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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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달 동안 서양의 현대철학을 다시 리뷰하면서 발견한 것은 현대철학은 니체, 하이데거나 화이트헤드가 탐구해온 보편적 존재론과 포스트모더니즘(푸코, 라깡, 들레즈, 데리다 등),후기포스트모더니즘(알랭 바디우, 조르쥬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과 같은 사회철학, 문화철학 및 정치철학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철학, 문화철학과 정치철학은 모두 그 뿌리를 보편적 존재론을 실체론이 아니라 생성론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는 특히 니체의 생성철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 및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보편적 존재론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및 소시에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도 힘입은 바도 크다 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덧붙여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서양철학은 시계열적으로 가족유사성을 띄고 있기에 현대철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건 후기포스트모더니즘이건 반드시 그의 사상적 피상속인이 스승으로 존재하기에 그들 스승의 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현대 철학자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푸코, 들레즈와 데리다는 프랑스출신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니체와 하이데거 철학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해가 불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새삼 그들의 사상의 역사적 폭과 깊이가 상상 이상으로 넓고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서양문명의 철학적 토대(자유, 평등, 박애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참여와 연대 등)가 만만치 않게 굳건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서구문명의 전통적 이념들이 최근 코로나 사태를 맞아 비상사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서구 정신문명의 근원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도 제기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필자의 입장은 이러한 팬더믹은 서양 문명의 근본적 결함인 실체론적 존재론에서 기인하는 바도 있지만 도리어 산업화에 따른 독점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및 재벌독점자본주의와 그이 극단적 발현형태인 신자유주의의 모순에서 기인하는 것이 훨씬 크다할 것이며 이제는 자본주의 자체를 거부할 수 없다라는 체념으로 인해 심화된 산업화의 모순이 인간의 대응능력을 넘어서버릴 정도로 급격히 악화되버린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과도 일치하는 것이기에 따라서 오늘날 마지막 현대철학자라는 칭호를 듣는 지젝의 철학을 일별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지젝의 철학적 태반으로 헤겔의 변증법과 칼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들 수가 있습니다.

먼저 그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정의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결코 들레즈를 비롯한 후대의 철학자들이 함부로 단정해버린 동일성 또는 통일성의 변증법이 아니라고 재해석하면서 헤겔은 시간성 속에서 변화와 운동을 일으키는 원리를 변증법으로 풀어보고자 한 것이지 결코 차이를 지양하고 배제하여 동일성으로 차이들을 해소해버리는 전체주의적인 철학자가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새롭게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독자적인 시각에서 ‘차이의 변증법’을 주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헤겔은 칸트의 선험적 주체와 같은 독자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아니하면 단지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속에서만 자신의 존재의미를 갖게 된다고 보았기에 결국 주체와 타자 사이의 차이를 변증법을 통하여 해소시키고자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에 헤겔의 입장을 대체로 계승한 지젝은 타자를 주체의 결핍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결핍의 타자를 통해, 즉 타자의 부정성과 차이성을 통해 즉자인 주체는 자신을 반성하게 되며 이후 타자의 부정을 재부정하는 재귀적 부정을 통하여 자신을 합정립synthese하게 되는데 여기서 타자는 결코 즉자로 흡수되거나 통일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지젝의 변증법은 동일성 또는 통일성이 아닌 타자(대자)를 영원히 차이로 인정하는 차이의 변증법으로 나아가게 되며 단지 차이의 타자로 인해 즉자인 주체는 한껏 고양된 재귀적 존재self-being로 다시 태어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를 우리 속담대로 해석하자면 ‘애들은 서로 싸우면서 큰다’라는 관점과 같다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즉자의 결핍을 내용으로 하는 대자인 타자를 통해 즉자는 자신의 존재의 결핍을 인식하고 반성을 하게 되며 이후 즉자는 자신을 재부정하면서 재귀적 존재로 고양되어가는 한편 영원한 차이인 대자는 자신의 존재를 즉자에 의해 지양되거나 억압받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고유한 부정성을 유지하며 존속하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여 지젝은 즉자는 결핍과 차이인 대자를 통해 재귀적 존재로 고양되는 한편, 즉자는 차이로서의 대자(타자)를 억압하거나 지양하지 않고 즉자와 동등하게 등가적인 가치를 인정해주는 생성론의 세계관을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그는 맑스의 이데올로기이론과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결합시키면서 그만의 독자적인 쥬이상스, 즉 향유의 이론을 전개시켜 나갑니다.

