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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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

역자는 2019년 11월초에 한국을 방문하여 두 회의석상에서 중국의 향촌건설운동과 농민공, 시민들의 귀농귀촌 흐름에 대해서 소개할 기회를 가졌다. 흥미있는 지점은 와중에, 두가지 전혀 다른 피드백을 받았다는 것이다. 첫번째 회의석상 (한국 문학인류학회)에서는 주로, 발표 초반에 소개한, 후기 근대적인 양태를 띈, 매우 전위적인 젊은이들의 귀농귀촌 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중국 사회 전체와 지나치게 동떨어진 ‘섬같은 모습’ 아니냐는 어느 한국 학자의 평이 있었다 (즉, 사회학적 탐구가치가 약한 희귀 사례의 나열에 불과하다). 두번째 회의 (아모레 퍼시픽 차이나 포럼)에서는 정반대로 발표 후반부에 더 많이 소개한 신향촌건설운동이 사회운동으로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는 모습에 대한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관방과 자본의 힘을 빌리고, 주류의 담론을 채택하면서, 운동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 참가한 중국 학자의 평이었다. 공교롭게도, 두분 모두 은퇴한 여성 인류학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답답하게만 느껴졌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의, 중국 사회와 향촌건설운동에 대한 기대수준의 차이가 그런 정반대의 평가를 가져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리하자면, 일정정도 중국에 대해 선입견을 가진, 한국학자는 중국이 어차피 개발주의에 경도된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전근대성이나 근대성을 면치 못하고 있을 것이므로, 어떤 종류의 사회운동이나 그 영향을 받은 개인이 추구하는 전위적 변화가 그다지 의미가 있겠느냐는 차가운 감상만이 남았을 터이고, 그럼에도 중국의 변화를 열망하는 중국 학자의 경우에는, 그 변혁이 충분치 못해서 기대하는 만큼의 변화를 가져오기엔 난망이지만, 체념으로만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의 표현일 터였다. 두 상반된 견해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역자는 실은 스스로 느끼고 있는 양가적 감정을 동시에 확인받은 것 같기도 했다. 지난 5년간 중국 사회를 관찰하면서, 특히 향촌과 그를 둘러싼 생태계의 변화에서 느껴온, 뜻밖의 동시대성/전위성, 역동성에 대한 감동과, 한편으로는 체제의 한계, 역사적 발전의 느린 템포에서 기인한 진부함에서 느끼는 피로와 실망감이 그것이다.

 한편으로 역자가 마치 량슈밍과 원톄쥔으로 이어지는, 중국 향촌건설운동의 소개에 치중하는 대변자 같은 역할에 그치고 있지 않느냐는 비판도 있었는데, 그 한계가 노정된 사상과 운동에 교조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내기 보다는,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해서 비판적 분석과 전망을 제시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었다.

해당분야의 전문연구자가 아닌, 번역자+초급 코멘터의 입장에서, 그리고 주로 국제 교류의 코디네이션을 중심업무로 삼는, 활동가의 입장에서, 역량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제한된 자원을 잘 활용하여, 어떻게 더 좋은 정보와 만남을 제공할지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없다. 와중에, 향촌건설운동을 대표하는 량슈밍 선생과 향촌을 포함한 중국의 사회학/인류학의 태두인 페이샤오통 선생의 사상적 조화와 교류에 대해 서술한 본고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중국과 동아시아, 향촌, 생태문명의 화두를 품고, 어떤 방향의 공부가 필요할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하오(张浩), 중국사회과학원사회학연구소(中国社会科学院社会学研究所)

<사회학연구잡지 10월 8일>

 

개요

량슈밍과 페이샤오통은 두사람 모두, 향촌발전사와 학술사상사의 주요인물이다. 본문의 주요 내용은 페이샤오통의 량슈밍의 향촌건설에 대한 이해와 인식에 대해 논한다. 젊은 시절의 페이샤오통은 학문분과적 훈련, 학문도반들의 영향, 그리고 신사계급의 가정배경에 의해서, 량슈밍의 향촌건설주장에 대해 유보적 태도와 의문를 갖게 됐다; 이후 수십년간 인생의 고초를 겪고, 만년의 회고와 추가적인 연구/ 공부를 통해서, 페이샤오통은 량슈밍을 재인식하고, 그에 대해 조금 더 공감하게 된다. 향촌건설이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각자의 아름다움’에서 ‘아름다움의 서로 나눔’으로의 진화이다. 량슈밍과 페이샤오통의 중국향촌사회에 대한 정확하고 깊이있는 통찰은 중국사회과학의 중국화/현지화의 랜드마크이자 중요한 성과로 인식되고 있다.  그들의 현실 향촌문제에 대한 깊은 인식과 유용한 해결방안은 현재로서도 참고할만한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 “량선생의 학문에 대한 노력, 사람됨에 대해서 나는 늘 흠모의 마음을 지녀왔다”

1987년 10월31일 량슈밍 선생의 95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거행된 량슈밍사상 국제학술회의 석상에서 페이샤오통 선생은 유명한 연설을 행한다: “량슈밍선생은 내가 존경하는 선배이고, 당대 중국의 탁월한 사상가이며…… 내 인생을 통틀어, 알게된, 가장 진지한 지식의 탐구자이고, 두려움이나 걱정없이, 항상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다……  량선생의 학문에 대한 노력, 인간됨에 대해서 나는 늘 흠모의 마음을 지녀왔다” (페이샤오통, 2009/1987a: 384-385). 1988년 5월, 페이샤오통은 홍콩에서 열린 ‘중국문화와 현대화’ 학술회의에 량슈밍선생을 초청했으나, 95세로 연로한 량슈밍 선생은 장거리 여행이 무리라 판단되어, 집에서 녹화한 영상을 회의석상에서 공개했다. 이 강연은 이 노학자 인생 최후의 학술강연으로 기록됐다. 이 회의에서, 페이샤오통은 량슈밍의 문화관에 대해 키노트 스피치를 했고, 량슈밍의 이론은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토론을 해야할 부분도 적지 않지만, 질문의 제기, 관점의 제시에 있어 후학들이 존경하고 우러러야 할 거인이라고 평했다 (페이샤오통, 2009/1988a: 65).

어떤 이가 량슈밍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후학중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답하기를: “페이샤오통이다. 페이샤오통 선생은 강남에 가면 강남을 논하고, 강북에 가면 강북을 논한다. 지금의 젊은이들도 그를 본받기 바란다: 다른 이가 또 물었다. “민주당파 인물중, 가장 높이 평가하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그가 답하기를: “페이샤오통이다. 페이샤오통은 자세한 부분까지 통달하고 있다. 최근 농촌의 공장과 광산에 대한 연구결과를 보면, 더 높은 수준으로 통달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이의 이름 석자에 통通자가 들어있지 않나?” (루컹 陸鏗, 1990). 페이샤오통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아 화답한다: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것은 아마도 내가 량선생님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페이샤오통, 2009/2003b: 487-488; 마바오천 馬寶琛).

확실히, 두 사람은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거나 서로 통하는 지점들이 있다: 의학을 공부하려는 뜻을 품기도 했고. 하지만, 결국 이를 포기하고, 인문/사회과학의 길로 들어섰다. 침몰해가는 중국 사회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청년시기에 중요한 저작을 내놓았다. 베이징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민주동맹의 주요직책을 맡았다. 신문을 발행했고, 평화와 민주를 제창했고, 국민당 정부의 전제정을 지속적으로 반대했고, 학문의 현실에서의 쓰임새를 강조했으며, 그래서 학문을 위한 학문을 반대했다. 중화문화와 역사의 명운에 관심을 갖게 됐고, 중국향촌의 쇠락문제에 직면하여, 통찰을 내놓았고, 두 사람 모두 95세까지 장수했다.

이렇게 서로 비슷하고 통하는 점이 많다면, 서로 존경하고 지지하는 것이 당연할것이다. 그렇다면, 페이샤오통은 량슈밍이 대표하는 향촌건설파의 주장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을까?

