금이나마 ‘소통하는 사람’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거야.

 

3) 한국사람의 소통

한국말의 몸과 마음의 구분도 겉과 속 구분이야. 그런데 한국말에는 특이한 말이 하나 더 있어. 바로 ‘머리’야. 한국말은 사람을 몸(겉)과 마음(속) 그리고 머리로 구분하고, 머리가 몸과 마음을 매개한다고 생각해.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와 “한국사람은 머리를 써야해.” 한국사람은 머리를 쓰지 않으면 몸이나 마음이 고생한다고 생각해. 즉 머리가 없으면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놀아 제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지. 한국말에서 머리는 신경인 동시에 언어야. 신경망과 언어망을 연결한다고 볼 수 있지. 그래서 한국사람의 소통을 이해하려면 ‘머리’라는 말의 바탕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

한국말 언어학자 최봉영의 풀이를 바탕으로 몸과 마음, 머리의 의미를 살펴보면, 먼저 몸은 ‘모옴’으로 ‘모인다’는 의미야. 사람의 몸은 팔과 다리, 오장육부(五臟六腑) 등 몸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모인 것이면서 동시에 밖에 있는 정보들이 모이는 곳이지. 마음의 옛말은 ‘마삼’으로 ‘마’와 ‘삼’의 합성어야. ‘마삼’은 ‘마사다’와 바탕을 같이하는 말로 어떤 것을 잘게 부수어 낱낱의 알갱이로 만드는 것을 말해. ‘마’는 사람이 가장 가볍게 발음할 수 있는 소리야. 그래서 어린 아기는 첫소리로 ‘맘마’라는 소리를 내지. 몸 밖에 있는 무언가를 내 안으로 넣어주길 바라는 느낌이랄까. ‘엄마’ ‘마미’라는 말은 나의 생존과 깊은 관계가 있어. ‘삼’은 셈을 하는 과정인데, 셈은 분해 조립의 논리적 분류과정이기에 ‘마음=마+삼’은 밖에 있는 정보가 내 안으로 들어와 분해되고 재구성되는 상태를 의미하지. 마지막으로 머리의 옛말은 ‘멀리’야. 실제로 사람의 머리에는 눈과 귀 등 멀리 있는 것을 감각 하는 기관들이 있어. 멀리 본다는 것은 미래를 예측한다는 의미야. 사람은 움직이는 동물이기에 미래를 예측해야 다음 행동을 취할 수 있거든. 그래서 한국말에서 조직을 이끄는 리더를 ‘우두머리’라고 말하지.

한국말에서 ‘머리’는 ‘말’과도 관계가 있어. ‘말’은 머리에서 나오니까. 한국말에서 ‘을/를’은 어떤 대상을 지칭할 때 쓰이는데 ‘마+ㄹ+이’은 밖의 대상이 내 안에 들어왔다는 의미지. 한국말에서 ‘말’은 여러 맥락에서 쓰여. ‘~하지 말아라’처럼 하던 일을 그만두게 하는 의미를 갖고 있어. ‘그만두다’는 어떤 대상을 ‘금 안에 두어’ 의미를 한정 짓는다는 뜻이지. 또 ‘말’은 ‘~하고 말았다’처럼 어떤 일을 끝낸다는 의미도 있지. 이 또한 어떤 행위를 한정 짓는 느낌을 주지. 이처럼 ‘말’은 경험하는 대상과 현상을 특정 소리에 가두는 행위라고 볼 수 있어. 이걸 언어적 개념 만들기라고 해.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이유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야. ‘머리=멀리’라는 말처럼 멀리 내다 보기 위해서지. 영화 미나리의 대사에서 ‘머리를 써라(생각해라)’는 말은 ‘언어적 개념으로 멀리 내다보라’는 의미야. 즉 생각이란 말로서 개념을 만들어 미래를 예측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데카르트는 사람을 육체(body)와 정신(mind)으로 구분했어. 영어 ‘mind’에는 ‘이성=생각하기’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그런데 한국말은 ‘머리’라는 말이 있어서 ‘정신’이 마음과 머리, 둘로 세분화 되지. 마음은 감정(feeling)이고, 머리는 이성(thinking)에 해당되서 감정은 ‘마음 느끼기’, 이성은 ‘머리로 생각하기’라고 볼 수 있지. 마음과 머리는 모두 내 몸속에서 구성되는 개념적 신경활동이야. 마음은 가까운 미래를, 머리는 먼 미래를 예측하지. 그래서 마음이 앞서면 가까운 미래를 위해 행동하고, 머리가 앞서면 멀리 내다보고 행동하지.

