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2
  • 방법으로서의 자기 읽기 (3-2)
  • 기후변화 시대 철학의 회고
  • 남해바다와 수신의 감각
  • 근대의 기원 (3)
  • 안보와 지정학을 구실로 세계경제를 죽여서는 안된다
       
후원하기
다른백년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01) 한국사람의 정체성

한국사람이란 누구일까? 보통은 살고 있는 영토나 국적 등을 기준으로 집단을 구분해. 이스라엘처럼 디아스포라(diaspora)를 겪으면 종교나 혈통이 기준이 될 수도 있고. 이 외에도 역사와 문화, 언어, 민족 등 집단을 분류하고 규정하는 다양한 기준이 있지. 한국사람은 대한민국 사람만이 아니야. 역사적으로는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 사람을 포함하고 공간적으로는 중국의 조선족이나 이민자들까지 포함되지. 이들은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살아가고 국적과 종교 심지어 혈통도 제각각이지만 모두 한국사람으로 여겨져. 우리가 이들을 한국사람이라 여기는 이유가 뭘까? 이들이 한국사람의 정서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현재 개인과 집단을 구분하는 가장 강력한 기준은 ‘민족’이야. 많은 학자들이 민족 개념을 근대 사상의 발명품이라 말해. 전통적으로 집단을 묶어주던 종교가 배척되면서 그 자리에 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지. 사실 ‘민족’ 개념은 아주 모호해. 미국의 정치외교학자 베네틱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 1936~2015)은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라고 말했어. 그는 민족이란 과학적으로 증명된 기준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창작된 기준이라고 주장했지. 정치적 수사(rhetoric)에 가깝다고 할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민족 개념에 공감했고 ‘민족주의(Nationalism)’는 시대를 대표하는 이념 중 하나가 되었어. 하지만 근대 민족주의는 ‘통합’과 ‘독립’이라는 긍정적 효과보다 ‘갈등’과 ‘전쟁’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해왔어. 전쟁과 침략으로 분열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민족과 동일시 했고,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 때문에 21세기 들어와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높아지고 있어.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에일린 구(Gu Ailing, 谷愛凌)의 아버지는 미국인이고 어머니는 중국인이었어. 미국 대표였던 그녀는 이번 올림픽에선 중국을 대표했지. 한국의 쇼트트랙 선수였던 안현수도 소치 올림픽에서 빅토르 안(Виктор Ан)이란 이름으로 러시아를 대표했고 이번엔 중국 대표팀 코치로 활동했어. 이렇듯 현대인은 평생 동안 하나의 국적과 정체성만을 고수하지 않아. 다양한 문화를 즐기고, 국제결혼을 하고, 이민이나 귀화를 하는 등 본인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을 선택적으로 활용하지. 요즘 같은 세계화+디지털 시대에 한 개인을 민족, 국적, 혈통, 종교 등의 낡은 개념에만 가두는 것은 무리야.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지.

나는 언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언어 안에는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가 축적되어 있어.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면서 개인의 주체성을 인식하고, 언어로 소통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지.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고 할까. 민족 개념이 등장한 초창기에도 언어는 가장 중요한 화두였어. 일제강점기 때 한국 사람들이 가장 강조한 것이 ‘한국말’과 ‘한글’이야.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로 유명한 독일 민족주의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도 늘 독일어를 강조했지.

언어에는 마음의 정서도 담겨 있어. 우리가 ‘기쁨’이나 ‘슬픔’ 등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 감정에 해당하는 언어가 있기 때문이야. 언어로 말하기 어려운 모호한 감정은 잘 느끼지 못하거나 그냥 스쳐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한국 사람만의 특유한 ‘한맺힘’이나 ‘정성’ 같은 마음도 한국말에 그런 감정이 언어로 있기 때문이야. 이런 점에서 사람의 생각과 정서는 언어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어.