1920년대 – 30년대 들불처럼 일어난 향촌건설운동, 이 운동의 문제의식은, ‘5.4’시기 정치사회제도변혁의 기본명제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봉건주의 황제의 권한이 사라진 후, 민이 다스리는 정치체제 건설을 위한 민심의 기초는 무엇인가 ? 공화정을 지탱할 수 있는 사회와 민중세력을 정초하는 것이, 향촌건설운동의 주요한 임무가 됐다 (호우준딴 侯俊丹, 2017). 량슈밍의 향촌건설 시도는 이 점을 특히 중시하고 있었다. 량슈밍은 개량적인 사상을 가진 아버지의 권유로 신식교육을 받았고 중학시절에 량치차오梁启超의 깊은 영향을 받아, 입헌군주제를 추종했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의 반쪽짜리 개혁에 실망해서 금방, 혁명지지로 입장을 바꾸게 됐다. 그는 당초 중국에 서양의 정치제도를 실현하는 것을 꿈꿨다. 하지만 민국초기의 정치혼란상을 접하면서, 군벌이 할거하는 상황에 다시 낙담했다. 그는 “제도와 생활습관의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깨달았다. 무엇보다, 제도는 습관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나는 민중의 새로운 정치습관을 배양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면서, ‘향촌자치’의 문제를 떠올리게 됐다” (량슈밍, 2005/1934a: 19-22). 그는 ‘향촌자치’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허난河南마을자치학원에 참여하면서 <<월간마을자치村治月刊>> (1929-1930)잡지도 책임지게 됐고 나중에 ‘마을자치’를 ‘향촌건설’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내가 향촌운동에 종사하게 된 동기는 중국정치문제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나는 정치문제를 고민하다가 한가지 답을 얻게 됐는데, 그것은 우선 새로운 정치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작은 규모로부터 시작을 해야하기 때문에, 향촌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량슈밍, 2005/1930a: 231-232, 1937a: 318).

비록 당시 사회학자들의 향촌건설운동에 대한 비판은 적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사회학자들은 향촌건설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향촌실험구의 설립부터, 인재육성에 이르기까지, 향촌사회조사를 추진해서, 실험의 기초를 제공했다. 또, 여론 형성에 영향을 끼치고, 향촌건설역량의 통합에도 참여했다 (옌밍 阎明, 2004:96-97). 페이샤오통은 1933년 옌칭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량슈밍의 산둥山东성 조우핑邹平현의 향촌건설사업에 참가했다 (페이샤오통, 2009/2003b, 487; 아쿠쉬Arkush, 1981: 36、294). 사회학계의 후학으로서 페이샤오통은 량슈밍의 향촌건설주장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사상가들의 서로에 대한 주장과 관점에 대한 태도를 이해해야 하고, 그들 각자의 주장을 같이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 중요한 이론적 의의를 갖는다. 두 사람은 향촌발전사와 학술사상의 주요한 인물로서, 피차 상대방에 대한 주장과 태도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 공동으로 대면하는 원래 문제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되고, 각자의 주장을 깊이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다른 주장과 논리의 공통점과 분기하는 지점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사회사상의 총체적 상황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외에도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중요한 현실적 의의를 갖는다. 현재 중국의 국가발전은 새로운 역사의 방향에 서있다. 사회의 주요 모순은, 이미 인민들의 매일매일 증가하는 생활수준 향상에 대한 필요, 지역간, 계급간 발전 격차의 모순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리고 향촌이 이러한 발전에서 소외되어 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중국 공산당은 19대 보고에서 향촌진흥전략의 실시를 제안했고, 향촌진흥의 실현은 역사적 과업중 하나가 됐다. 임무는 중차대하고 해야 할 일은 수없이 많다.  과거를 돌이켜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 현재의 향촌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순리대로 해결하기 위해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대의 탐색과 실험, 경험과 교훈을 공부해야 한다. 량슈밍선생의 향촌건설 실험과 페이샤오통선생의 향토중건주장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어, 중요한 역사적 유산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현재 학계에는 량슈밍과 페이샤오통 각자의 향촌발전 사상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진행돼 왔으나 (류하오싱刘豪兴, 1988,1989,2017; 리샨펑李善峰, 1989; 간양甘阳, 1994; 정따화郑大华, 2000; 쟈커칭贾可卿, 2003; 우페이吴飞, 2005; 저우용핑周拥平, 2007; 간춘송干春松, 2007; 셩방허盛邦和, 2007; 양칭메이杨清媚, 2010,2015; 리여우메이李友梅, 2017; 셰리중谢立中, 2017; 장징张静, 2017; 저우페이저우周飞舟, 2017,2018; 저우샤오홍周晓虹, 2017) 두 사람의 사상에 대해서 진행된 비교 토론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띵유엔쥬丁元竹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두 사람에 대한 비교연구결과를 내놓았는데, 두 사람의 중국 근대화 경로의 탐색  목표는 일치한다. 하지만 연구의 결론으로 얻은 인식은 상이하다. 량슈밍은 중국인의 새로운 생활의 뿌리는 반드시 향촌에서 찾아야 한다며, 우선 농업을 일으켜 세우고, 공업이 따라가야 한다, 즉 농촌을 부흥하고 나서 도시화를 진행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이샤오통은 도시와 농촌을 모두 중시하고, 농업과 공업의 관계에 있어서 향촌 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서방문화에 대한 태도를 보면, 량슈밍은 전체적으로 서구화론을 부정했고, 중국문화를 서방문화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페이샤오통은 각각의 문화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열관계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특정 문화는 특정한 인문생태환경속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띵유엔쥬, 1992). 쉬용徐勇은 자신의 연구논문에서 마오저뚱, 량슈밍, 페이샤오통은 공통적으로 아시아의 중국이라는 특수한 역사배경과 사회의 실제에서 출발하여, 근대화 속의 향토중건문제를 깊이있게 탐구했다고 지적했다. 마오저뚱은 농민이 주체가 되는 제도혁명을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치혁명으로 편중되어 향토중건이 과도한 정치이상색채를 띄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이의 실현을 어렵게 만들었다. 량슈밍은 전통중국이 윤리본위의 직업분화사회라고 이해했으며, 건설의 임무가 있을뿐 혁명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문제는 근대서방문명에 의한 충격이 만들어낸 문화실조현상이라 보고, 향촌조직을 통해 새로운 문화, 새로운 예와 속을 재건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한다고 봤다. 페이샤오통은 중국향촌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농민의 생계문제해결로 보았고, 향촌공업을 회복하는 것이 유효한 경로라고 여겼다.  세사람의 생각은 달랐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세사람 모두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을 희생시키거나 농촌이 비용을 부담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향토중건은 중국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농촌과 농민의 잠재적 역량을 발굴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큰 책임감을 가지고 농촌을 주목하면서, 직접 몸을 던져 사회조사와 실천을 수행했다. 그 가운데, 향토 중건 문제의 경로와 방법을 모색했다(쉬용徐勇, 1996).

페이샤오통의 영문전기의 저자 아쿠쉬가 주의하는 것은 젊은 페이샤오통이 향촌건설작업에 대해서 냉담하거나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학술연구를 통해서 중국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렇게 사회의 기초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아쿠쉬가 추측하는 바로는 페이샤오통이 당시에 파크 R.E. PARK의 영향으로 도시연구에 더 흥미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쿠쉬, 2006: 29). 인류학자 양칭메이 杨清媚 는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고 본다. 페이샤오통의 향촌연구는 량슈밍과 다른 노선을 걸은 것 뿐이다. 그중에서도 신사계급이 향촌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고 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향촌 신사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신사계급이 인성人心 (역자 주: 人心 – 전통적인 마음공부/수양의 의미로 새기고, 인성교육으로 번역했다)교육이나, 지역교육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 량슈밍과 달리, 페이샤오통은 기술과 사회 제도의 혁신에 이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량슈밍은 직업은 나뉘어도 인성은 같다고 생각했지만, 페이샤오통은 향신계급과 농민계급이 각각 대표하는 중국 문화의 전통은 동일하지도 않고, 도덕관도 차등이 있다고 봤다. 그러므로, 인성에도 구별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페이샤오통 자신은 향신계급의 도덕적 전통을 견지했지만, 당시에는 중국 역사전통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도덕과 역사 문제의 존재를 인정했으나, 특별히 논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양칭메이杨清媚, 2010: 73-74、84-85, 2015). 여기서 두 지식인의 분기점이 형성된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보건데, 향촌신사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단순히 두 사람의 사상의 차이가 분기하는 것 뿐 아니라, 학자의 사상과 주장이 시대의 형세와 개인이 놓인 처지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어 나가는 것이라는 점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양칭메이가 주의 깊게 본 것은, 만년에 페이샤오통이 (실은 사회적 조건이 그의 발언을 다시 허락한 시점) 이러한 제도가 지식인 자신이 안심입명을 추구한다는 점, 문화정신이 의지할 곳이 없다는 점을 소홀히 하게 했다는 것을 인정한 점이다. 그는 나중에 정신세계 연구를 통해서, 실은 다시 량슈밍의 문제의식으로 회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제와 내용상의 제한으로 이를 더 깊이 다루지는 못했다 (양칭메이, 2015).