마음이 앞서는 사람은 느낌에 충실하고, 머리가 앞서는 사람은 자신의 느낌을 억제해. 마음이 뜨겁거나 머리가 냉정해지는 이유는 미래 예측에 대한 ‘가깝고 멀고’의 의도 차이가 아닐까 싶어. 근대인들은 멀리 예측하는 것을 선호하기에 마음보다 머리를 앞세우는 경향이 있어. 머리로 마음을 통제하라고 가르치지. 하지만 나는 마음이냐 머리냐의 선택은 소통을 둘러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해. 슬퍼해야 할 때는 슬퍼하고, 냉정해야 할 때는 냉정해야지. 마음과 머리(혹은 감정과 이성)의 선택은 둘 중 어떤 것이 ‘우선이냐’가 아니라 맥락에 따라 어떤 것이 ‘적합하냐’가 중요해.

 

4) 신경망 ; 감각지각생각욕망

사람 몸의 연결망을 살펴보자. 사람의 신경은 몸의 안과 밖 정보를 소통하는 시스템이기에 우선 사람 몸의 안쪽과 바깥쪽을 정확히 구분해야 해. 사람 몸의 바깥은 두 곳이야. 몸 안에도 바깥이 있거든. 입에서 기관지, 위장, 대장 그리고 항문은 몸의 바깥과 연결되어 있어. 입과 항문이 우리 몸 밖의 바깥쪽과 몸 안의 바깥쪽의 연결을 통제하지. 바깥에 있은 음식들은 입을 통과해 영양분을 몸 안쪽으로 흡수시키고 나머지는 항문을 통해 대변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위장기관들은 비록 몸 안에 있지만 사실상 몸 바깥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우리 몸은 가운데가 뚫린 도너츠 구조랑 비슷해. 이런 모양을 수학에선 토러스(torus) 구조라고 말해.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하는 경계에는 신경세포들이 있어. 그래서 우리 몸의 신경망은 크게 네 가지 신경계로 구분되어 있어. 몸 바깥쪽의 정보와 소통하는 말초신경계, 몸 안의 바깥쪽인 위장기관에서 장 속의 미생물들과 소통하는 장신경계가 구분되어 있지. 그리고 두 신경계에서 온 정보를 통합하고 통제하는 중추신경계가 있어. 말초신경계와 장신경계에서 온 감각 정보들은 자율신경계(척수와 소뇌)를 통과해 중추신경계(대뇌)로 보내지게 되지.

신경계는 신경세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세포의 모양은 나무랑 비슷하게 생겼어. 하나의 신경세포에는 수천개의 가지돌기와 단 한 개의 축삭줄기 그리고 수천 개의 신경세포와 연결되는 축삭종말 시냅스가 있어. 하나의 줄기(축삭줄기) 양쪽에 가지(수상돌기)와 뿌리(축삭종말)가 달려 있지. 뿌리는 다른 신경세포의 가지와 연결되는데 그 접합 부분을 ‘시냅스(Synapse)’라고 말해. 참고로 ‘syn’은 그리스어로 함께(with)를 의미해. 시냅스는 신경세포들이 서로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지. 신경세포가 연결되는 시냅스는 살짝 떨어져 있어서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정보를 주고 받아. 우리 뇌는 약 860억개의 신경세포들이 연결되어 있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마무시한 연결망이야.

그럼 신경계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모든 생명은 박테리아에서 진화해 왔어. 원핵생물인 박테리아는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았어. 음식물이 천지에 널려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구 기후가 변화하면서 미토콘드리아 등 산소 호흡이 불가능한 박테리아들의 생존이 어려워지자 서로 연합하기 시작했어. 박테리아의 연합으로 진핵세포가 등장했고 다시 진핵세포들이 연합해 다세포 동물이 형성되었지. 이때부터 세포들 간의 정보를 소통시키는 신경세포가 발달하기 시작했어. 이 신경세포들의 조직이 바로 신경계야.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 1944~)는 장신경계를 원시신경계라고 말해. 아마 최초의 신경계는 먹을 것을 처리하는 단순한 장 기관에서 발달하지 않았을까 싶어. 점차 장 기관이 발달해 현재 장신경계에 있는 신경세포들은 장 내부의 미생물과 소통하며 음식물의 영양소를 통제하지.

약 7억년 전 움직이는 생명체인 신경계 동물이 출현했어. 동물은 음식을 찾기 위해 주변 환경을 탐색해야 하지. 동물이 움직이려면 몸 바깥의 정보가 필요해. 최소한 음식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움직일 수 있으니까. 가끔은 위험한 장애물이나 천적을 피해야만 하고. 그래서 몸 바깥의 정보를 감각하고 운동을 통제하는 말초신경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 같아. 그리고 장신경계과 말초신경계를 연결하고 조율하는 중추신경계가 생겼을 거야. 약 6억년 전 초기 중추신경계는 모든 것이 자율적으로 통제되는 자율신경계였어. 다시 1억년이 지나 척수가 생기고 신경계 연결이 고도화되면서 자율과 자유가 공존하는 고도화된 중추신경계로 발달하지 않았을까 싶어.