한국말을 살펴보면 한국사람과 한국문화의 바탕을 알 수 있어. 그래서 한국말 언어학자 최봉영은 한국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한국말’이라고 말해. 나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공감했어. 어떤 사람이든 한국말을 하면 한국사람의 생각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지. 얼굴색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혈통과 국적이 달라도 한국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한국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대한민국 국적이지만 영국말을 하면 그 사람은 영국사람이 될 수 있어. 한 사람이 두개의 언어를 할 줄 안다면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어. 어떤 말을 쓰느냐에 따라 한국사람일 될 수도 있고 영국사람일 될 수도 있지.

본래 한 사람 안에는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해. 자신이 처한 맥락에 따라 각기 다른 정체성이 드러나지. 스스로 정체성을 선택할 수도 있고. 언어에는 한 집단의 생각과 정서 나아가 문화까지 함축되어 있어. 그래서 특정 언어를 선택해 말하면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해당 집단에 동기화시킬 수 있지. 이런 점에서 집단구분도 ‘민족’이라는 상상의 기준보다 ‘언어’라는 실체적 기준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야. 즉 언어야말로 한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는 세계화+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기준이 아닐까 싶어.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 언어 연구는 아주 중요해. 언어의 원리와 바탕을 알면 사람의 생각과 정서 나아가 인류 문명의 비밀을 파악할 수 있을 거야. 과거 언어 연구는 대부분 관념적인 추론에만 의지해 왔지만 최근엔 경험적인 실험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어.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달한 덕분에 뇌과학과 심리학, 컴퓨터 등 다양한 분야와의 융합 연구도 활발하지. 또 과거엔 언어 연구의 대상이 주로 영미권 언어에 집중되어 있었어. 모든 언어의 문법이 영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져서 문법과 말의 쓰임이 서로 맞지 않은 경우도 많았지. 실제 한국말과 영국말, 중국말은 구조와 형식이 달라서 말의 어순과 구성, 품사도 각기 다르거든. 당연히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심리적 태도와 관점도 상당히 다르겠지. 다행히 최근에는 다른 언어에 대한 비교 연구가 활발한듯 싶어.

디자이너로서 현재 언어 연구에 대해 아쉬운 점은 언어의 개념적 범주가 다소 좁은 듯 싶어. 그래픽 디자이너가 다루는 시각 매체는 그림과 문자 등 주로 이미지야. 문자는 언어학에 포함되어 있지만 사진과 그림은 언어에 포함되지 않아. 현재 언어학은 오로지 말과 글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지. 현대인에게 언어적 수단은 무척 다양해. 말과 글만이 아니라 손짓, 표정, 몸짓도 있고 코딩이나 그림도 있어. 심지어 음악이나 수학 등의 분야는 나름의 기호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앞으로의 언어학은 이런 다양한 소통 수단과 여러 분야들의 기호들도 함께 고려하면 좋을듯 싶어.

 

02) 한국말에 왜 평어가 필요한가

한국사회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회야.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부정권을 거치며 모든 분야에 걸쳐 차별과 억압이 만연해 왔지. 『한국사회의 차별과 억압』이라는 책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최봉영은 한국사회 차별과 억압의 가장 큰 원인으로 한국말의 존비어체계를 꼽아.

우선 최봉영은 ‘차별’과 ‘구별’을 잘 구분해야 한다고 말해. 능력이 다른 경우가 ‘차별’이고, 본질이 다른 경우가 ‘구별’이야. 그래서 차별은 수직관계이고 구별은 수평관계가 되지. 권력에 대한 욕구는 권위(權威)와 권세(權勢)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어. 권위는 능력이 다른 경우의 차별 관계고, 권세는 남녀노소처럼 본질이 다른 구별이지. 과거 조선 사회는 양반과 노비로 구분되는 신분제도가 있어 사농공상의 구별 관계를 차별적 수직관계로 놓았어. 하지만 신분제도가 없는 현대의 평등사회에선 권세적 차별이 인정되지 않아. 수직적 차별보다는 본질에 따른 수평적 구별이 더욱 중요해졌지. 그래서 현대의 사회적 이슈와 정치, 문화 등 모두 평등한 ‘구별’을 기본 바탕으로 삼지.