 

2. “사회는 매우 다양하고 섬세하며 미묘한 조직이다, 고수들의 서툰 실험을 견디지 못할 수 있다 ”

개괄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페이샤오통은 초기에 량슈밍의 향촌건설 운동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페이샤오통은 회고한다: “학창시절에 그의 책을 읽었지만,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페이샤오통, 2009/2003b: 487) 이 말은 그가 량슈밍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이샤오통의 초기 저작에서 명확하게 이를 읽어낼 수 있다. 1933년 11월 페이샤오통은 <<베이핑천빠오 北平晨报 >>(역자주: 민국시절, 1916년 창간된, 베이징에서 발행되던 영향력이 컸던 조간신문) 에 실린 <<사회변천연구중 도시와 향촌>>이라는 글을 통해서, 명확하게 지적한다: “지금 국내에는 ‘중국 문제’는 향촌의 문제라는 의식이 있다. 만일 소위 ‘중국문제’가 중국사회의 변천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사회연구의 관점에서 보건데, 나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는 중국사회의 변천을 이야기할 때 도시와 향촌이 최소한 동일한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도시연구를 논외로 하면, 향촌의 변천을 이해하기도 힘들어진다. 향촌사회의 변천은 항상 도시에 그 근본원인이 있다. 우리는 향촌사회의 변천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자연히 그 출발점인 도시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페이샤오통, 2009/1933b: 123-127).

분명히, 이 발언은 다소간 량슈밍의 향촌건설의 관점에 대한 평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을 발표하기 석달전, 페이샤오통은 임시로 참여하고 있던 산동성 조우핑의 향촌건설 프로젝트를 떠나, 칭화대학의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향촌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가운데, 그는 자연스럽게 량슈밍의 글과 강연을 접하면서, 그 기본 주장을 이해했다. 1929년에 완성된 <<허난河南마을자치학원취지문>>안에서, 량슈밍은 최초로 공개적으로 체계적인 향촌건설 사상을 논했고, 다시 다른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중국사회속의 마을은 하나의 사회이다. 중국사회를 이해하려 한다면, 30만개의 마을을 이해해야 하는가?” (량슈밍, 2005/1929b: 911)

일년후, 산동향촌건설연구원이 설립되고, <<산동향촌건설연구원 설립취지와 방법개요>>에서, 량슈밍은 다시 밝힌다: “중국은 원래 거대한 하나의 농업사회이다. 중국내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지역은 향촌이다. 도시가 있다고 해도 (읍면지역, 소도시 같은), 사실 대다수는 조금 큰 향촌이라고 볼 수 있다. 진짜 도시는 매우 적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의 건설문제는 ‘향촌건설’이라고 볼 수 있다” (량슈밍, 2005/1930a: 222)

산둥에서 보낸 6년의 향촌건설 작업중, 량슈밍은 많은 강연을 행했고, 이러한 관점을 반복적으로 드러냈다. 이를테면, 그는 1934년 1월3-6일 진행한 <<자술 自述 >>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주장하는 향촌건설은 사실 중국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 단지 향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무엇을 건설하겠다는 것인가 ? 중국사회의 새로운 조직 구조이다” (량슈밍, 2005/1934a: 31). 1934년 10월10일 제2차 전국향촌업무토론회상의 발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소위 사면팔방에서 온 향촌운동가들이 보건데, 현재 중국의 문제는 원래 향촌의 문제이고 —시간이 흐를 수록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향촌문제라는 것을 알 수있다. 중국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향촌에서 찾아야 한다 — 시간이 흐를수록 이 길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전국을 들어, 상하와 동서남북 사방의 문제를 살펴보면 결국 이곳으로 시선이 집중되게 된다” (량슈밍, 2005/1934b: 5780). 그의 저서인 <<향촌건설이론>>에서는 재차 강조하기를: “ 향촌건설운동을 실행하면서, 중국 전체 문제를 들여다 보지 않으면, 향촌문제도 명확하게 볼 수 없다. 그런 향촌운동은 별다른 효과가 없다. 반드시 오늘날 매일매일 진행되는 중국 전체사회의 붕괴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대세속에서 이 문제는 명백히 하나의 읍, 하나의 면 혹은 한방면을 들여다 보면서,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향촌건설은 향촌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중국 사회의 건설이며, 일종의 건국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량슈밍, 2005/1937a: 161).

젊은 페이샤오통은 두가지 측면에서 량슈밍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첫째, 중국의 문제를 단순히 향촌 문제로 귀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두번째로, 향촌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에도 반대했다. 사회변천속에서, 도시와 향촌이 모두 중요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주로 향촌의 형성에 대해 주목하게 된 시절과 비교할 때, 당시 23세의 페이샤오통은 명백히 미국의 사회학자 파크의 영향을 더 깊이 받았다. 그로부터 일년전 가을, 겨울, 파크는 옌칭燕京대학에서 강연을 했고, 학생들이 당시의 베이징을 일종의 사회학 실험실로 여기도록 고무했다. 그리고 직접 학생들을 이끌고 베이징의 거리로, 감옥, 빈민굴, 사창가로 나아가 실제 관찰을 하도록 했다 (아쿠쉬, 2006: 25, 30). 이렇게 참을성 있게 경험하고 관찰시킨 결과로, 페이샤오통의 <<사회변천연구중 도시와 향촌>>이라는 글의 제목에서도 그리고 ‘사회변천연구중’, ‘ 사회연구의 관점으로 볼 때’라고 표현한 곳에서도,  페이샤오통이 그가 학문분과연구의 의의상 앞서 언급한 량슈밍에 대한 비판을 제시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건데, 페이샤오통의 비평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다소간 표피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고, 량슈밍의 주장과는 다른 층위에 있어 잘 매칭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량슈밍이 오랜 기간의 실천과 사유를 거쳐 수립한 향촌건설 이론과 그 배경이 되는, 복잡하고 반복해서 굴절되는, 이론수립의 경로와 체계에 대해서, 페이샤오통은, 자신도 인정한 것처럼, 량슈밍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만일 앞서 소개한 표현이 여전히 량슈밍의 관점에 대해 모호하게 의견의 차이를 드러내는 정도라면, 같은 글의 다른 부분에서는 직설적으로 과감하게 비판하고, 나아가 질문을 던진다: “현재 중국에서 사회연구측면에서, 가장 재미있는 문제는, 농민이 향촌운동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선전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런 저런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한번도 그에 대한 농민의 피드백을 다룬 충실한 보고서는 본 적이 없다. 향촌건설운동은 조우핑, 띵현에 이미 새로운 생활방식을 소개했지만, 우리는 생활형태가 변화한 농민이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하기 그지 없다. 이러한 이해에 기반하여, 우리는 향촌운동의 전망에 대해 예측이 가능한 것이다” (페이샤오통, 2009/1933b: 131). 하나의 사회운동, 제도와 정책이 합리적인지 혹은 효과가 있는지 판정하기 위해서, 기층민중의 인지와 반응, 그리고 수용정도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1934년 누님인 페이따셩의 이름으로 <<대공보大公报>>에 발표한 글에서 이미 기능주의자가 된 페이샤오통은 더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왜냐하면 민중의 반응과 수용 정도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연구와 사회지식의 지지를 잃게 된다. 향촌건설내부를 포함해서, 많은 사회운동과 사회실험은 일종의 ‘선수’들의 실험이기 때문에, ‘건설’이라는 구호하에 그 효과는 왕왕 그 반대로 나타나며, 향촌사회를 파괴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현재 실행하고 있는 농촌의 사업은 한편으로는 ‘건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파괴’로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사회지식은 결함이 많고, 좋지 않은 부작용을 불러올 뿐 아니라, 건설사업 본체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사회는 다양하고 섬세,미묘한 조직이어서, 고수들의 서투른 실험을 허용하지 않는다.  … 사회는 일종의 유기체로서, 만일 변화의 시대의 실조현상과 고통을 감소시켜야 한다면, 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 실험하고 논의하는 농촌건설의 많은 실험지역에서, 원래 사회의 유기성을 파괴하고, 파국을 초래하고 있는데, 정리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지금 전체 중국이 그런 상황아닌가?” (페이샤오통, 2009/1934: 257-258). 1936년 출판된<<화란야오花篮瑶사회조직>>(역자주: 화란야오花篮瑶는 중국 광시广西지역의 소수민족) 에서 후기에, 페이샤오통은 다시 비슷한 관점을 드러낸다: “ 우리는 문화조직안에서 각 부분들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균형과 조화의 상태를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조합안의 각부분은 홀로 가치를 갖지 않는다. 이 조합안에서만 그 기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문화의 어떤 부분도 비판을 해야 한다면, 부득불 우선 이 네트워크를 정리해야 한다. 그들이 가진 모든 상대적 기능을  제대로 인식하고 나서야 핵심을 이해할 수 있다…… 현재 모든 종류의 사회운동은 솔직히 말하자면, 모두 쪼개어져 있다. 예전의 조합은 상황의 변천에 따라서 해산 후 재조합이 필요하긴 한데, 해산의 목적은 다시 조합하기 위한 것이므로 다시 모았을 때만, 옳은 정책이된다. 그래서 해산했을 때, 자연히 모든 부분이 전체 구조안에서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지 살펴 봐야 하고, 어떤 부분이 다시 조합이 가능한지 주의해야 한다 (페이샤오통, 2009/1988d: 431-432).

