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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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사고와 화이트헤드 철학

화이트헤드와 생태문명은 내 삶의 심장과 같은 주제이다. 나는 화이트헤드 철학을 만나면서 인생의 무의미함에서 탈출했다. 그의 철학은 근대적 사고를 무조건 규범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내 경험상 근대적 사고는 늘 니힐리즘으로 귀착된다. 무엇이 옳은지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근대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제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통찰이었다.

나는 화이트헤드를 통해 나의 주관적 경험, 목적, 결정, 감정이 완전히 현실이며, 따라서 인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또한 내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은 경험하며, 이는 모든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화이트헤드 철학은 경험의 어떤 특징들을 더욱 확장하면서 이원론을 피해가도록 도와준다. (역주: 흄, 칸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 철학자들은 우리와 세계의 관계가 감각기관, 특히 시각에 의해 중재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대상인 객체의 분리를 낳았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전제를 거부한다. 감각은 우리에게 의식적 지식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우리는 훨씬 근본적인 방식으로 세계의 존재를 느낀다. 화이트헤드는 전자를 현시적 직접성, 후자를 인과적 효과성이라 부르며, 실제 우리 경험을 분석하면 인과적 효과성이 현시적 직접성의 지각을 받쳐준다고 주장했다. 인과적 효과성의 지각은 앞선 사건의 어떤 측면을 새로운 생성의 참여자로 만드는데, 이를 파악이라 명명한다. 생성의 모든 순간은 물리적 극점과 정신적 극점을 동시에 지니기에 물리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라는 이원론을 대체한다.) 경험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내 경험,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의 경험이 갖는 가치를 매우 명백하게 만든다. 경험은 거기에 가치가 더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실”이 아니다. 경험이란 “가치가 더해진 사실”이다. 경험에는 가치가 있고, 그것 자체가 가치일 뿐만 아니라 뒤따르는 경험의 가치를 증가시킬지, 감소시킬지 결정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느끼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중요하며, 차이를 만들어낸다.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은 모든 것이 중요성을 갖는다고 여기며, 그러므로 사방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1969년 나는 갑작스럽게 내가 이전까지 당연시했던 사회구조와 개발 패턴이 인류를 전 세계적인 자기파괴로 이끌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사방에서 인간의 요구에 부응해온 세계의 용량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인간 자신을 포함한 자연을 착취하는 가운데 지속 불가능한 길을 가고 있다.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시대에 이런 사실을 알고, 인간사회를 지속 가능한 길로 돌려놓기 위해 헌신했다. 나는 그들에게 가담했고 지금까지도 그들 중 한 명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지속가능성” 이상의 것이다. 우리가 지속시키고자 하는 것은 건강한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이라고 본다. 우리의 목표를 좀 더 매력적이며 의미 있는 방식으로 명명할 필요가 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세계관을 유기체 철학이라고 불렀다. 그의 핵심적 강조점은 유기체들의 상호연관성이다. 만약 화이트헤드가 생태철학이라는 용어를 알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철학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중국을 통해 나는 내가 희망하는 세계를 ‘생태문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역주: 중국은 2007년 제17차 공산당 당대회에서 생태문명 건설을 주요 국정지표로 처음 제시한다. 필자는 화이트헤드철학을 매개로 중국 학계와 지방정부의 생태문명 논의에 깊이 관여해 왔다.) 세계의 구조 자체가 매우 생태적이고, 근대성이 그런 생태적 특징을 약화시키거나 심지어 파괴해 왔음을 이해하게 됐을 때, 나는 내가 희망하는 세계를 생태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점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은 이 이름을 사용하며, 현재까지 유용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생태문명이라는 개념이 화이트헤드 연구자들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생태학이란 개념은 생물학의 하위분야에서 유래했으며, 자연에서 모든 식물이 다른 식물들, 곤충들, 동물들과 잘 연결됐을 때 잘 자란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대중의 주목을 끌게 됐다. 만약 자연이 건강한 상태이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개별 종의 건강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건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런데 근대 세계는 금전적 잣대를 들고 자연에 접근했다. 그 목적은 단위 면적의 토지에서 가능한 최대의 이윤을 거두는 것이다. 인건비가 내려가면 이윤은 올라간다. 따라서 생태계를 단일경작으로 대체하면 노동의 수요를 줄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생태학자들은 1960년대 후반에 대중의 주목을 끄는 방식으로 경종을 울렸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현대문명이 전체적으로 생태적 고려사항들을 무시하고 문명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했을 때, 이런 문명은 생태적으로 민감한 문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철학 혹은 종교에 헌신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생각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화이트헤드 철학에 대한 흥미가 없더라도 생태문명을 지지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세계에서 철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일은 드물고, 만약 생태문명을 위해 헌신하는데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면 이 운동의 전망은 사실상 매우 암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화이트헤드 철학을 생태문명과 관련이 없는 것, 심지어 방해물로 만드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치중립적 교육의 문제

우리 시대에 대학들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봄으로써 화이트헤드의 생태철학과 생태문명이 갖는 관계에 대한 나의 관점을 설명할 수 있다. 현대 대학에 대해 나는 매우 비판적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생태학을 전공한 대학교수들을 통해 생태위기를 인식하게 됐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겠다. 좀 더 최근에는 기후학 교수들을 통해 기후 위기를 인식하게 됐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대학들은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제공하며, 때때로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이런 정보를 대중과 공유한다.

