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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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이라는 말은 1960년대 미국의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윌러가 대중화시켰다. 2008년 사망한 윌러는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두 사람 모두와 함께 연구했던 최후의 생존자였다. 20세기 후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는 평생 우주론을 연구하면서 가장 근원적인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 우주란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가? 존재란 무엇인가? 1989년, <정보, 물리, 양자 : 연결 고리를 찾아서>라는 글에서 윌러는 자신의 지론을 정리한다. “비트(Bit)에서 잇(It)으로”. 모든 물리적 존재, ‘이것’, 즉 ‘잇’은 ‘비트’라는 2진법 정보 단위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0과 1, 거짓과 참, 음과 양, 불연과 기연이 우주를 이루는 기본이다. 윌러의 이러한 주장은 양자 역학의 함의를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다. 뉴턴의 고전 역학에서는, 심지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도 현상은 연속적이다. 우주는 하나의 연속체다. 하지만 양자 역학의 세계에서는 항상 관찰자-참여자가 개입하고, 그 결과는 곧 정보다. 광자가 도달하거나 도달하지 않고, 무언가가 있거나 없다. 다시 말해 0이거나 1이다. 미시적인 양자 수준에서 현실이란 결국 우리가 묻는 예스-노 질문에 대한 관찰 장비의 답변이다. 비연속적일 수밖에 없다. 우주란 물질과 에너지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 고전적인 입장이라면, 윌러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층위에 정보가 있다고 믿었다. 시공간도 필요 없다. 라이프니츠는 “시간과 공간은 물질이 아니고 물질의 질서다”라고 했으며,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지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은 아니”라고 말했다. 존재의 본질은 시공간과 무관하다. 윌러는 비트야말로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라고 결론지었다. ‘긴가 아닌가?’ 묻는 관찰자-참여의 기본 방식이 모이고 모여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든다. 한마디로 존재는 비트에서 기인한다.

우주의 정보량은 막대하지만 분명 유한하다. 그리고 정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정보의 대표적인 예는 엔트로피다. 열역학에서 엔트로피는 시스템의 무질서 정도를 나타내는 양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닫힌 시스템에서 엔트로피는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 비가역적인 반응일 경우 엔트로피는 늘어난다. 정보 이론에도 물리학의 엔트로피와 비슷한 개념이 있다. 1948년, 미국의 수학자 클로드 섀넌은 <수학적 통신 이론>이라는 논문에서 사실상 정보 이론을 창시하고 엔트로피 개념을 도입했다. 섀넌 엔트로피는 정보의 불확실성 정도를 나타내는 양이다. 측정하는 양의 단위만 다를 뿐, 열역학과 정보 이론의 엔트로피는 형식상 같다. 정보는 사라지지 않고, 엔트로피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 물리학의 기본이다. 자연의 모든 법칙이 그렇듯이 약간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윌러가 주목한 블랙홀은 예외인 것 같았다. 블랙홀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수학적으로 도출된 현상이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설명할 때, 뉴턴과 달리 기하학적으로 접근했다. 물질이 물질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질량이 시공간을 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질량이 일정 수준 이상이면 중력이 너무 세서 아예 접혀 들어간다. 어떠한 물질이나 에너지도, 심지어는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는 구멍이 생긴다. 그것이 바로 블랙홀이다. 한번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물질은 사건의 지평선을 통과하는 순간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외부의 관찰자 입장에서는 사실상 사라져버린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내가 블랙홀 안으로 신발을 던졌다고 치자. 나의 관점에서 신발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블랙홀 연구자인 스티븐 호킹은 이를 두고 정보가 없어진 것이라고 봤다. 신발에 관한 비트들이 블랙홀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199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의 헤라르트 엇호프트는 호킹을 반박하기 위한 새로운 가설을 주장했다. 블랙홀로 들어간 물질에 관한 정보는 사라지지 않고 표면에 기록된다는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레너드 서스킨드는 엇호프트의 주장을 끈이론으로 더욱 정교하게 설명했다. 복잡한 수학적 계산은 차치하고 고차원적으로 비유하자면 그들의 가설은 홀로그래피에 비유할 수 있다.

홀로그래피가 무엇인가? 1947년, 헝가리계 영국인 과학자 데니스 가보르가 발명했다. 입체 정보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이다. 3D 현상을 2D 필름에 담는 것이다. 홀로그램 필름 자체는 육안으로 보면 정보를 전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질서하다. 그러나 그것에 레이저를 비추면 살아있는 것 같은 입체 영상이 재생된다. 요즘은 홀로그램으로 콘서트를 할 정도로 실감이 난다. 엇호프트와 서스킨드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정보가 사라지지 않고 표면에 기록된다고 봤다. 3D가 2D 정보로 변환되는 것이다. 마치 홀로그래피처럼 말이다. 블랙홀 표면에 담긴 정보만으로도 그 안의 모든 물질을 재구성할 수 있다. 실제로 계산해보니 물질의 엔트로피는 부피가 아닌 표면적에 비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블랙홀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가 그렇다. 그말인 즉슨, 우주는 블랙홀의 반대로 이해할 수 있다. 블랙홀 표면의 0과 1 또는 점과 선으로 내부의 물질을 전부 표현할 수 있다면, 우주 전체도 그 표면의 비트들로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삼라만상이 홀로그램 아닌가? 서스킨드가 홀로그래피 원리를 처음 제시했던 1995년까지만 해도 이러한 주장은 학계에서 황당무계하게 치부됐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주류 담론으로 거듭났다. 아직까지 법칙으로는 인정받지 못하지만, 우주론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라면 모두 진지하게 다룬다. 홀로그래피 원리에 따르면 우주를 둘러싼 표면에 기록된 정보야말로 참된 현실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현상계는 마야, 즉 환영이라는 고대 인도의 직관과 일맥상통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비본질적이고 정보만이 본질이라는 윌러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결국 존재란 우주 바깥에 저장된 비트들이 홀로그래피 원리로 투영되어서 만들어진 환상이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을 이끌어가는 주류 학자들이 점차 고대 동양의 신비주의적인 우주론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다만 이제는 기본 단위가 <주역>의 음효와 양효, 8괘와 64괘가 아닌 0과 1, 비트와 바이트일 뿐이다. 만약 존재의 본질이 비트라면, 우주는 거대한 컴퓨터다. 정보 처리 과정을 홀로그래피로 보여주는 컴퓨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디지털 혁명 이전부터 언제나 디지털 존재였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문제 제기는 다분히 디지털적이다. 0이냐 1이냐 묻고, 그 답변을 도출하는 관찰자-참여자의 단순 행위가 세상을 창조한다.

전범선

전범선 /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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