페이샤오통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제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봤고, 중국 사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중국 건설의 전제라고 봤다. 그러니까, 페이샤오통은 향촌건설파의 사회개조노력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단지, 과학적으로 사회의 병증을 인식하기 전에, 서둘러 개조작업에 뛰어들어서는 안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페이샤오통은 자신의 의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현재 사회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중국사회의 구조를 상세히 파악하고, 그 움직임의 유기성을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면 향촌건설사업에 참여하는 이들이 제대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페이샤오통, 2009/1934: 258). 그의 박사논문을 기초로 출간된 중국 농민의 생활 Peasant Life in China(《장춘경제江村经济》)라는 저서에서 그는 재차 강조한다. 중국 향촌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과정은 “ 정확하게 현재의 사실에 근거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리고 나서 이러한 변화가 우리가 희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회과학의 기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은 갈수록 절박하게 이런 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 국가는 다시금 실책을 저지르고, 재화와 능력을 낭비할 만한 여유가 없다“ (페이샤오통, 2009/1939: 69-71). 사회개조를 추진하기 전에, 우선 사회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과학 연구자의 기대이자, 사명이다. 페이샤오통은 견실하게 ‘학구파’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중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연구에 임했다. 문제는 어떻게 사회연구를 진행할 때, 사실에 근거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사회지식의 결핍’을 보충해서 ‘건설사업에 참고’하도록 할 것이냐, 그래서 사회과학의 기능을 실현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이다.

당시에, 일군의 선배 학자들의 선도적 노력과 실천을 통해서, 사회조사 필드연구의 중요성은 이미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사회학이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 초기에, 기독교 계열의 대학에서 외국 국적의 교수들이 필드기반 사회조사의 진행을 주도했다. 타오멍허陶孟和、 리징한李景汉, 등이 대표하는 중국 최초의 사회학자 그룹은 이를 계승하여, 사회조사를 통해 중국사회문제를 탐구하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사회조사운동을 창도해서 활발히 이끌어 나갔다.  (옌밍阎明, 2004: 17-75). 이러한 조사는 대체적으로 정량적이었고, 예를 들자면, 타오멍허의 베이핑생활비조사 (1930), 리징한의 띵현 사회현황조사 (1933), 푸카이卜凯의 농장경제 조사(1930), 판광딴潘光旦의 가정문제 조사 (1928), 옌징야오严景耀의 범죄문제 조사 (19238-1934),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향촌건설의 선구자들은 이런 사회조사의 중요성에 동의하고 있었다. 옌양추는 <<띵현의 사회현황조사>>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교육사업과 사회건설은 반드시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실에 근거한 실제적 방안”이 만들어 진다” (옌양추, 2014/1933: 81). 1934년에 제2차전국 향촌사업토론회에서, 그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농촌건설의 사업은 반드시 구체적 방안이 있어야 한다. 구체적 방안은 반드시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사실에 근거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체계적이고 정확한 조사가 요구된다”. 량슈밍은 1929년초에 옌양추와 평민교육회의 띵현 사업을 둘러보고 평민교육회의 주요 세개 사업인 (문예교육 사회조사, 농업개량)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리징한이 주도한 사회조사 사업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평민교육회가 행하는 사회조사부가, 나는 가장 가치가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평민교육회의 성과는 리징한 선생이 농촌에 직접 내려가서 사회조사를 한 공덕을 크게 입었다 ” (량슈밍, 2005/1929a: 891).

스승인 우원자오의 영향으로 페이샤오통은 이와 같은 사회조사에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러한 서베이survey식 정량조사가 어떤 방면에서는 유용하지만, 깊이있게 사회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는, 결함도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그의 스승은 ‘사회학 중국화’라는 깃발아래 새로운 필드조사 연구방법 – 기능주의 사회연구법-을 만들어 나갔다. 우원자오는 1920년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사회학의 미국화 과정을 경험하며 (우원자오가 재학한 컬럼비아 대학 사회학과 학과장인 기든스는 미국식 사회학의  창시자중 한명이다). 이에 영향을 받아, 귀국후 사회학의 중국화를 주장하고 추진하게 된다 (우원자오, 1982). 그가 시작한 사구연구는 바로 사회학 중국화의 첫 주요사업이었다. 사회학 중국화의 초보적 작업은 중국 사회의 팩트를 충실하게 사회학안으로 들이는 것이었다. 당시 학계에 출현한 두가지 경향은, 하나는 중국에 이미 존재하는 서지자료를 이용하는 것, 특히 역사자료를 서구사회학 이론틀로 분석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영미사회학의 사회조사방법에 맞게 중국사회를 묘사하고 논하는 것이었다. 우원자오는 이 두가지 방법에 대해서 회의적이었고, 이런 식으로는 충분히 중국사회의 실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옌칭대학에 와서 강의하는 파크 교수의 영향을 받아, 사회조사와 사회학 조사를 분리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학이론과 사회인류학 방법을 결합시켜서, 중국에 대한 사구연구를 진행할것을 주장했다 (우원자오, 1982; 페이샤오통, 2009/1995c: 184-185).

페이샤오통은 우원자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이러한 조사방법이 중국사회에 가장 이상적이고 적합한 연구방식이라고 인정했다. 사구연구법을 제창한 것은 페이샤오통과 그 동료들의 주요한 공헌이고, 그들의 작업은 심지어 사회학인류학안에 옌칭학파를 형성한 것으로 간주된다.

바로 기능주의의 사구연구방법을 이용하여  페이샤오통은 향촌경제구조의 특별한 지점을 발견했고, 향촌공업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기본 주장을 펼치게 됐다. 두 사람의 연구 경로를 비교해 보건데, 량슈밍이 주로 정치와 문화 방면에서 향촌이 쇠락하는 것에 착목했다면, 페이샤오통은 농민의 경제생활과 빈곤에 보다 주의를 기울였다. 1935년 장춘에서 목격한, 기아선상에 가깝게 놓인 농민의 모습이 페이샤오통에게 다음과 같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중국농촌의 진정한 문제는 기아이다” (페이샤오통, 2009/1939: 264). 왜 농민들은 기본 생존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가 ? 중국 강남江南과 서남西南지역의 몇개 마을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페이샤오통은 깨달았다, 중국 전통 경제구조는 사실은 순수한 농업경제가 아니라 일종의 ‘농공혼합식 향촌경제’였다. 그는 말한다: “ 중국은 한번도 순수한 농업국가였던 적이 없다. 오히려 늘 상당한 수준의 공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통 공업은 도시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향촌마을에 분산되어있었다. 그러므로 향토공업…. 향토공업은 노동력의 효율적인 이용측면에서 그리고 농업과 공업의 조합 자체에 의해서 농공혼합형태의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농공혼합식 향토경제만이 당초의 토지분배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전통적 지주계급은 딱 생산량 절반의 지대를 받고도, 농민의 저항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근대이래 서구의 공업이 시장에 침투해 들어오면서, 향토공업은 경쟁에 뒤쳐지고 결국 붕괴됐다. 지역 제조업 시장이 서방의 물산에 의해서 점거당하고, 서양 물품을 구매할  소비여력을 갖춘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지역생산물을 만들던 무수한 향촌 장인들의 실업을 초래했다. 향토공업의 붕괴가 격화되면서 “전통경제안에 잠복돼 있던 토지문제가 불거져나왔다”, 결국 살 길이 없는 농민들이 지주와 지대징수자에 대한 원한을 품고 반항을 하게 됐다. “중국의 조전租佃(지주-소작농)제도는 직접적인 토지생산 잉여뿐 아니라, 농민이 겸직하는 향촌공업의 간접적 생산을 합친 토대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향토공업의 붕괴는 실제적으로 중국 지대경제의 기초를 무너뜨리게 된다” (페이샤오통, 2009/1947a: 67-71). 두사람은, 착목한 지점이 다르고, 발견한 문제도 다르고, 대처방안도 달랐다. 량슈밍은 향촌건설에 투신하였고, 페이샤오통은 향촌공업을 회복함으로써, 농민수입을 증가시키고, 농민의 생계를 개선시켜서, 향토를 재건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중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긴박하고 필수적인 것은 토지개혁, 조세감면, 토지균분이지만 토지문제의 해결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 농민은 농사만으로는 최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없었다. 중국의 토지문제의 최종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방법은 향토공업을 재건하는 것이었고, 전통에 기반해 낙후된 농촌의 수공업을, 향토에 기반한 현대공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향촌공업의 개조는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말했다: “최종적으로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농민의 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수입을 증가” 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농촌기업을 회복시키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조치라고 제안한다. (페이샤오통, 2009/1939: 266). 이후 수십년간, “지재부민 志在富民” (페이샤오통, 2009/1991, 역자주: 2004년 출간된 페이샤오통의 저작 제목)이라는 학문 목표를 견지하며, 페이샤오통은 부지런히 강남의 마을에서 윈난성의 세 마을에 이르기까지, 마을에서 읍면지역 그리고 더 넓은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향촌의 공업, 토지문제, 향신계급의 역할, 과학기술의 농촌도입, 향촌조직 등의 다양한 방면에서 향촌건설파와는 상이한 기본인식과 판단을 형성해나갔다.

