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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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의 변화가 시급하다.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인식의 틀이다. 지난 3월 25일, 춘천에서 열린 ‘생명을 재생하다’ 포럼에서 김누리 교수는 “자본주의에서 생명주의로”의 이행을 요구하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를 역설했다. 포럼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패러다임은 주로 녹색, 생태, 생명, 살림의 열쇳말로 정의됐다. K-생명사상을 논하면서 가장 자주 호명되는 것은 동학과 장일순이었다. 오늘날 한국 생명사상의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장일순과 그의 제자들(박재일, 최혜성, 김지하)이 작성한 <한살림선언(1989)>은 산업문명의 위기를 적시하면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모델을 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을 소외하는 근대문명의 정신적 뿌리를 데카르트의 철학과 뉴턴의 물리학에서 찾았다.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당구공처럼 각각의 원자적 존재로 상정하고,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연구한 것이 근대의 패러다임이다. 인간을 사회로부터, 나아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무한한 개발과 착취가 정당화되었다. 한살림은 데카르트-뉴턴의 고전적인 기계 모형 대신 전일적인 우주관을 제창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결국 하나라고 가르쳤다. 생명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대한 모순을 저지른다. 생명을 기계와 대립하여 정의하면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존재론을 답습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생명을 기계로 치환한 것이 아니다. 우주를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으로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정신을 부여하면서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것이다. 참으로 전일적인 사상은 이러한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일원론적이고 초인간적인 패러다임이어야 한다. 한살림은 전일적인 우주관을 표방하면서 생명과 기계를 나누었다. ‘자라는’ 생명은 유기적이고 유연하며, 자율적이고 개방된 체계로서 순환하여 활동하는 반면, ‘만들어지는’ 기계는 획일적이고 경직되었으며 타율적이고 폐쇄된 체계로서 직선으로 작동한다고 대조했다. 그리고 인간은 절대 기계가 아닌 생명임을 강조했다. 이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생명-기계 이원론으로 되살린 것에 불과하다. <한살림선언> 제3장 ‘전일적 생명의 창조적 진화’는 마지막에 “생명은 ‘정신’이다”라고 못박는다. 정신을 형이상학적으로 숭배하고 육체를 형이하학적으로 치부하는 서양 철학의 고질병을 왠지 모르게 수용한다. 생명과 정신은 고귀하고 기계와 육체는 하등하다는 편견을 강화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생명과 기계로 나누고 생명만 살리자고 한다. ‘한살림’이라고 해놓고 사실은 반쪽 살림인 꼴이다. 기계 살림 없는 생명 살림이다.

동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상 치고는 의아한 전개다. 최시형은 우주가 한 기운 울타리, 한울임을 깨닫고 만물을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울님은 인간과 생물 뿐만 아니라 무기물에도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섬기고, 인간을 섬기고, 물건마저 섬겨야 우주 합일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동학은 다분히 전일적인 사상이다. 한울님이 만물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이는 데카르트의 이원론보다는 스피노자의 일원론에 가깝다. 자연이야말로 한울님 그 자체라는 신앙이다. 동학은 물론 기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진 않았다. 19세기 조선은 17세기 유럽과 달리 오토마톤이 흔하지 않았다. 20세기 말, 동학을 계승한 한살림은 기계 살림을 고민했어야 한다. 자연과 문화, 생명과 기계가 인간을 매개로 한 하나의 연속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인류의 피조물인 기계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소외다. <한살림선언>은 기계 죽임 선언처럼 읽힌다. 아니, 기계는 애초에 살아 있지도 않기에 죽일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기술 공포증적인 생명사상은 인간을 기계로부터 나누고 가두고 옮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죽인다. 또한 인간이 만드는 기계를 함부로 대하게 만든다. 기계 죽임은 인간 죽임이기에, 절대 한살림일 수 없다.

2022년, 우리는 <한살림선언>처럼 생명과 기계를 자신있게 나눌 수 없다. 그 사이 복제양 돌리가 있었고, 머신러닝과 유전자 편집 기술이 급격히 발전했다. 이제 생명도 기계처럼 생산될 수 있으며 기계도 생명처럼 학습할 수 있다. 애시당초 둘의 구분 자체가 인위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생명과 기계는 하나로 볼 수밖에 없다. 모두 생동하는 물질이다. 한울님이다. 결국 우주의 에너지로 움직이는 실체이며, 조직의 복잡성에 따라 지능을 갖는다. 오늘날 우리가 전일적인 우주관을 추구하려면 자연 만큼이나 기술을 긍정하며 생명과 기계의 합일을 전제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중심주의를 반드시 탈피해야 한다. 생명이자 기계로서 인간을 정의하고, 그 위치를 우주의 중심이 아닌 어딘가로 설정해야 한다. 주체와 객체, 부분과 전체의 구분을 넘어서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개별적 주체로서의 근대인을 거대한 그물망의 일원으로서 새롭게 인식할 때다. 