존 캅 교수 <출처: 중앙일보>

그럼에도 이제 비판적으로 접근하겠다. 오늘날의 대학들은 여러 학과들의 집합으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어떤 특수하고 경계가 분명한 주제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보탠다는 연구 목표에 따라 조직된 것이다. 이런 학과들은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사심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각자의 분야에서 가치를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연구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은 스스로를 가치중립적 연구중심 대학이라고 소개한다.

기후학자들이 나름의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은 인간의 활동이 기후를 부정적인 방향, 심지어 재앙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깊이 좌절했다. 그들은 지구를 인간이 살기에 쾌적한 상태로 만드는 기후에 가치를 매긴다. 나는 다른 학과에서도 이와 비슷한 어떤 가치들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역할은 인정되지 않는다. 학계 분위기는 각 학과들이 건강한 지구에서 건강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방향을 지향하도록 권유하지 않는다. 학계는 중립을 권유한다. 실용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대학의 연구 주제들이 연구자금의 수혜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이다.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영향력 있는 책의 제목이 『당대의 세계를 구해라(Save the World on Your Own Time)』이다. 이 책은 대학 강의실에 가치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설명한다.  교수는 자신이 속한 분야의 지식을 증진시키고, 그것을 학생들과 공유하며,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 분야의 지식을 증진시키는데 참여할 수 있는지 가르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방대한 지식이 부족한 자원의 소모를 가속화하는데 쓰이는 시대에 교수의 역할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그런 염려가 자신들이 공부하는 내용과 방법에 영향을 미치도록 가르치는 것이며, 이것이 세계에 더 큰 이익을 가져온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가치중립적 고등교육은 모든 가치들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인본주의적 가치가 뚜렷했던 인문대학(리버럴 아츠 컬리지)들을 대체했다. 인문학 교수들은 학생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걸 목적으로 삼고, 학생들이 장차 사회의 지도자로서 자신들의 문화적 자산을 활용하도록 가르쳤다. 50년 전에는 많은 학생들이 이런 가치를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더 보수가 높은 직업을 얻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다. 부라는 가치가 중심이 된 것이다. 이것은 사회 전반에서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에 대한 추구가 사회적 가치가 되면 될수록 다가올 재앙 또한 커질 것이다. 인류의 운명이란 관점에서 볼 때 고등교육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부에 대한 봉사와 부라는 목적의 전파는 우리의 건강한 생존 기회를 감소시키고 있다.

많은 교수들이 강의 외의 시간에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일한다. 고등교육에 대한 나의 비판이 교수들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와는 관련이 없다는 식의 사고, 그 이상을 부추기는 시스템에 반대하는 것이다. 왜 이런 시스템이 고등교육을 바꿔놓은 것일까?

 

생태문명을 위한 철학의 역할

이 시스템은 근대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 개념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아마도 불가피한 결과물일 것이다. 근대문명은 눈부시게 성공한 자연과학과 함께 성장해 왔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기계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탄생했다. 이것은 자연에 내재한 어떤 가치도 부정해 왔다. 자연은 인간을 위한 도구적 가치를 가질 뿐이다.

19세기 후반까지 근대문명은 이원론적이었다. 자연이 기계라는 사고와 함께, 근대문명은 고대 그리스와 히브리에서 유래해 중세에 통합된 인본주의적 이해를 계승했다. 인문학에는 중세 대학들의 사고가 뿌리내리고 있으며, 19세기까지 이런 전통은 계속됐다.

그러나 19세기에 찰스 다윈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증명했다. 이는 자연을 다시 생각해 보거나, 인간도 자연이라는 기계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기계론적 과학에 대한 근대의 헌신은 매우 확고한 것이었기 때문에 후자가 승리를 거둔다. 중세적 인본주의는 근대적 기계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계적 세계는 어떤 목적이나 가치도 갖고 있지 않다. 대학은 가치중립적이 되기를 스스로 희망했을 것이다.

물론 교수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를 좀비(기계인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마누엘 칸트는 우리가 좀 더 사실에 근거한 정보를 얻는데 사용하는 “이론적 이성”과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는데 필요한 가치를 고려하는 “실천적 이성”을 구별함으로써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데 기여했다. 칸트에게는 둘 다 중요했다. 그러나 대학들이 스스로를 이론적 이성의 영역에 가둠으로써 우리 문화에 지침을 주는 어떤 곳도 없었으며, 이는 아이들에게 가치에 대한 진지한 사고가 중요하지 않거나 심지어 가능하지 않은 종류의 일이라고 가르치는 결과를 낳았다.