1947년 일본사회학연보에 실린 <<중국사회학의 성장>>이라는 한편의 논문에서 페이샤오통은 다시 향촌건설 실험지역들이, 현장에 기반한 사회연구작업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가운데, 자신이 이끄는 윈난대학-옌칭대학 사회학 연구실을 포함한 연구기관과 연구원들이 진행한 사구연구작업의 의의에 대해서 리뷰하고 평가했다. 그는 지적하기를 이러한 사구연구의  필드조사는 서방에서 전래한 과학적 방법과 이미 존재하는 사회학 이론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중국사회의 현실생활에 대한 관찰과 분석이 진행되어 진일보한 해석을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제안된 해석은 관찰범위의 제한때문에, 아마 부분적이고 단편적이며, 심지어 오류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건은 이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증가능한 현실생활속에서 개연성있는 해석을 도출하는 것, 그리고 중국사회에 대해서 흥미로운 부분을 인지하고 연구의 기초를 지속해서 다져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인류의 보편적인 과학방법상의 수준만으로 평가하자면 아주 큰 공헌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사회학 발전상의 의의로 평가하면 한걸음 더 나아가는 중요한 진전이다” (페이샤오통, 2009/1947b: 418).

 

3. ‘기능주의 인류학자’와 ‘최후의 신사계급’

페이샤오통은 줄곧 향촌건설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동료들의 영향때문이다. 파크 교수외에도, 페이샤오통의 회고에 의하면, 우원자오와 양카이따오杨开道는 옌칭대학시절 가장 많이 접촉한 사람들이고,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명의 스승이다. 두 사람은 모두 량슈밍 등 향촌건설파의 주장에 대해서 이견을 가지고 있었다 (페이샤오통, 2009/1988c: 58-60).

우원자오는 그의 저작에서 영국의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의 기능방법을 설명하면서, ‘문화의 삼분법’이 학계의 통상분류법이라고  언급하며 량슈밍의 문화관에 대해서 비판한다. 그는 량슈밍이 비록 정확하게 인류문화의 정신생활, 사회생활과 물질생활의 세 영역을 다 다루지만, 가치관에 따라서, 서열을 역전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치관이 아닌 사실의 관점이 기준이 된다면, 물질생활을 전면에 두고, 정신생활을 후순위로 두는 것이 옳다. 우원자오가 보기에, 사회과학의 연구방식은 경험에서 추상의 순서로 진행돼야 하고, 정신은 삼자중 가장 객관성과 구체성을 결여한 것이기 때문에, 물질과 사회생활에 우선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우원자오, 2010: 277;  양칭메이, 2010: 85-86).

근대중국 최초의 농촌사회학자중 한명으로서, 옌칭대칭 칭허清河향촌건설심험구에 관여한 양카이따오의 주장은 페이샤오통을 포함한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페이샤오통, 2009/1988c: 60). 두사람 모두 당시 향촌건설의 중요한 선구자이자 실천자였지만, 양카이따오와 량슈밍은 중요한 지점에서 관점의 차이를 갖고 논쟁에 임했다. 이를테면, 량슈밍은 1929년 봄 국내 몇 곳의 주요한 향촌건설 실험구를 돌아본 후에, 그 해 6월에 월간 <<마을자치 村治 >>에 <<북방견학관찰기 北游所见记略 >>를 싣고, 관찰한 모든 향촌건설방안에 대해서 불만족을 표시한다 (량슈밍, 2005/1929a: 901-908). 양카이따오는 그해 10월 국립중앙대학농학원이 발간하는 <<농업주보 农业周报>>잡지에 발표한 글에서 이의를 제기한다 (양카이따오, 1929).

두번째 원인은 페이샤오통이 받아들인 전체적이고 시스템적인 기능주의적  사회인류학 학과부문의 훈련때문이다. 만년에 페이샤오통은 스스로를 ‘학술영역의 한마리 야생마’라고 칭했다. “나는 특정 학술영역의 경계에 갇히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난입했다” 라며 특정학과에 속박되지 않고 싶어하는 뜻을 표명했다 (费孝通, 2009/1990: 346, 2009/1995a: 25, 2009/1996: 280). 사실상, 페이샤오통은 다양한 영역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능주의적 인류학 훈련이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훈련은 그의 문제 영역, 문제제기 방식과 해결 방식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페이샤오통 자신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일찍이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인류학 기능주의의 대가인 말리노프스키에게 사사하기 전에 30년대 초에 옌칭대학과 칭화에서 공부하며, 주요한 관점과 연구방법이 이미 형성되어서, 그는 한명의 기능주의자가 돼 있었다. 런던에서의 학업은 단지 기능주의관점을 더 성숙시켰을 뿐이다 (페이샤오통, 2009/1987b: 393、433). 페이샤오통은 그의 첫번째 학술 논문에서 기능학파와 필드조사에 대한 찬양을 강조하는 것에 더불어, 대부분 말리노프스키의 연구를 인용한다 (페이샤오통, 2009/1933a). 칭화연구원에서 러시아 인류학자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Sergei Mikhailovich Shirokogorov의 지도로 체질인류학연구에 종사하면서 (체질유형측량) 그의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페이샤오통, 1987b: 393).

그의 제1부 저작인 <<화란야오花篮瑶사회조직>>은 기능주의적 사구연구방법의 일종의 실험을 채용한 것이다. 페이샤오통은 두번째 판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청년시절, 사별한 부인과 협력해서 만든 연구성과를 발표하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게 되는데, 다시 읽어 보면, 그 이후에 발표한 수많은 학술관점의 뿌리와 싹을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페이샤오통, 2009/1988d: 452). 페이샤오통이 나중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말리노프스키의 제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닌,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페이샤오통은 그러므로 혜안을 얻어, 향촌공업이라는 키워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리고 전통토지점유제를 기초로 하는 가정의 부업, 즉 수공업이 가정경제에 끼치는 중요성을 의식했다. 주요하게는 기능주의적 사구연구를 활용하는, 이런 방법은 사회제도상 사회기능의 고찰을 중시했다. 사회제도와 사회시스템 각 방면의 조합은 그가 ‘중국 농민의 소비, 생산, 분배와 거래 등의 체계’ 에 대해서 관찰하고 기술하는 가운데, 농민생계가 농업과 향촌공업에 함께 의존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장춘江村에서 부재지주토지제도가 향촌수공업의 쇠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춘의 자료를 분석하면서, 토지문제는 독립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지역의 토지제도의 형태는 실은 전체 경제가 처한 한 측면의 표현이다. 만일 장춘에서 대부분 농민이 토지를 임대해서 경작하는 현상을 해석하려면, 우리는 이 지역의 수공업 붕괴 사실을 도외시 할 수 없다” (페이샤오통, 2009/1945: 2).

