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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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정부 경제각료’

임재경 선생의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 (2015, (주)창비)의 발문을 쓴 신홍범은 한국 언론사에 훌륭한 발자취를 남긴 언론계 선배로서 세 사람을 꼽았다. 송건호, 리영희, 임재경이 그들이다. 신홍범은 발문에서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흔들림 없이 한길을 걸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세분은 험난했던 시대에 언론인으로서 멀고 험한 길을 끝까지 갔다. 정치를 해보지 않겠느냐, 관직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오직 한길을 걸어갔다.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언론의 가치를 어떤 가치보다 높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언론을 신앙의 대상처럼 고귀한 것으로 보았음에 틀림없다. (중략)

이 세분들에게 언론이란 권력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조각이나 주워 먹는 개가 아니었다. 권력과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을 질타하는 ‘시민’이요 ‘국민’이었다. 언론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 보는 것이었고, 세상을 설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어 놓는 것이었다.

언론인 신홍범이 앞서 언론인으로서 한길을 걸어간 선배들에게 바치는 진심어린 헌사이다. 그 중에서도 임재경 선생은 신홍범보다 조선일보에 4-5년 빨리 입사한 선배로서 기자 초년병 시절부터 직속 선배였기 때문에 그 정리가 남달랐을 것이다.

신홍범의 말처럼 임재경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한길을 걸으면서 정치권과는 거리를 둬왔다. 그런 임재경이 남모르게 정치권에 선을 대고 있다는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1980년 7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을 때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사건은 광주민중항쟁을 피의 살육작전으로 진압한 전두환 일당이 민주항쟁의 정당성을 왜곡하고 학살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광주항쟁을 ‘공산주의와 연계되어 있는 김대중이 배후 조종한 내란음모의 산물’로 몰아갔다. 80년 7월 4일 계엄사는 김대중이 “국민연합을 전위세력으로 하여 대학의 복학생들을 행동대원으로 포섭, 학원사태를 폭력화하고 민중봉기를 꾀함으로써 유혈혁명사태를 유발, 현 정부를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을 수립하려 했다.”고 발표하고, 김대중,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등 수많은 민주 인사들을 체포·고문·투옥·수배했다. 그런데 그들이 조작한 이른바 김대중의 ‘과도정권’ 명단에 경제각료로 임재경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계엄사 발표 당시 임재경은 한국일보 경제담당 논설위원으로서 김대중과는 그저 안면이 있는 정도였을 뿐 전혀 왕래가 없던 사이인지라 본인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8년 전 1972년 초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 시절에 김대중을 만난 게 마지막이었고 10·26 이후에는 먼발치에서나마 눈도 마주친 적이 없었던 터였다. 다만 마음에 짚히는 것은 80년 정월 어느 추운 날 김대중 측근 한화갑이 김대중과의 대담을 책으로 내겠다는 계획을 들고 와서 경제무문 대담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던 생각이 났다. 당시 언론인으로서 처신에 오해받을 소지가 있으므로 대담내용을 한국일보에 먼저 게재하면 수락하겠다는 말로 완곡하게 제안을 거절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과도내각 각료’ 운운한 것은 김대중 씨 책 출판의 아이디어를 냈던 이문영 교수의 수첩에 임재경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 발단이 되었다.

 

134인 시국선언으로 감옥에 가다

그 이전 광주항쟁의 시발이 되었던 5.17 계엄확대 조치 직후인 5월 18일 새벽, 임재경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소설가 이호철 부인이 남편이 연행됐다며 피하라는 전화를 받고 황급히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청암 송건호 선생의 권유로 참여했던 ‘134인 시국선언’ 때문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 4월 말 아현동에 있는 기독교 선교교육원에서 학계의 유인호·이문영·한완상·장을병 교수, 법조계의 이돈명·홍성우 변호사, 문화계의 이호철, 언론계의 송건호, 임재경 등 유신에 반대하는 지식인들 10여명이 모여 10·26 이후의 시국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선언문을 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유인호·이호철·장을병이 작성한 초안을 가지고 서너번 모임을 가진 뒤 ‘군은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하며,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은 명백한 불법으로 시정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 선언문은 5월 15일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3주 가까이 신문사에도 출근하지 않고 동가식서가숙하며 도피생활을 했던 임재경은 자신을 잡아간다는 뚜렷한 징조가 보이지 않자 6월 중순경부터 다시 집으로 들어가 신문사에도 정상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일렀을 뿐’이었다. 7월 4일 계엄사 발표를 보고 임재경은 저들의 촉수가 자신에게까지 뻗쳐 왔음을 직감했다. 일간신문마다 이름까지 찍혀 보도된 마당에서 도피도 의미가 없었다.