한국사회는 말 형식에 따라 차별과 구별이 구분되는 경향이 있어. 가령 군대는 계급이 분명한 집단이라 반말-존댓말의 수직적 상명하복 관계가 요구되지. 반면 가족과 친구는 차별보다 구별이 앞서기에 상호 반말로 대화하는 경우가 많아. 직장과 학교 등 성인들의 사회은 구별이 앞서지만 반말보다는 격식을 갖춘 상호 존댓말을 선호하지.

성인이 되면 차별과 구별을 잘 구분해서 말을 해야 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평등한 구별을 지향하니까. 가령 군대식의 반말-존댓말의 차별적 수직 관계가 제대해서도 지속되면 곤란해. 부대에선 반말을 했더라도 밖에 나오면 말을 조심해야 하지. 가끔은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들이 다소 차별인 수직적 태도를 갖는 경우가 종종 있어. 선배라는 이유로 후배에게 다짜고짜 반말하고 상명하복을 요구할 때가 있었거든. 학교와 군대가 다른 집단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지. 물론 학교 안에도 차별은 있어. 수업 시간은 선생과 학생의 구조적 차별이 인정되지. 하지만 교실 밖에선 선생과 학생 모두 서로 구별되는 인격적 존재임을 알아야 해. 설령 교실에서 선생이 학생에게 반말을 했다더라고 밖에선 상호 존댓말을 쓰는 것이 맞겠지.

반말-존댓말 위계 관계에선 평등한 대화가 불가능해. 반말하는 사람이 주로 말하고, 존댓말을 하는 사람은 주로 듣는 역할을 하지. 상호 존댓말을 하면 평등하지만 대화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야.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언어 격식도 차려야 하니까. 말을 조심하게 되지. 상호 존댓말은 어휘력이 적은 쪽이 불리해. 마음 속의 있는 말을 마음껏 하기 어렵거든. 반면 상호 반말은 평등한 대화가 가능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마음껏 할 수 있고 감정도 속시원하게 얘기할 수 있지. 그러나 반말은 비속어가 많고 정돈되지 않아서 논리적인 설명에는 적합하지 않아. 그래서 반말 대화는 상대를 존중하는 진지한 토론이나 논리적인 대화로 이어지긴 어렵지. 막말과 비속어 때문에 대화가 적대적으로 흐를 수 있기도 하고. 정리하면 ‘반말-존댓말’ 대화는 차별과 억압을 낳고, ‘상호 존댓말’ 평등하지만 대화가 어렵지. 그리고 ‘상호 반말’ 대화는 친밀한 동시에 적대적이야.

평어는 적대적이지 않아. 막말과 비속어를 금지시켰으니까. 평어는 존댓말과 반말 사이에 있어. 존댓말보다 친밀하지만 반말보다는 덜 친근해. 반말처럼 편안하면서 존댓말처럼 규칙이 있지. 대화의 격식을 줄여 생각을 마음껏 말할 수 있도록 디자인 되었지.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야. 관계적으로 볼때 차별보다 구별을 지향하지. 경쟁적 차별을 최대한 배제하고 편안한 구별을 지향한다고 할까. 그래서 평어로 대화하면 내 논리를 강하게 주장하기 어렵고 상대방 말을 묵살하기도 어려워. 이런 점에서 나는 평어 디자인이 한국의 고질적 사회 문제인 차별과 억압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해결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야.

 

03) 성인들의 우정

사람은 누구나 의미 있는 대화를 하고 싶어해. 하지만 성인들은 대부분 존댓말을 쓰기 때문에 편안한 느낌으로 의미 있는 대화를 경험하기 어렵지. 그럼에도 가끔 이런 상황이 오면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평어와 비슷한 말을 하곤 해. 하지만 자신이 쓰는 말을 평어라고 의식하고 있지는 않아. 평어라는 언어 형식을 배운적이 없으니까. 그냥 상황에 맞추어 ‘예의 있는 반말’을 할 뿐이지.