맑스는 이데올로기를 부르죠아의 허위의식이라고 규정하였는데 라캉은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정신분석학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 해석하면서 자아를 상상계, 상징계와 실재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젝은 맑스의 이데올로기이론을 상징계이론으로 재해석해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젝은 유아의 상상계를 거울단계로 해석하면서 소타자인 어머니를 자아로 착각하면서 자아는 이미 정신분열의 조짐을 보이는데 상징계에 이르러서는 프로이트의 아버지와 같은 대타자인 국가, 규범, 종교, 자본주의 등에 의해 주체가 수동적으로 사회화되는데 이중에서도 특히 자본주의의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간의 주체가 결정적으로 형성되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결국은 자본이 만든 실상을 은폐한 거짓 환상에 불과하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자본이 만들어낸 잉여욕망의 이데올로기를 마치 욕망의 실상을 구현한 실재계인양 호도하고 왜곡하여 주체를 자본에 복종하는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결국 자본주의는 자신을 결코 전면에 드러내지 않은 채 국가, 종교, 문화, 예술 등 대타자 뒤에 숨어서 욕망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면서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주인이 되고자 획책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여 그는 무엇보다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은 채 대타자들의 뒤에 숨어서 결코 자본주의 모순의 피해자들과의 전면전을 거부하는 자본의 교활한 책략에 봉사하는 잉여욕망의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작업을 빨리 시작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본은 항상 대타자들 뒤에 숨어버리기 때문에 자본주의 모순에 따른 피해자들(노동자, 무산자, 소수자등)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투쟁의식을 희석시키기 때문에 결코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혁명은 전략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지젝은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자본이 만든 상징계의 이데올로기만이라도 그 허상, 환상을 폭로하여 해체하자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그는 실재계를 향한 향유, 즉 라깡의 쥬이상스enjoyment로서 죽음충동으로서의 향유를 제시하게 됩니다.

달리 설명하면 상징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것은 주체에게는 일종의 기존 사회질서를 부정하는 자살행위와 같은 모험이기에 실재계를 찾아나서는 모험인 향유는 죽음충동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기존 상징계의 질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법의 실현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향유를 주장한 것입니다.(이는 지젝이 맑스와는 달리 상부 구조가 하부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능산적 주체는 단지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주체가 되어 스피노자의 능산적 욕망, 즉 코나투스Conatus가 만개한 실재계를 현실에 실현시킬 수 있는 향유와 차이의 변증법의 주인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것 입니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의 현대적 변형태인 신자유주의에 대해 엄청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가 슬리브족 출신으로서 서구의 자유주의가 지나치게 개인주의와 결탁하면서 공동체의 연대와 공화주의를 해체하고 뷸평 등을 가속화시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강화하는데 이바지 했다고 보았기에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허구성을 폭로하는데 앞장서 온 것입니다.

즉, 그는 신자유주의가 자유의 확장이 아니라 도리어 자유의 불평등을 확대, 심화시켰기 때문에 실질적인 자유의 평등을 실현하기위해서는 형식적 민주주의나 경제적 신자유주의를 배격하고 자본과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전반적인 개입과 통제가 필요하다고 본 것으로 그 방법으로 코나투스로 가득한 실재계를 향한 향유를 제시한 것이며 대안으로 맑시즘과 기독교의 평등정신의 복원을 꿈꾸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대타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노예가 되도록 강요해온 자본의 잉여욕망의 이데올로기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를 해체하는 작업에 시민들이 새로운 인식론, 존재론과 변증법의 주체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현실정치에도 앞장서서 직접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철학은 평등을 강조한 나머지 자유주의 정신의 기틀마저 손상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하는 우려와 함께 존재의 욕망을 당위인 평등가치로 통제하는데 실패해온 역사적 경험을 반추해본다면 그의 정치철학 역시 윤리학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박헌권

수십 년간 시민운동의 경험을 통하여 얻은 성찰을 토대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의 융합을 통하여 21세기의 새로운 존재론과 우주론을 추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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