신변의 위험을 느꼈지만 발표 다음 날인 7월 5일도 임재경은 여느 때처럼 신문사에 출근했다. 출근길에 처음 마주친 동료 논설위원 홍순일이 “임 선생 한자리 할 뻔 했습디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오전에 신문사에서는 긴급 징계위원회가 열려 ‘정치행동 금지의 사규 위반’을 이유로 파면 결정을 내렸다. 그 사실을 임재경은 논설위원실에서 통고 받았다. 그리고 통고를 받은지 30분이나 지났을까 신문사로 찾아온 두 명의 계엄사 수사관들에 의해 임재경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남영동에 연행된 임재경은 처음 며칠 동안 수사관들로부터 집중적으로 밤샘 조사를 받았다. ‘운 좋게’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문은 받지 않았지만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고 집요하게 추궁하는 저들의 질문에 곤욕을 치렀다. 열흘쯤 지나면서 취조의 핵심이 ‘지식인 134인 선언’임이 드러났고, 결국 계엄포고령의 집회 불법유인물 작성죄로 조서가 작성되었다. 조서작성을 마치고 취조관은 반성문을 쓰라고 강요하면서 쓰지 않으면 감옥에 갈거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임재경은 “지식인선언은 신념에서 나온 것이며 언론분야 대표로 참여한 처지에 더욱 반성문을 쓸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결국 보름 후 임재경은 남영동 조사를 마치고 구속되어 검찰로 송치되었고,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임재경의 처음이자 마지막 감옥생활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구속된지 서너달쯤 지난 추석 전날 임재경은 ‘공소기각’으로 풀려났다. 같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송건호 선생이나 이호철보다 두 달쯤 빨리 나왔다. 대학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낸 채현국과 박윤배가 백방으로 석방을 위해 뛰어다녔고, 그들 덕분에 빨리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을 석방 후에 알 수 있었다. 풀려난 기쁨에 앞서 임재경은 함께 구속된 해직언론인들, 특히 10년이나 연상인 청암 송건호가 추운 감방에서 겨울을 나야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어린시절

임재경은 1936년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김화군 생창리에서 부친 임덕원(任德元) 선생과 모친 장규선(張圭善)님 슬하에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 모두 평안도 사람이었다. 아버지 임덕원 선생은 평안도 순천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평양에 나가 양복점 점원에서 시작하여 자수성가했고, 고급양복점과 포목도매점 사업으로 재산을 모아 김화에 제법 큰 전답을 마련하여 지주가 되었다. 어머니는 평안도 영변 출신으로 일찍이 개화한 외조부 덕에 일본에서 전문학교까지 다닌 신여성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근우회의 열성회원이기도 했다.

임재경은 김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김화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그해 8.15 해방을 맞았다. 남북분단으로 38선 이북지역에 속한 김화에는 소련군이 진주했고, 1947년 초겨울 임재경 가족은 어머니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삼팔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들은 서울 남영동 해방촌에 집을 구해 정착했다. 월남 전 임재경에게는 9살 아래 배다른 쌍둥이 누이동생 둘이 더 있었는데, 함께 내려오지 못하고 북한쪽 철원에 살고 있다.

임재경은 초등학교 5학년 때 형이 건네 준 김구의 『백범일지』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1949년 6월 김구가 암살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사건 당일날 재경은 김구가 살던 서대문의 경교장까지 걸어가 먼 발치에서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다 돌아왔고, 김구의 국민장이 있던 날은 아침 일찍부터 남영동 큰길로 나가 애국지사의 마지막 길을 울면서 배웅했다.

1949년 9월에 재경은 중학교 과정인 경기상업에 장학생으로 합격하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독서에 취미가 있었던 임재경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거의 중독이라고 할 만큼 책읽기에 몰두했다. 일일이 보고 싶은 책을 사볼 수 없었던 가난한 시절이라 친구들로부터 빌려온 연애소설, 역사소설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바닥나자 충무로 일대 서점가를 순회하며 서점 주인의 눈치를 보며 서서 책을 읽었다. 일요일과 방학 때는 거의 서점에서 살다시피했다.