반말은 말의 기본이야. 우리는 어린 시절 주로 반말로 말을 배웠으니까. 가정과 학교 등 성장하던 시절의 관계는 대체로 반말 관계가 많아. 그래서 한국 사람은 ‘우정’을 말할 때 항상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 같아. 반말로 격의 없이 대화하는 친구 관계를 우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 때문에 존댓말로 대화하는 성인 사회에서는 ‘우정’을 경험하기 아주 어려워.

성민은 성인 사회의 편안한 동료 관계를 ‘성인들의 우정’이라고 말해. 성인들의 우정은 어떤 관계일까? 어린 시절 친구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올리면 “우리 커서 성공하면 더 재밌게 놀자!”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아. 어린 시절 친구들은 대개 학교 친구들이라고 볼 수 있어. 함께 공부하고 놀면서 성장해온 친구들이지. 나는 ‘우정’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바로 ‘성장’이지.

함께 성장하는 관계가 되려면 먼저 서로 수평적 관계가 되어야 해. 그래서 학교는 대부분 같은 나이대로 구성되어 있어. 물론 발달 과정을 배려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지만 성인이 되면 전혀 그렇지 않아. 다양한 연령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거든. 덕분에 성인들의 우정 관계는 어린 시절과 달리 스팩트럼이 다양해. 공통의 가치와 목적을 공유하는 등 목적 의식이 높고 책임감도 강하지. 그런데 한국에서는 성인이 되면 우정은 커녕 오히려 차별과 억압이 더욱 심해지는 경향이 있어. 왜 그럴까?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과 다른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언어야. 바로 존비어체계지. 성민도 한국에서 성인들의 우정 관계가 어려운 이유는 존댓말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평어가 한국 사회에 형성되지 못했던 ‘성인들의 우정’ 즉 함께 성장하는 관계를 형성시킬 수 있다고 봐. 우정은 단순히 친밀한 사이를 넘어 성장을 공유하는 관계야. 평어는 상대방의 이름을 그냥 그대로 불러주기 때문에 대화할 때 사회가 규정한 나이, 직업, 직책 등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말을 하기에 위계 관계가 사라지고 상호 주체적인 대화가 가능해지지. 평어를 통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우정이 형성되는 거야. 디학에서 평어가 잘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디학에 오는 선생과 학생들이 모두 공부를 통한 ‘성장’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예의 있는 반말』(텍스트프레스, 2021)은 평어를 경험한 디학의 선생과 학생들이 함께 쓰고 디자인한 책이야. 아무래도 ‘평어’라는 말이 생소해서 제목을 이렇게 지은듯 싶어. 이 책에는 관계의 변화, 친구와 동료, 우정과 성장, 평어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 등 평어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섬세한 감정이 담겨 있어. 성인들의 우정이 싹트는 성장 스토리라 생각하며 읽으면 아주 흥미로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언어 디자인을 통해 인간관계의 변화를 다룬 디자인 사례로서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있어.

 

04) 한국말의 다양한 언어 형식과 쓰임

얼마 전 모 대기업에서 모든 사람이 ‘상호 존댓말’을 쓰기로 했다는 기사를 읽었어. 나는 이 결정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과연 이 선택이 적절한지는 의심하고 있어. 기업이 상호 존댓말을 선택하는 이유는 반말-존댓말에 의한 경직된 수직관계 때문일거야. 아무래도 반말-존댓말 관계는 조직 내 차별과 억압을 불러오니까. 하지만 관계는 수직과 수평만이 아니라 친밀함과 멀어짐도 두루 살펴야 해.