이렇게, 기능주의적 관점으로, 그는 스스로의 해석논리를 만들었다: 서방의 현대 상공업 침투 => 농촌가정의 수공업 쇠락과 붕괴 => 농업과 가정 수공업 조합의 농촌 전통경제구조가 받은 충격 => 농민들의 토지 저당에 의한 대출 => 대출금 상환 불능, 토지 매도 =>부재지주와 임대농 급증 => 농업만으로 생계 유지 불가, 농민 생계 문제가 직면한 곤경 => 토지문제의 심각성 돌출, 사회갈등 격화.

세번째 원인은 페이샤오통의 향신계급 출신배경이다. 페이샤오통은 쟝쑤성 남부의 신사계급 가정 출신이다. 조부와 외조부 모두 같은 지역의 명망 높은 지식인이었다; 아버지 페이푸안费璞安은 일찌감치 일본에 유학을 갖다 와서, 귀국후 고향의 교육사업에 오랜 기간 참여해 왔고, 어머니 양런란杨纫兰은 상하이 우뻔여학교务本女学 (역자주: 중국인이 설립한 최초의 신식여성교육기관)출신이었기에, 고향에서 지역의 첫 신식학교를 설립했다: 누님인 페이따셩과 남편인 정피쟝郑辟疆은 일평생 고향에서 농민의 잠사기술을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외에도 청조말에 장원급제하여, 기업과 교육을 ‘부강한 나라의 근본 富强之大本’라고 주장한 개량파 장자이张謇와 페이샤오통 집안의 교류는 각별한 것이었다. 1909년 1월 장자이는 페이푸안을 자신의 고향인 난통南通에 설립한 통저우通州 민립사범학교로 초청해 교편을 맡겼으며, 양가의 우정과 난통에서의 교사 경력을 기념하기 위해서, 페이푸안은 1910년에 출생한 막내아들의 이름을 페이샤오통’이라고 지었다 (장자이의 다음 세대는 돌림자가 ‘샤오孝’였다). 페이샤오통에게 있어 향신계급 가정의 배경은 평생 영향을 끼쳤고, 그 자신 시종일관 스스로를 한명의 신사라고 여겼다 (장꽌셩张冠生, 2000: 21).  그의 말년에, 영국의 한 교수가 그를 방문했을 때, 그가 속한 사회계급을 물어보자, 페이샤오통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는 신사지요, 변할 수 없어요!” (왕밍밍王铭铭, 2005)

신사의 계급적 배경은 젊은 페이샤오통이 자강운동에서 시작된 향촌개량파에 대해서 매우 호감을 갖는 반면, 향촌건설파의 사업에는 거리감을 두게 했다.

페이따셩의 작업은 주로 기술과 조직에 집중됐고, 량슈밍이 한마디로 정리하는 향촌건설은 ‘과학기술단체조직’이다. 따지고 보면,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왜 페이샤오통은 자신의 누님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량슈밍의 향촌건설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판적이었을까 ? 감정적인 면을 제외하고,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페이따셩의 신사신분과 그가 대표하는 향촌개량전통에 있다. 페이샤오통이 보기에 그의 누님인 페이따셩과 그 남편인 정피쟝은 모두 ‘비단의 고장의 자식’들이었고, 훌륭한 교육을 받고나서 “우선 생각한 것은, 자기들만 낙후된 고향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남아 낙후된 고향을 바꿔 나가려는 뜻을 품은 것이었다” (페이샤오통, 2009/1988b: 67).

페이따셩이 자기 고향의 신사신분으로 향촌사업에 뛰어든 것과 달리, 량슈밍은 상대적으로 향촌 밖에서 온 외지인이었다. 량슈밍 자신이 기술한대로, “나는 베이징에서 나고 자랐을 뿐 아니라, 선대 모두 베이징에서 생활해왔다. 완전한 도시 사람으로서, 향촌생활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날 향촌사업에 종사하고, 향촌건설운동을 창도하고 있다. 한명의 비향촌인으로서 향촌사업을 하고 있다” (량슈밍, 2005/1934a: 31).

누님인 페이따셩은 페이샤오통에게 평생 특수한 영향을 준다.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난 모친을 대신하여 페이샤오통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치도록 했고, 그녀가 고향의 잠사개혁실험을 진행한 것은 결국  페이샤오통의 학술사업의 출발점이 됐다. 우장吴江은  역사적으로 잠사직조로 명성이 드높았으나, 근대이후 국제시장의 영향으로, 잠사업이 쇠락기에 접어들고, 민중의 생계는 곤란을 겪게 된다.

페이따셩은 이 때문에 중국의 잠사사업 진흥에 진력하게 되고, 고향에서 잠사개혁실험을 하여 농민들의 양잠과 비단 제조를 돕는다. 그녀는 카이시엔꿍开弦弓마을에서 생사의 제조와 판매를 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자연스럽게 페이샤오통은 자신의 고향에서 진행된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류학 필드연구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장꽌셩, 2000: 46-47). 페이샤오통은 바로 카이시엔꿍마을에서 처음으로 ‘기아에 가까운 상황에 처한’ 농민들의 빈곤문제를 관찰하고, ‘농공이 혼합된’ 전통 경제구조를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페이샤오통의 이론속에서, 향토경제는 세계시장 체제와 만나게 되며, 그는 중국사회를 글로벌경제의 맥락속에서 살피게 된다 (이것은 량슈밍이 고려하지 못한 지점으로, 글로벌시장은 량슈밍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이것은 그의 누님인 페이따셩에게 공이 돌아가야 한다. 페이샤오통은: “나는 늘 누님이 나보다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잡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만일 우리가 종사한 사업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나는 확실히, 누님의 뒤에 붙어 겨우겨우 좇아간 한 평생이었다 (페이샤오통, 2009/1988b: 70).

 

4. ‘반추反思’와 ‘보완을 위한 학습’

이상 페이샤오통의 향촌건설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논했고, 이는 1949년 이전의 이야기이다. 시대가 변했고, 사정도 많이 변했다. 확실히 페이샤오통이 말한 것처럼, 초기에 량슈밍의 저작을 그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량슈밍의 영향도 별로 받지 않았다. 그런데, 1949년 이후 수십년간의 고충을 겪은 후에, 만년의 페이샤오통의 인식과 태도는 어찌 되었을까?

‘반우파운동’과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80년대 들어, 뜻밖에 다시 열린 ‘후기학술전성기’ (페이샤오통, 2009/1994: 422-42)에 ‘지재부민 志在富民’에서 말한 것처럼 ‘필드에서, 발로 뛰고 또 뛰는 行行重行行’ 그의 연구의 결과로, 팔순에 이른 페이샤오통의 생각과 저작에 현저한 변화가 생겨났다. 그는 자신의 인생경력과 연구사업을 리뷰하고 회고하는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였다. 그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외국의 친구들에게 기념 토론회상에서 그는 말한다: “팔십세는 연령상의 한계선이다. 이선을 넘어서면, 사람은 마음이 가벼워지고 자유로와진다. 남은 시간에는 이미 일생을 통해서 지은, 공과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평정심을 갖고 과거의 인생을 통해 걸어온 발자취를 반추할 수 있다” (페이샤오통, 2009/1990: 340).

이렇게 되돌아본 첫 성과가 96년에 출간된 <<학술자술과 반추>>이다. 이 책은 작자가 수년간 완성한 십수편의 학술회고와 반추의 논문이 실려 있다. 그중에는 93년에 나온 ‘양안삼지两岸三地중국문화와 현대화연구회’ (역자주:양안삼지는 중국대륙과 대만, 홍콩, 마카우를 일컫는다)상에서 발표된 <<개인, 그룹, 사회—일생학술여정의 반추>>라는 학술강연이 포함돼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내가 새롭게 개척한 새로운 길의 글쓰기를 위해서, 나의 사상을 스스로 전환해 나간 방식에 대한 자기반성이다” (페이샤오통, 2009/1996: 112)라고 설명하며, 자신이 과거 수십년간 해온 연구와 작업에 대해서 깊이 있게 평한다. 그는: “최근 박수갈채를 받으며, 때때로 학술영역에서 걸어 온 길, 우여곡절들을 되돌아 보고 있다: 여기에는 남긴 자취들, 우회하고 돌아온 것들, 궤적들, 착오와 실수들, 깨달음들이 있다” (페이샤오통, 2009/1993a: 217).