 

6.25 전쟁 후, 군산에 남아 문학청년을 꿈꾸다

1950년 6.25 전쟁은 그 강렬한 체험 때문에 지금도 임재경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에는 당시의 체험이 시간 순으로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화신백화점 앞에서 ‘이북 괴리집단 38선 남침’이라는 제목의 호외를 봤던 일, 보따리를 이고지고 허둥지둥 한강을 건너던 흰 바지저고리의 피난민 행렬, 시커먼 인민군 탱크가 질주하던 모습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재경은 장사를 떠난 어머니를 기다리느라 피난대열에 합류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1·4후퇴 때에서야 비로소 남쪽으로 피난한다. 인민군 점령 하의 서울에 있으면서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와 형을 따라 여주까지 200리길을 걸어 갔다 돌아오는 길에 미군 폭격기의 폭격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눈앞에 달려드는 폭격기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렸던 일까지 재경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1951년 1월 1일 부모님과 3형제, 임재경 일가는 손수레를 끌고 피란길에 올랐다. 과천, 안산을 지나 온양에서 임시 거처를 구했고, 여기에서 2-3개월 머문 다음에 큰 외숙 장규태씨가 터를 잡고 있는 군산에 내려가 셋집을 구하고 정착했다. 재경은 학교도 군산 광동중학교 3학년으로 전학하였고, 이듬해 2월 군산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쳐 합격했다. 1953년 휴전이 되면서 다른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갔지만 임재경은 군산에 남아 계속 학교를 다녔다. 당시 독일어를 가르치는 차재철 선생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차 선생은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기에 재경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차 선생은 독일어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임재경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었고, 샹송과 싸르트르를 알게 해 주었다. 그는 재경이 서양세계와 근대적 가치관에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이었다. 재경이 가족과 떨어져 군산에 남은 것도 차 선생의 영향이 컸다.

어릴 때부터의 광적인 독서 습관과 군산고에서의 경험은 임재경에게 문학청년의 꿈을 키워주었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품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앞두고 어머니가 서울 법대에 가서 판사가 되라는 말에 ‘법대는 가지 않을 것이며, 불문학을 해서 선생이 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완강한 아들의 뜻을 꺾기 힘들다고 판단한 어머니의 타협책에 따라 서울대 영문학과에 가기로 낙착되었다.

 

대학생활과 4.19

1955년 4월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에도 재경의 프랑스 공부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영문학과 동기들보다는 철학과나 다른 과 친구들과 더 잘 어울렸다. 영문과 동기들은 시골 촌놈 우등생 출신들이라 공부만 잘했지 샹송, 실존주의도 모르고 말이 안 통한다고 재경은 생각했다. 매일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갔지만 강의실에 가기 보다는 문학청년 패거리들과 어울려 명동의 음악감상 다방 ‘돌체’에 갈 때가 많았다. 여기에서 서울대 정치학과 선배였던 이기양을 만나 그 이후 몇년간 깊은 교류를 한다. 이기양의 폭넓은 교양과 ‘자유정신’은 임재경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평생 친구이자 나중에 사돈지간이 된 ‘파격’ 채현국도 이 때 만났다. 채현국을 통해 경기고를 나와 동국대에 다니던 ‘호협’ 박윤배도 알게 되었다. 이 세 사람은 말이 통하고 뜻이 맞아 금방 친해졌고, 늘 함께 어울려 다녔다.

1957년 6월 임재경은 여느 대한민국 청년들처럼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여 1년 6개월 짜리 ‘학보병’ 군대생활을 했는데, 이 상명하복이라는 이름 하에 거짓으로 가득찬 군대생활은 ‘자유정신의 문학청년’ 재경에게는 환멸만을 안겨주었다. 휴가나왔다가 제 때 귀대하지 않아 한동안 도망병 신세가 된 적도 있었다. 이 때 오갈 데 없는 재경을 재워주고 차비까지 대준 고마운 친구가 박윤배였다.