한국말의 존비어체계는 ‘강한 수직 관계’와 ‘친밀한 수평 관계’ 그리고 ‘어색한 수평 관계’ 외에는 허락하지 않아. 수평적인 관계는 상호 반말과 존댓말을 쓸 때 형성되지만 차이가 있어. 반말에 의한 수평 관계는 가깝고 친밀하고, 존댓말에 의한 수평 관계는 멀고 어색하지. 그래서 존댓말을 쓰면 친밀한 소통이 사라지지. 즉 상호 존댓말을 강제하면 직장 내 우정 관계도 함께 사라질 수도 있어.

존댓말은 서로 삼가해야 하는 상황에서 쓰기에 적합해. 말의 격식만이 아니라 말의 뉘앙스도 신경써야 하지.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와 품격까지 갖춰야 하고. 그래서 존댓말은 정치에 적합한 언어 형식인듯 싶어. 경제와 사회적 소통에 있어 존댓말은 별로 좋지 않은 선택이야. 시장에서 유효한 언어는 오히려 반말이 아닐까 싶어. 실제로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반말을 즐겨써. “이모 쫌만 더 깍아줘~”처럼 흥정을 할 때는 반말투가 친근하지. 또 상황변화에 빨리 대응해야 하는 스포츠 경기에서도 반말이 훨씬 좋아. 과거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았을때 경기중에 선수들끼리 반말로 말하도록 지시했다고 해. 아무래도 긴박한 경기 중에는 바로바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니까.

현대 사회의 관계들은 아주 복잡해. 그런데 한국말의 존비어체계는 이 복잡한 관계를 잘 수용하지 못하고 있어. 말의 형식으로 관계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있는 상황이랄까. 이런 상황에서 평어는 기존 존비어체계의 훌륭한 보완재가 될 수 있어. 편안하면서도 덜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면 어떨까? 안타깝게도 한국말에는 이런 관계를 받아주는 대화 형식이 없어. 나는 평어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앞서 언급한 대기업 사례처럼 여러 관계가 공존하는 집단에서는 여러 대화 형식이 있어야 하거든. 존댓말만 쓰면 하나의 관계만 남게 되지만 존댓말, 반말, 평어 등을 섞어서 쓰면 다양한 관계가 공존할 수 있어. 이런 점을 고려해 기업의 상황에 맞게 언어+관계를 디자인할 필요가 있지.

가령 기업이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일을 추진해야 할 때는 반말-존댓말 관계가 좋을 수 있어. 하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반말-존댓말 관계는 최악이지. 부장, 대리, 사원 셋이서 아이디어 회의를 하면 서로 존댓말을 쓰거나 어느 한쪽이 반말을 하게 되지. 이런 대화에선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려워. 각자 자기 직책과 역할을 의식하게 되거든. 이런 경우 평어가 필요해. 좋은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니까. 아무래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 반말로 말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지. 처음엔 조금 어색하겠지만 규칙이라 여기고 반복하면 금방 익숙해질거야. 디학에서도 그랬으니까.

회사에서 친밀한 사람끼리 반말을 하는 것도 좋아. 퇴근 후 술자리에서 부하 직원이 “형 나한테 요즘 너무하는 거 아냐!”라고 불평을 하면 “그랬어? 힘든거 있으면 형한테 털어놔”라며 위로하면 좋겠지. 반면 다른 회사와 서로 거리를 두고 밀당을 하는 계약 관계에서는 상호 존댓말이 필요할 때가 있어.

기업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다양한 언어 형식이 있어야 해. 학교에는 선생과 학생, 교직원, 선후배와 동기생 등 다양한 관계들이 공존하지. 대화 관계도 다양해서 강의형 수업도 있고, 토론형 수업도 있어. 상담도 있고 회식이나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있지. 강의형 수업은 상호 존댓말, 토론형 수업은 평어가 좋아. 강의는 선생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수업이고 토론은 학생들과 선생이 서로 대화하는 수업이니까. 술자리처럼 기탄없이 대화를 나눌 때는 아무래도 반말이 어울리겠지.