그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

그가 의식한 장기간의 사구연구의 주요한 결점은: “사회(구조와 제도)만을 보고 사람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를 보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사회를 성인 그룹의 생활수단으로 보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사회를 생물군체보다 한층 수준 높은 실체로 보는 것이다. 페이샤오통은 첫번째 관점으로 사회학에 입문했다. 하지만 야오샨瑶山과 카이시엔꿍에서 필드조사를 한 후에 특히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켐의 작품을 접한 후, 점차 두번째 관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러한 학술적 경향이 “사회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그의 ‘학술생애 전반부의 종결’에 해당하는 <<생육제도>>라는 저서이다).

구체적으로 커뮤니티연구 경험에서, 과거의 연구는 농민의 물질적 ‘의식衣食’문제만을 보고, 정신적 ‘영욕’의 문제를 무시했다; 사회의 변화만을 주목하고, 이에 상응하는 사람의 변화에는 무심했다. 전자는 사회의 생태층위에 해당되고, 후자는 사회의 심리상태층위에 해당된다 (페이샤오통, 2009/1992a, 1992b, 1993a, 1993b). <<작은 도시 큰 문제>>에서는 십주년기념 좌담회상에서, 페이샤오통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의 과거 사회학관련연구에서 최대의 결점은 사회를 보되 사람을 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사회구조에 대해 적지 않게 묘사했지만, 사람들의 오랜 습속에 의해 만들어진 준수해야만 하는 행위규범, 예를 들면 ‘군신부자의 예 君君臣臣父父子子’와 같은 것들을 개개인이 생활속에서 어떻게 행하는지 설명한 적이 없다. 인간의 생활안에는 슬픔과 기쁨, 애환, 희망과 참회 등 풍부한 내용이 있고, 이런 생활내용을 다루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모두 각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내 결점은 사회생활의 공통속성만을 다루고, 사회속 생활인의 개성을 보지 않은 것이다. 악보만 그리고, 음악을 듣지 않는다거나, 각본만 보고 무대상의 실제 배우의 다채로운 연기를 보지 않은 것과 같다 (페이샤오통, 2009/1995b: 33-34).

페이샤오통이 사구연구의 시야를 생태층에서 심리와 마음의 층으로 옮겨간 것은 단순히 노년에 이른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한 회고에 의한 것뿐 아니라, 국내와 국제의 경제사회정세의 역사적 변화가 가져온 도전, 그리고 개인의 인생경험속에 겪은 영욕과 부침이 가져온 계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전자로 말할것 같으면, 국내적으로는 수십년에 걸쳐 농민의 빈곤과 같은 기본 문제를 해결했고, 안정되게 소강사회를 향해 전진하고 있으며, 의식주문제를 해결한 후, 다시 영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부유해졌으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와 같은 문제가 제기 되는 것이다 (페이샤오통, 2009/1989: 277; 2009/1992a: 42). 국제적으로 보면, 글로벌라이제이션은 날이 갈수록 심화하고, 서로 다른 그룹과 집단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공생공멸의 상황에 처해있는데도, 심리적, 관념적인 장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문화와 문명간 공존문제의 해결이 절박하다 (페이샤오통, 2009/1992a: 42-43).

후자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는 생애 전반기에 있어, 자신이, 사회안에서 주어진 역할에 맞게 일했기에, 주저할 필요가 없고, 마음의 갈등도 없고, 자신과 사회가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해방후 일정한 기간을 거치며, 사회구조내에서 발생한 혁명적 변화, 사회역할의 행동모델이 거대한 변동을 가져왔고, 가장 극단적인 사례인 ‘문화혁명’의 격동기 속에, 교수가 학생들에 의해서 거리를 쓸고, 화장실을 청소하며, 거리의 비판투쟁에 끌려 다니도록 강요 받은 사실이 있다. 문화혁명 이전의 교수 역할의 행위규범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사회의 역량과 본래 면목이 충분히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자신이 마치 사회의 본질과 역량의 실험실안에 스스로를 피실험체로 들여 놓은 것과 같이 돼버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직접 이 실체로서의 ‘개인’의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대항하는 것처럼 느꼈고, 이 개인은 표면적으로는 사회가 지정하는 그 행위모델에 따라서 거리와 화장실을 청소하고, 거리에서 비판투쟁에 참여하도록 강요 받지만, 여전히 행위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상과 감정을 가진 자아가 나타난다. 그래서 규정된 행위모델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복잡한 행동반응을 만들어 낸다. 이를테면, 겉으로는 순종하듯이 행동하다가, 자살로써 항거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수한 인생의 경험이 그를 초생물적 사회실체의 거대한 에너지를 이해하게 하고, 동시에 적나라하게 인생물본성의 완강한 표현을 볼 수 있게 했다 (페이샤오통, 2009/1993a: 233-235).

페이샤오통은 스승인 판광딴이 유교의 중용의 도에서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위육이론 位育理论’  (페이샤오통, 2009/1992b: 60, 2009/1993a: 232)을 기억해 냈고, 파크 교수가 일찍기 지적한 사람과 사람의 집체생활중의 이해관계와 도의관계의 두개 층위를 상기했다(페이샤오통, 2009/1993b: 258). 더 일찍 스승들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며, 만일 하늘이 허락해서, 더 오래 산다면, 꼭 이미 이루어 놓은 생태층연구위에 또 하나의 층인 마음에 대한 연구를 행하여, 새로운 길을 열고 싶다고 얘기하고는 했다 (페이샤오통, 2009/1992b: 61).

과거 연구에서 부족했던 점을 보완하기 위해 ,페이샤오통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한편으로 “선생님들이 섰던 자리로 돌아간다”라며 사회학과 인류학을 보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치엔무 读钱穆, 천인커 陈寅恪, 량슈밍 등의 대가를 읽으며, 중국 전통문화를 큰 열정과 정성스런 마음으로 공부했다.

중국의 전통문화는 그의 마음공부연구에 독특한 지혜를 부여했다. 그는 한탄했다: “80세에 이르러서야, 여덟살에 읽었어야 할 책을 보게 됐구나” (장꽌셩, 2000: 626, 2012: 576).

이제 새롭게 길을 내며 소위 ‘문화자각文化自觉’을 내세웠다 (페이샤오통, 2009/1997a, 2009/1997b, 2009/1997c, 2009/1999b, 2009/2000a, 2009/2000b). 페이샤오통은 1997년초에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고, 그후에 계속 이를 보완해나갔다. 문화자각이라함은 일정한 문화속에서 사람이 그 문화에 대해 스스로 알고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으로, 문화의 이력, 형성과정, 특색과 발전을 알게 됨을 일컫는다. 문화자각은 문화회귀, 문화복구 등이 아니고, 완전한 서구화, 완전한 타자화도 아닌 전통과 창조의 결합이다. 그리하여 “各美其美 각자의 미를 발견하고,美人之美 타인의 미를 인정하고,美美与共 서로 미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天下大同 천하 공공의 미를 추구한다”말은 그의 문화자각에 대한 고도의 개괄적 표현이다 (페이샤오통, 2009/1997a: 5-6, 2009/1997b: 22, 2009/1997c: 53, 2009/1999b: 454-455).

회고와 보완을 거쳐서, 페이샤오통은 사구연구가 연구층과 연구범위에 있어서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더 깊이 깨닫게 됐다. 커뮤니티 연구를 이끌고, 실천함에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중국사회에 대한 진짜 이해를 얻게 됐고, 사회학의 중국화 사명을 실현시켰다. 이것은 페이샤오통과 그의 오랜 학문적 동지인 우원자오 그리고 다른 도반들이 중국 사회학과 인류학에 기여한 중대 공헌이다. 1987년 <<윈난의 세 마을>> 중국어판 서문에, 페이샤오통은 사구연구 방법에 대한 깊은 신뢰를 표시한다 (페이샤오통, 1987c: 377、381-382). 90년대에 들어선 이후, 학계의 비판에 대해서 그는 사구연구에 대한 변론을 펼친다 (페이샤오통, 2009/1990: 344-345, 2009/1995d: 226-232, 2009/1996: 257-260). 하지만, 만년의 페이샤오통은 마침내 깨달았다. 사구연구는 공간, 시간, 문화 층위로 볼 때, 결국 경계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말한다: “중국처럼 거대하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데다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는, 미시적 사회학 방법을 통해 연구 조사를 하는 것은 그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다” (페이샤오통, 2009/1996: 264). 2000년이라는 상징적인 해를 맞이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는 현재 전례가 없는, 수 많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대융합이 일어나는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에 돌입했다. 과거에 그런 제한된 영역에서 이루어진 사구연구는 이미 새로운 연구 필요를 만족시킬 수 없다. 오늘날의 위치에 서서 당시의 사구연구과정을 돌아보면, 중국과 같이 역사가 유구한 고대로부터의 문명국가를 연구하기에는 과거의 인류학 민족지 방법은 불충분하다…… 나는 현재, 마을이 중심이 되는 연구가 여러가지 이점이 있긴 하지만, 중국 문명의 거대한 체계와 역사의 흐름 속의 변화를 드러내기엔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페이샤오통, 2009/2000a: 158).