겨우겨우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1960년 4월 임재경은 학교에 갔다가 경무대로 행진하는 문리대 학생 행렬을 만났다. 재경은 주로 재학생들로 이루어진 대오에는 합류하지 않고 시인 황명걸과 함께 대열 뒤를 따라 가다가 청와대 앞길에서 총격소리를 듣고 도망쳤다. 복학생이라는 핑계로 한발을 빼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그는 그 다음 날부터는 아침 일찍부터 등교하여 데모대에 열심히 참가했다. 25일 오후에는“학생들 피에 보답하라”는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는 대학교수 데모대를 보면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박수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임재경은 당시만 해도 사회운동에 열성적인 골수 ‘운동권’은 아니었다. 본인의 회고로는 당시 자신과 가까운 친구들은 대체로 ‘서구의 근대적 가치를 숭상하는 타입’으로 사회의 기성 윤리규범에 냉소적인 ‘친전후파’였다고 한다.

 

조선일보 경제부의 ‘유능한’ 기자시절

1961년 초 임재경은 5명 뽑는 조선일보 수습기자 채용시험에 응모해 50대 1 경쟁을 뚫고 합격하여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사회부에서 1년간 수습기자 생활을 마치고 경제부에 배치되었다. 임재경은 경제부 신입 초에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기초적인 경제용어도 모른 채 취재에 나섰다가 엉터리 기사를 작성하고 데스크의 모멸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이다. 당장 책방에 가서 몇 권의 경제원론과 경제이론 서적을 사고 대학도서관에서 쌔무얼슨 교수의 두툼한 영어원서 『이코노믹스』를 빌려 밤을 새워 독파했다. 마치 대학 입학시험 공부 하듯이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제서야 경제기사들을 제대로 써낼 수 있게 되었다.

근대경제이론에 어느 정도 통달하게 되자 차츰 강대국의 약소국 착취를 외면하는 근대경제학에 회의감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좌파 경제이론가와 경제사가들의 저술에 끌리기 시작했다. 일본어는 말은 서툴지만 독해는 가능했던 터라 모리스돕, 폴 바란, 폴 스위지 등의 저작을 일본어판으로 읽으면서 좌파 정치경제학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럭저럭 경제부 기자생활에 적응하고 경력을 쌓으면서 차츰 언론계의 속사정도 알게 되었고, 재계와 언론기관의 커넥션도 눈에 들어왔다. 1967년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고, 그 댓가로 삼성이 한국비료공장 헌납을 약속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야무야되어 가는 때가 있었다. 그 사정을 임재경이 취재해 본사에 송고했지만 데스크에서 묵살되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고나자 기자생활에 회의가 들고, 신문사에 대한 애착심도 현저히 저하되었다. 게다가 사주 방씨 일가로부터 말단 기자에 이르기까지 군대식 위계질서가 철저한 조선일보의 ‘조폭적’ 문화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기자생활을 하면서 위로가 되었던 것은 백낙청, 리영희, 남재희 같은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된 것이었다. 백낙청은 기자 초년시절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동료기자 김상기의 소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금방 친구가 되었다. 62-3년 무렵 임재경은 백낙청, 김상기와 함께 싸르트르를 원서로 읽고 토론을 하는 고급 지적 취향을 즐겼다. 이 무렵 서울음대를 나온 최명림을 만나 1년 후 1964년 결혼도 했다. 리영희와 남재희는 신문사에서 만났는데 1965년 김경환 편집국장 밑에서 남재희가 정치부장, 리영희가 외신부장을 했다. 리영희가 일곱 살, 남재희가 세 살 위였지만 그들의 민감한 정의감, 시대를 앞서가는 시대감각과 뛰어난 필력이 임재경을 끌어당겼다. 그들은 모두 술을 좋아해서 자주 술자리를 만들어 어울렸다.

임재경도 서서히 ‘물불 가리지 않고 기사를 써 제끼는’ ‘유능한’ 기자 대열에 합류했다. 임재경 이름을 달고 보도되는 경제기사는 인기가 있었고, 사주와 편집국장의 칭찬을 받았다.

60년대 말 즈음부터 기자로서는 승승장구했으나 가까운 친구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났다. 리영희가 3선개헌 전후해서 중앙정보부 압력으로 퇴사했고, 남재희도 정권의 미움을 받고 논설위원으로 밀려났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백낙청도 박사과정을 마치기 위해 하버드로 갔고, 김상기도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르고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1971년 임재경이 프랑스로 떠난 것은 친구들이 외국에 나간 것도 큰 원인이었고, 한편으로 내심 ‘68혁명’ 이후 유럽의 변화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임재경은 프랑스 외무성의 직업훈련 및 장학 프로그램에 응모해 1년간 빠리에 유학했다.