나는 말만이 아니라 글도 다양한 언어 형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글쓰기는 기록과 소통을 위한 언어 행위야. ‘~이다’로 끝나는 지금의 한글 문어체는 주로 기록을 위한 형식이야. 글 형식이 독백이기에 나 자신만의 생각에 빠지기 쉽지. 소통을 위한 글쓰기는 주로 구어체로 쓰여져. 구어체는 주로 존댓말을 사용하는데 상대를 존중하는 말을 삼가하는 형식을 취하다 보니 쓰고 싶은 생각을 편안하게 쓰기 어렵지. 나는 평어 글쓰기가 이 점을 보완해주리라는 생각이야.

평어 글쓰기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과 비슷해. 편지는 친밀한 친분 교류만이 아니라 진지한 학문적 교류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글쓰기 형식이야. 근대 서양학자들은 주로 편지로 서로의 학문적 연구 결과를 주고 받았어. 격렬한 학문적 논쟁도 있었고. 이들에겐 편지가 곧 논문이었지. 편지를 통한 학문적 교류는 조선시대에도 있었어. 퇴계(李滉, 1501~1570)와 고봉(奇大升, 1527~1572) 같은 조선의 선비들은 주로 편지로 성리학 논쟁을 했지. 물론 옛날에도 존비어체계는 있었어. 만약 퇴계와 고봉이 만나서 대화를 했으면 반말-존댓말 관계로 대화했을거야. 논쟁 자체가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당시 선비들은 주로 한자를 썼어. 중국말과 한자에는 존비어체계가 없는 덕분에 평어 형식의 학문적 논쟁이 가능했다는 생각이야.

현대의 한국에서도 이런 편지 형식의 평어 글쓰기가 좀 더 확산되었으면 해.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이야기를 할 때 아무래도 존댓말보다 평어가 적합한듯 싶거든. 평어는 존댓말의 억압된 형식에서 자유로우면서 반말처럼 막말을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 평어 형식을 빌려 나의 오랜 연구와 생각을 글을 써보는 실험을 하는 중이야. 마치 친구에게 편지를 쓰듯이. 이런 형식의 글쓰기가 처음이라 생각처럼 쉽지는 않지만 노력하고 있어.

디학에서 평어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성민은 수업과 직장 등 다양한 분야로 평어를 확장시키고 있어. 최근 민음사 문학 잡지 『릿터(Littor)』 34호는 평어(예의 있는 반말)를 주제로 다루었어. 성민이 쓴 ‘기현, 안녕?’ 등 평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글들이 실려 있어. 릿터 편집자들이 3개월 동안 평어를 경험하고 느낀 바를 기록한 글도 있지. 이 외에도 성민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번역에도 평어를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어. 영어는 기본적으로 평어의 말투(글투)를 갖고 있으니까 왠지 더 적절한 번역이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와 성민은 평어가 디학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와 집단에서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야. 평어에 관심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줘. 한국말의 바탕과 언어 형식, 언어 디자인과 사람 관계, 커뮤니티를 위한 언어 등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 정말 재밌을거야.

윤여경

그래픽디자이너이자 디자인 교육자이다. 그린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디자인이 사람과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과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디자인 공부 공동체인 ‘디학(designerschool.net)’에 참여한다. 쓴 책으로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X축》(스테파노 반델리, 2012) 《런던에서 온 윌리엄모리스-그는 왜 디자인의 아버지인가》(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이 있으며, 공저로 《디자인 확성기》《디자이너의 서체 이야기》(지콜론북)가 있다. 이 외 〈다른 백년〉, 〈디자인 평론〉, 〈경향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후원하기
 다른백년은 광고나 협찬 없이 오직 후원 회원들의 회비로만 만들어집니다.
후원으로 다른백년과 함께 해 주세요.
 
               
RELATED ARTICLES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