교수들이 강의하지 않는 시간에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자유롭게 일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정보에만 가치를 두고 판단을 정지하도록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 같은 교육의 구조화는 현대세계의 근본적 믿음에서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것이 자기파괴를 피하도록 도와야 하는 절망적 상황에서 사회를 조직하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그 근본 전제들을 검토해야 한다. 이 전제들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더 나은 전제로 대체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데 철학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생태문명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의 문제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과 손자들이 쾌적한 지구에서 살아가길 바란다. 이는 행동의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윤리적 관점에서 현재의 나쁜 행동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구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쁜 행동이 근대적 원리와 믿음을 내면화한 많은 이들에게는 좋은 행동이 된다. 재차 강조하지만 토대를 이루는 믿음들이 문제다. 그러한 믿음들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토론해야 한다. 이것이 철학의 임무이다.

혹자는 대학의 철학 교수들이 이런 임무에 종사한다고 기대할 수도 있다. 몇몇 교수들은 그렇다. 아마 모든 교수들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기회를 주는 인식을 갖도록 학생들을 북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재의 본성에 관한 근본적인 전제들을 검토하는 철학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근대철학은 이 과제를 스스로 포기했다. 근대철학은 다른 학과들과 나란히 서서 또 하나의 학과가 되고자 했다. 다행히 예외는 있다. 그러나 근대적 사고의 전제들을 비판하는 과제를 근대 철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짧게나마, 필요한 비판이 제기됐던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다윈의 증명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왔다고 간주한다. 다윈의 증명은 근대의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극적 도전이었다.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나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응답이 가능하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하나는 자연에 대한 근대적 이해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그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기계론적 사고가 근대성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자연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공적 논의가 일어났다. 이 선택지는 신자연주의라고 불렸다. 이런 움직임은 기계적 모델이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없다는 과학적 증거가 늘면서 지지를 얻었다. 기계적 설명의 한계는 점점 상식이 되었다. 과학을 개혁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체로 학회나 대학으로부터 배제 당했지만, 반복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들은 바로 이런 신자연주의 철학자들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당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상가였으며, 오늘날에도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도 그 중 한 명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찰스 퍼스는 미국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있다. 이들보다 영향력이 적지만 많은 사상가들이 있었다.

 

기계론을 넘어 생태론으로

내가 명확히 했듯이, 나는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가장 종합적이고 통찰력 깊은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은 자연과학의 토대를 이루는데, 그는 뛰어난 수리물리학자였다. 나는 우리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이 이런 신자연주의 사상가들의 후예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오늘날 과학자들의 발견이 이원론적 사고의 변화를 폭넓게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변화의 시기가 온 건 같다.

화이트헤드는 기계론에서 유기체론으로, 실체적 사고에서 사건적 사고로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변화이다. 실체는, 설령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디에 존재했는지에 상관 없이 그저 그것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사건은 오직 언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만 그것 자체일 수 있다. 사건이 관계들의 통합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실체에서는 관계들이 배제된다.

우리 경험에서 객관적인 것이 갖는 중요성으로부터 경험 자체의 중요성으로의 변화도 일어났다. 세계의 많은 부분이 감정으로 구성된다. 감정에는 근본적으로 가치가 들어있다. 가치중립적인 물체들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들의 영향을 받은 목적과 결단의 작용이 모든 경험에 들어있다.

형이상학 강의를 더 이어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생태적 형이상학은 기계적 형이상학과는 매우 다를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생태적 형이상학이 교육에 갖는 함의는 혁명적일 것이다. 경제학, 정치학, 농업, 산업에 갖는 함의 역시 혁명적일 것이다. 이 형이상학의 함의는 형이상학에 대한 의식적 지식이 없이도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움직임을 지지할 것이다.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많은 부분은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에 대해 확신을 주고, 이를 지지한다.

근대적 정신은 형이상학을 거부했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주장에 설득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근대적 정신은 미국인들의 사고에 만연해 있다. 그들은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래서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미국인들에게 모든 관심사는 이론적이기보다 실용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에 비해 중국에는 기본적인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개방성이 있다. 중국인들은 근대 유럽인들의 사고가 자신들의 전통적 사고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들은 사고의 차이가 개인의 삶과 사회 제도에 만들어내는 차이를 목격했다. 그들은 또한 부르주아적 사고와 행동, 그리고 마르크시즘 사이의 깊은 차이 역시 경험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근본적인 믿음의 체계가 현실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비록 중국에서 생태문명이란 개념이 체계적 철학과는 상관없이 생겨났지만, 많은 이들이 중국의 생태문명 개념과 화이트헤드 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점은 중국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일을 진행하기 쉽게 만들었다. 우리는 생태문명이란 주제로 수많은 컨퍼런스를 열고, 그것의 현실적 성격을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보장받았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화이트헤드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지만, 중국인들은 생태문명의 바탕에 깔린 전제들이 생태적 철학을 구성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개인에게 필요한 변화조차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해가 이제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식을 구획화하기보다는 지식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봐야 한다. 일상에서도 관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부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뿌리 깊은 전제는 점점 문제시되고 있다. 요컨대 근대성은 더 이상 대중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지배하지 못한다. 거기에 새로운 문명, 즉 생태문명을 향한 희망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좀 더 좋은 철학이 그런 이상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존 캅(John B. Cobb)

종교철학자,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명예교수

한 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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