 

유신쿠테타를 보고 언론자유를 생각하다

빠리에서 돌아온 1972년 봄 임재경은 정치부 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기자로서는 명예로운 자리였으나 한편으로 급변하는 정치상황 속에서 바람을 많이 타는 자리이기도 했다.

1972년에는 경천동지할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다. 1972년 초여름 박정희 정권은 ‘7·4남북공동성명’으로 국민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하더니 석달여만에 대통령이 헌법을 짓밟고 뭉개버리는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10월유신’ 쿠테타였다. 언론자유는 철저히 유린되었고, 편집국은 무시로 출입하는 중앙정보부원들의 감시 하에 놓였다. 모든 언론기관들이 무시무시한 유신정권의 철권통치에 굴복하여 침묵하거나 협조했다.

할 일을 잃어버린 임재경은 아예 신문사를 그만두고 문학청년 시절 꿈이었던 소설이나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고민 끝에 신문사에 있는 동안이나마 나름 언론자유를 위해 노력을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서 이때부터 신문사 밖의 의식 있는 친구들을 자주 만났다. 미국에서 돌아와 『창작과비평』을 발행하는 백낙청, 시인 조태일과 소설가 이문구, 오랜 친구 채현국과 박윤배와도 자주 만나 시국담을 나누었다.

그러던 차에 1973년 어느 날 편집국장을 지냈던 김경환이 대한일보 사주 김연준이 자신에게 신문사 전권을 주기로 했으니 함께 나가 대한일보를 키워보자고 권유했다. 편집부국장에 정치부장을 겸임시켜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몇차례 사양도 했지만 한때 리영희, 남재희, 임재경 트로이카를 이끌었던 김경환을 믿고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를 떠나 대한일보로 옮긴지 두 달 반 만에 대한일보가 문을 닫았다. 김연준이 박정희의 미움을 사서 수재의연금 횡령 혐의를 뒤집어 쓰고 자진 폐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소불위의 독재자 박정희의 시대에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었다.

조선일보에서 잘 나가던 기자가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으나 그 기간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대한일보로 임재경을 데리고 가려 했던 김경환이 한국일보로 가면서 한국일보 측과 임재경도 함께 가기로 교섭했던 것이다. 1974년 1월1일자로 한국일보사 논설위원으로 발령이 났다.

『창작과비평』 1974년 봄 호에 「아랍과 이스라엘⌟이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150장 분량의 임재경의 글이 실렸다. 이글은 1973년 말 실업자 시절 임재경이 관철동 한국기원에서 소일할 때 백낙청과 박윤배가 찾아와 닦달하는 바람에 신문사에서 모았던 자료를 바탕으로 모처럼 마음먹고 쓴 글이었다. 이 글은 미국의 영향을 받아 중동문제를 이스라엘 중심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계몽적 성격의 글이었다. 그리고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감옥을 살았던 유인태가 교도소에서 읽고 감명을 받아 주위 동료들에게 권했던 글이기도 했다. 임재경은 그 후에도 아랍과 중동문제에 관한 몇 편의 글을 써서 창비 등에 발표했는데, 1983년 창비에서 발행한 임재경 평론집 『상황과 비판정신』에 수록되어 있다.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베트남 문제를 베트남 인민의 반제국주의 해방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하여 한국의 젊은 지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면 임재경은 중동문제에 초점을 맞춰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을 시도했던 것이다.

임재경이 한국일보에 갔을 때가 38세였다. 논설위원 중에는 젊은 편에 속했다. 처음에는 신입인지라 말조심하고 지냈는데, 그해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사건이 터졌다. 그날 열린 논설위원 회의에서 논설위원 두 사람이 이 선언을 ‘절제된 형태’로나마 지지하는 사설을 써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에 임재경과 다른 두 사람의 논설위원이 적극 동조하고 나섰고, 마침내 사설 제목으로 채택되었다. 논설위원들은 한걸음 더 나가 사주나 외부압력으로 이 결정이 번복될 때는 본지(한국일보)와 자매지(서울경제신문)의 사설 및 칼럼 집필도 거부한다는 강력한 결정을 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이런 결정이 통할 리 없었다. 결국 사주 장기영이 반대하여 이 지지 사설은 실리지 못했다. 임재경을 비롯한 두 사람의 논설위원이 그날 사설을 쓰지 않고 자리를 비움으로써 항의 표시를 했지만 그 뿐이었다. 결국 논설위원실 ‘파업’은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민주회복국민선언」 참여와 자유언론운동