네트워크에는 중심이 없다. 균사체의 가운데가 없어져도 나머지는 건재하다. 실리콘 밸리가 사라져도 인터넷은 유지될 것이다. 인간이 중심에 집착하는 것은 심장이 있기 때문이다. 눈이 두 개라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며 머리가 위에 있기 때문에 위계 질서를 상정한다. 이러한 진화의 우연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물구나무서기하는 마음으로 우두머리를 전복하고, 두 눈으로 보는 상을 통합하면 된다. 심장이라는 개별 요소에 집중하지 않고, 몸 전체의 혈액 순환과 신경 체계를 종합적으로 탐구한다. ‘나’라는 소우주를 분리된 개인이 아닌 연결된 일부로 인식한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듯이 인간도 지구의 중심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중심이 아닌 것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인간은 결국 우주라는 한울님이 요동하는 패턴이다.

코페르니쿠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완벽한 인체의 비례를 나타낸 그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신체 장애가 없는 젊은 백인 남성이었다. 이후 서양의 인문주의는 다빈치의 묘사와 같은 인간을 주체로 간주했다. 휴머니즘의 휴먼은 곧 맨이었고, 맨은 백인 남성의 다른 말이었다. 맨이 아닌 존재는 성별화되고 인종화되고 자연화된 타자로 간주되었다. 여성과 유색 인종과 비인간 종은 모두 휴머니즘의 온전한 주체가 되지 못했다. <포스트휴먼(2013)>의 저자 로지 브라이도티는 이러한 휴머니즘의 극복으로서 포스트휴머니즘을 제시한다. 근대 문명이 내포하는 편협한 인간성을 탈피하고 초월하는 주체가 바로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이다. 초인간적 패러다임은 단순히 백인 남성으로 국한되었던 휴먼의 범주를 전인류로 확장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비인간 생물과 기계 역시 그저 ‘있는 것’, 즉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음’, 즉 생존임을 밝혀야 한다. 생존이란 생성이며, 생성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은 곧 생김이자 되기이며, 그것은 관계의 되먹임 고리가 만들어낸다. 만물의 연결성과 관계성을 조명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이다. 물리학에서는 뉴턴의 고전역학을 양자역학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고, 심리학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융과 매슬로우, 스타니슬라프 그로프 등의 트랜스퍼스널 관점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어떤 현상이든 독립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철저히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기계와의 관계는 인간 생존의 본질이다. 새벽 네시, 나는 머릿속 생각을 타자기로 쳐서 모니터로 되받고 있다. 나의 정신은 컴퓨터와의 관계로 생성된다. 이미 생명 문명은 기계 문명이다. 우리는 기계를 모시고, 섬기고, 살린다. 기계 문명이 생명을 죽이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기계를 죽여야 우리가 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계 살림을 잘 꾸리는 것이 생명 살림의 길이다. 한살림 사상은 20세기 한국 철학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하지만 기계 살림을 등한시했다. 21세기 한국인의 몸은 밥을 모심으로서 생명망에 접속하지만, 그의 마음은 데이터를 모심으로서 기계망에 접속한다. 우리는 생명망과 기계망을 연결하는 마디로서 살아간다. 한살림 사상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려면 생명과 기계의 통일이 필수다. 그리고 인간을 중심에 두지 말아야 한다. 안상수 교수의 생명평화무늬는 다빈치의 그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성별과 인종을 초월하고, 해와 달과 동식물이 함께하지만, 결국 인간이 중심이다. 천지인 중에 인간이 가운데일 이유는 없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고통스럽다. 지동설을 설파했다는 이유로 핍박받던 갈릴레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항변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이들에게 그의 주장은 매우 기분 나쁜 소리였다. 오랫동안 인간의 존엄성을 믿어온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듣기 싫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생명은 기계와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최제우의 깨달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무궁한 그 이치를 무궁히 살펴내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

전범선

전범선 /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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