장신경계와 말초신경계가 몸의 감각 정보를 담당하고, 중추신경계는 감각 정보를 통합한 지각과 생각을 담당해. 중추신경계의 핵심 부서는 머리에 들어있는 뇌야. 앞서 말했듯이 ‘머리’는 ‘멀리’야. 동물의 머리에는 멀리 보는 감각기관과 지각+생각 시스템이 함께 있지. 몸과 머리의 감각들이 뇌의 뒤쪽에 모여서 지각을 형성하고, 이 지각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을 하지.

신경계 정보 흐름에서 ‘지각(perception)’이란 용어는 아주 중요해. 나는 근현대가 과거와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지각의 발견이 아닐까 싶어. 다양한 감각 정보들은 대개 뇌의 뒤쪽(후두엽)에 모여. 여기서 감각 정보들이 지각 정보로 통합되고, 지각 정보는 다시 뇌의 옆(측두엽)과 앞쪽(전두엽)으로 전달되. 여기서 생각이 일어나고 정리되는 거야. 정리된 생각 정보는 다시 뇌의 위쪽(두정엽)과 안쪽(뇌간)을 통해 우리 몸이 어떻게 대응할지 명령해. 중추신경계의 명령은 대체로 호르몬으로 몸 전체에 전달되지. 정보를 받은 장신경계와 말초신경계는 명령대로 감각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모아. 이 정보는 다시 중추신경계로 전달되지. 이렇게 우리의 감각-지각-생각의 신경망이 순환되고 있어. 참고로 소뇌는 자율신경계를 담당해. 자율신경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데 이 과정은 아주 중요해서 작은 소뇌 안에 신경세포의 절반이 들어있지.

신경계의 복잡한 과정은 ‘감각-지각-생각의 순환‘이라고 요약 할 수 있어. 여기에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욕망’ 개념을 하나 더 추가 했지.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이드(id)와 에고(ego), 슈퍼에고(superego)의 삼위일체로 정리했어. 이드는 감정적인 충동(리비도)이고 슈퍼에고는 이 충동을 억제라는 역할을 하지. 이 둘을 중재하는 것이 에고(자아)야. 이 구분은 위에서 말한 신경계의 역할 구분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 감각과 지각(후두엽)은 이드, 생각(전두엽)은 슈퍼에고와 유사한 역할을 하지. 그럼 에고는? 프로이는 욕망(desire)을 중재된 에고의 발현으로 여겼어. 욕망은 에고처럼 균형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드가 너무 강하면 욕망이 범죄로 이어질 수 있고, 슈퍼에고가 너무 강하면 자신의 욕망을 너무 억압하게 되지. 프로이트는 문명(슈퍼에고)가 개인의 욕망(에고)을 너무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이 억압을 해소하는 방식이 바로 예술이야. 혹시 프로이트의 이런 주장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문명 속의 불만(Unbehagen in der Kultur)』을 참고하면 되.

욕망을 뜻하는 desire를 분해하면 de+sire가 되지. sire의 라틴어 어원은 ‘sidus(별)’이야. ‘desire=욕망하다’의 라틴어는 desiderare(de+sidero)로 ‘별로 시선을 돌리다’는 뜻이지. 무언가 멀리 바라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 한자 욕망(欲望)도 의미가 비슷해. 욕(欲)은 입을 벌리고 있는 ‘하품 흠(欠)’자와 위장의 좁은 길을 상형한 ‘골짜기 골(谷)’의 조합이고, 망(望)은 사람이 언덕에 올라 달(月)을 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글자야. 전체적인 한자 꼴이 ‘배고픈 사람이 멀리 바라보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 이렇듯 동서양 모두 욕망을 ‘미래를 지향하는 모습’으로 여기고 있어.

’욕망‘는 ’정리된 생각‘이야.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은 개념들을 구성하는 과정이지. 사람이 말을 하듯이. 우리가 개념을 구성하는 이유는 다음 행동을 계획하기 위해서야. 즉 욕망 구성은 미래 예측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신경망의 흐름에 ‘욕망’을 추가하면 ‘감각-지각-생각-욕망’의 순환과정이야. 정리하면 나는 사람을 안과 밖으로 분해하고, 이를 다시 감각과 지각, 생각과 욕망으로 더 세분화했어. 사람은 ‘감각’ 활동으로 모은 다양한 정보를 ‘지각’으로 통합하고, 지각을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해 ‘욕망’을 형성한 후, 욕망을 바탕으로 행동(감각)을 하지. 이렇게 감각과 지각, 생각과 욕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과정이 신경망에 의한 안과 밖의 소통이야.

윤여경

그래픽디자이너이자 디자인 교육자이다. 그린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디자인이 사람과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과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디자인 공부 공동체인 ‘디학(designerschool.net)’에 참여한다. 쓴 책으로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X축》(스테파노 반델리, 2012) 《런던에서 온 윌리엄모리스-그는 왜 디자인의 아버지인가》(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이 있으며, 공저로 《디자인 확성기》《디자이너의 서체 이야기》(지콜론북)가 있다. 이 외 〈다른 백년〉, 〈디자인 평론〉, 〈경향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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