페이샤오통은 학과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하면서, 특히 사회학의 전통적 영역을 넘어서 새로운 길을 열 것을 제안했다. 페이샤오통은 어떤 의미로, 자신이 과거 받아들였던 학문 훈련이 오늘의 그를 형성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게 굴레를 씌웠음도 깨달았다.  과거 학문분과와 연구방법의 경계를 탈피하기 위해서, 그는 사회학 학과의 영역을 넒혀 나갔다. 사회학은 과학일 뿐 아니라 인문학이기도 하다. 제도와 조직뿐 아니라, 문화와 사람의 생각과 마음도 살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사회학은 과학일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의 학문이다. 이러한 인식상의 전환은 량슈밍의 저작에서 섭취한 자양분이다. 그는 말했다: “중국의 사회과학을 세우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중국 문화의 기초를 이해해야 한다…… 필수적으로 국학과 인문과학을 잘 결합시켜서, 문화자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페이샤오통, 2009/1999b: 443-448).

페이샤오통은 량슈밍을 다시 읽고 량슈밍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량슈밍의 초기 저술인 <<동서문화와 그 철학>>이 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문화와 민족정신인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원자오는 량슈밍의 문화삼분법에 대해 비판하기를, 량슈밍이 문화의 정신 부분을 우선한 것은 오류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다시 페이샤오통은 자신의 이론의 주요한 문제점은 문화의 정신부분을 소홀히 한 것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량슈밍의 최후 저술이자 량슈밍이 가장 중시했던 <<마음과 인생人心与人生>>은 페이샤오통 자신이 인식하기에 전반기 자신의 연구에서 부족한 부분, “커뮤니티를 보되 사람을 보지 않은”것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었다. 만년에 페이샤오통은 문화자각을 강조하며, 량슈밍의 중국사회와 문화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 일정 정도 동의하게 됐고, 량슈밍의 향촌건설운동 이론에 대해서도 재인식과 재평가를 하게 됐다.

어떤 글에서는 페이샤오통이 량슈밍의 향촌건설 실험과 자신의 사구연구를 같이 보아, 일생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사회학의 중국화라는 작업의 동일선상에서 보기도 했다 (페이샤오통, 2009/1993b: 247-248). 그가 보기에, 그와 량슈밍은 두가지 점에서 연결이 되는데, 첫째, 커뮤니티에 대한 연구, 그리고 또 하나는 중국 문화에 대한 태도이다. 첫번째는 대체적으로 그의 커뮤니티 연구와 량슈밍의 향촌건설 실천을 연계해서 보았다. 소위 중국 문화에 대한 태도를 말하자면, 그는 다소간 량슈밍의 문화비교를 기초로(동서문화와 그 철학) , 또 향촌건설을 손잡이로 (동서문화와 그 사회) 내포한 전체 이론체계를 잡아서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관점과 주장은 큰 차이가 있지만, 사실 늘 공통점도 존재해왔다. “전체적으로 볼 때, 두 사람 모두 ‘혁명’을 논하는 대신에, 전통의 기초위에서 점진적인 변혁을 추구했다. “말하자면 ‘개량주의’인데, 듣기에는 좋지 않을 수도있다” (페이샤오통, 2009/2003b: 488).

페이샤오통은 만년에 량슈밍에 가까와졌는데, 관심사의 중심축에 변화가 생겨나긴 했지만, 그것이 꼭 량슈밍의 향촌건설 사상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전향을 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량슈밍에 대한 이전의 비판을 완전히 거두어들인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현재 더 넓은 시야로 량슈밍과 자신의 이론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고, 량슈밍에 대한 이해를 깊게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페이샤오통은, 량슈밍이 당시에 향촌건설운동에 종사하면서, 중국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 깊이있게 사고하는 것을 기초로 삼았고, 그래서 그의 중국사회와 문화에 대한 인식의 큰 틀은 매우 깊이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원래 사회학과 인류학의 학문훈련을 통해 나온 것이 아니고 필드 연구를 통해서 얻어낸 것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서구의 과학 학문 훈련과 비교해 보면, 중국의 문화전통과 학술훈련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량슈밍의 사회의 진로에 대한 인식과 페이샤오통이 제창한 사구연구는 차이가 많지만, 각자 가치가 있고, 살펴볼 구석이 있다. 이러한 경로와 방법을 통해 얻어낸 각자의 인식이 있었고, 두사람 모두 사회개조운동을 통해서, 확실한 공적과 효과도 얻어냈고,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사회를 개조하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바로 페이샤오통이 실현하고 싶어한 목표였다.

량슈밍은 재차 천명한다. 자신은 학자가 아니라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그는 단지 진력해서 자신을 곤혹스럽게 만든 인생문제와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고 (2005/1934a: 3、8-9).

페이샤오통은 이렇게, 학문분과에 갇히지 않고 진행된 사고의 가치를 의식했다. “량슈밍의 사상은 영구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모든 학문 분과와, 학설을 포용할 수 있다. 선배들이 노력해서 얻어 낸 결과 속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다시 생각하고, 새로운 학문을 생산해냈다” (페이샤오통, 2009/1987a: 385).

1992년, 82세의 페이샤오통선생은 산둥山东지역을 둘러보고, 특히 조우핑현 성남城南 쪽에 있는 워후산卧虎山에 위치한 량슈밍선생 묘지에 헌화하며 말했다: “량선생이 조우핑에서 보낸 7년간, 향촌건설을 실천하며, 향촌교육에 힘을 쏟고, 과학기술을 보급하고, 농촌경제를 개량해서,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또, “량선생의 묘지는 산중턱에 있어서, 넓고 멀리 조망할 수 있다. 마치 자신의 인품처럼 소박하고 실용적이다. 조우핑의 농민들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인민을 위해 봉사했고, 인민들은 영원히 그를 기념할 것이다” (페이샤오통, 2009/1992a: 41).

 

5. 소결론: ‘각자의 아름다움 各美其美’에서 ‘아름다움의 서로나눔 美美与公’으로

페이샤오통은 초년에 량슈밍의 향촌건설이론이 견실한 연구기초를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만년에 이르러서는 량슈밍을 다시 읽고, 재인식하게 된다. 그 결과로써, 량슈밍의 향촌건설이론에 대한 인식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에서, 타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서로의 아름다움을 나누는 것”으로 진화하게 된다.

량슈밍과 페이샤오통 두사람은 20세기 전반 사회의 형세 및 기본성질에 대한 판단, 중국 전통사회구조에 대한 깊고 상세한 분석적 이해, 그 독특성의 강조, 중국문화의 존속에 대해서 주목한다는 공통점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향촌사회기본문제에 대한 진단과, 그 문제의 치유방법에 대한 탐색, 미래발전 방향에 대해서는 상당한 차이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총체적으로 말하건데, 두 사람은 모두 향촌건설의 실천에 나섰으며, 향촌의 전통을 참고하여 새로운 예속礼俗을 수립할 것을 제창했다. 이중에서도 페이샤오통은 이를 향토중건이라고 칭하며 향촌공업을 회복하여 농민생활을 개선할 것을 주장했다. 비록 인식에 차이가 있고, 주장도 일치하지 않았지만, 각자의 인식과 주장은 사회와 세상의 변화에 조응하는 것이었고, 개인이 처한 상황의 차이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 중국사회의 실제 상황과 전통에서 출발한 것이고,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문제를 분석하여, 해결방안을 모색한 길이었다. 마치 당시 600여개의 사회단체가 각자의 상이한 인식에 따라서, 향촌건설이라는 큰 깃발아래 진행한 ‘따로 또 같이’의 실험과 노력의 양태와 같다. 두사람의 인식과 주장의 차이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향촌사업이 거둔 탁월한 성과와, 또 그들의 서로에 대한 존중과 존경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독립적 사고와, 진리정신을 추구하며, 중국 향촌사회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은,  현재의 중국향촌문제를 깊이있게 인식하고, 유효하게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향촌진흥 전략의 실현을 추진함에 있어 중요한 참고적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중국사회과학이 추구하는 중국화(현지화)의 랜드마크이자 중요한 성과이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의 발전에 대해서도 중요한 계시적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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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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