한국일보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이미 제도권을 떠나 뭔가 할 일을 찾고 있던 임재경에게 또 한 차례 기회가 왔다. 그해 11월 27일 기독교회관에서 윤보선, 함석헌, 김재준 등 재야 원로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고 「민주회복국민선언」을 발표했는데, 그 일을 구상하고 조직하던 김정남이 11월 중순경 임재경을 찾아왔다. 「국민선언」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72년 겨울부터 백낙청의 소개로 김정남을 알고 지냈던 임재경은 리영희와 백낙청도 참가하는 것을 확인하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생각으로 그 제의를 수락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대회에도 참석했다. 그날 오후 서울신문 편집국장 남재희가 임재경의 ‘최초의 현실참여’를 축하하면서 결성대회에서 함세웅 신부, 홍성우, 김윤수 등과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주었다.

이 일로 임재경은 며칠 후 장기영 사주 방으로 불려갔다. 장기영은 중앙정보부 압력이 거세니 앞으로는 그런 활동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종용했다. 여기서 굴복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임재경은 사표를 내는 한이 있어도 각서를 쓸 수는 없다고 버텼다. 결국 장기영이 양보하여 기관엔 자신이 잘 이야기하기로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현직으로 이 선언에 참여했던 백낙청은 그해 12월 ‘교육공무원법 위반’으로 서울대 교수직에서 파면되었다.

1975년 3월 조선일보 자유언론투쟁과 그에 따른 대량해고사태, 이른바 ‘3·6사태’로 임재경은 또 한 번의 고비를 맞게 된다. 이때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조선투위)의 주동인물인 박범진, 신홍범, 백기범, 정태기가 임재경보다 입사가 4-5년 늦은 6·3세대들이었다. 모두 임재경이 조선일보 재직 때 가깝게 지낸 후배들이었다. 그래서 조선일보 사주 측에서는 임재경이 조선투위의 배후인물 중 하나로 지목하고, 신문 지면에 ‘외부인들의 선동·사주’ 운운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물론 전적으로 저들의 오해이거나 모함이었지만 전혀 관련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임재경이 후배들의 투쟁을 지지·격려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한때 언론인들의 입길에 오른 ‘한성여관사건’도 그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성여관은 조선 해직기자들이 밤샘농성하던 곳으로 조선일보 사옥 뒷골목에 있던 여관이었다. 3·6사태 직후 임재경은 감옥에서 막 출소한 김지하와 함께 소주 한 상자를 사들고 농성 중인 후배들을 격려하려고 한성여관으로 갔다. 다른 이들은 조선일보 사옥 앞으로 시위하러 나갔고, 신홍범이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셋이 소줏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데 조선일보 방우영 사장이 불콰한 얼굴로 부하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방 사장은 임재경을 보더니 육두문자를 써가며 ‘나간 놈이 왜 우리 애들 선동하냐?’ ‘너 공산당 아니냐?’ 등 욕설을 퍼부었다. 임재경도 ‘내가 왜 공산당이냐? 당신이 내가 맑스·레닌 이야기 하는 것 들어봤냐? 그 말 취소하라.’며 지지않고 댓거리를 했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는데 시위 나갔던 정태기 등 해직기자들이 돌아와서 말리는 바람에 사건은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방 사장이 신문발행인협회 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또다시 ‘공산당 운운’ 하며 임재경을 짜르라고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번에도 임재경으로부터 자초지종 전말을 전해들은 장기영이 방 사장의 요구를 일축하는 것으로 끝났다.

1979년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긴급조치시대는 임재경에게도 암울한 시기였다. 동료 논설위원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대신 변호사·목사·신부·해직교수·해직언론인 등 재야인사들과 노동·농민운동가들과 자주 만났다. 주말에는 리영희·이호철 등 친구들이나 조선투위 해직기자들과 산행하면서 큰소리로 떠드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간간히 『창작과비평』에 기고도 했다. 창비 1978년 겨울호에 발표한 「한국경제의 독점적 성격」은 민주화운동권의 호평을 받았다. 노총이나 기독교계의 초청으로 시국강연도 몇 차례 했다. 그가 가장 자주 어울린 사람들은 역시 해직기자들과 문인들이었다. 당시 그가 자주 들렀던 곳은 한국일보사 뒷골목에 있던 창비사, 종로 1가의 채현국과 박윤배가 차린 무역회사 사무실, 청진동의 동아투위 사무실 등이었고, 바둑을 좋아한 그는 천승세가 연 일석기원과 관철동의 한국기원에도 자주 나타나 민병산·신경림·구중서 등 문인들과 바둑을 두었다.

1979년 10월 26일 새벽 4시 임재경은 백낙청의 전화를 받았다. 박정희에게 유고가 발생했다는 방송이 나온다는 거였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것이다.

 

해직언론인 시절

1980년 5.17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박정희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강력한 철권통치를 시행하여 권력기반을 강화했다. 그런 권력기반 강화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 철저한 언론통제와 반정부 언론인의 구속과 대량 해직이었다. 그 당시 해직된 언론인이 933명이나 되었는데, 이는 전체 기자의 30%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히 ‘언론대학살’이라 할 만했다. 앞서 본 임재경의 구속과 해직은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추석 전날 감옥에서 나온 임재경은 채현국, 박윤배 등 친구들의 구명운동 외에도 미국의 큰 아들 집에 계시던 어머니의 구출 노력이 있었음을 알았다. 일제 강점기에 여학교를 나온 신여성답게 어머니는 미국정부 상원의원들에게 편지를 내어 아들의 구속에 항의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해줄 것을 호소한 것이었다. 실효성은 알 수 없었지만 그 편지가 미국정부를 통해 한국정부와 계엄사 합수부에까지 전달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석방된 다음해 정초에 임재경은 언론계 대선배인 천관우에게 불광동 집으로 세배를 갔다. 천관우는 전두환이 자기편 사람으로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래서인지 임재경이 쫓겨난 한국일보사에 이사로 영입되어 기명 칼럼을 쓰고 있었다. 천관우가 세배를 받고 감옥에 있는 청암 송건호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한 소리가 충격적이었다. “임형! 다방가(茶房街)에서 무어라 떠들던 간에 적어도 향후 3년간 과거와 같은 행동은 용납 안될거요.” 야당과 재야운동권을 다방가라고 지칭하는 것도 거슬리는 말이었지만 ‘과거와 같은 행동’이라는 말 속에는 ‘김대중 정부의 과도내각 운운’하는 저들의 발표를 믿고 거기에 동조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임재경은 과거 박정희에게 가장 도전적이었고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언론인 선배의 변한 모습에 씁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광주항쟁 이후 몇 년간 임재경은 해직언론인으로, 실업자로 지냈다. 그리고 정부가 주목하고 감시하는 요시찰 대상이기도 했다. 용산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그의 담당이었다. 때로 범하 이돈명 변호사가 이끄는 거시기 산악회에 끼어 변형윤, 박현채, 김정남 등과 산행을 다니기도 했고, 해직기자들이 별도로 조직한 머사니 산악회와 함께하기도 했다. 이따금 친구 ‘호협’ 박윤배가 자기가 경영하는 강원도 탄광회사로 불러 용돈을 챙겨주었다. 그런 중에 1981년 여름에는 박형규 목사가 주도하는 KNCC 주최 ‘전국인권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열린 경북 왜관 분도수도원 모임에 참석하여 강연했다가 수사기관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83년에는 미국에 있는 어머니가 주선하여 미국 하버드대학 국제문화연구센터(CFIA) 연구원으로 1년간 다녀왔다. 하버드에서 1982년 말 감옥에서 나와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을 11년만에 만났다. 김대중은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 후 워싱턴에 있는 김대중 자택으로 초대받아 저녁식사를 함께 한 적도 있었다. 단둘이 있을 때 김대중 씨가 정치를 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임재경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완곡히 거절의사를 밝혔다.

미국에서 귀국한 1984년부터는 백낙청의 창비사에서 ‘편집고문’이라는 이름으로 3년 반 동안 월급을 받고 지냈다. 출판사의 배려로 지방강연을 많이 다녔다. 특히 가톨릭 정평위 간사인 문국주와 김양래가 주선하여 가톨릭 단체들의 지방강연, 특히 광주 등 호남지방 도시들로 강연을 많이 갔다. 주로 경제·사회·국제 문제 강연을 많이 했으나 국내정치를 언급하기도 했다.

1984년 12월 해직기자들을 망라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창립하고, 공동대표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창비 살림을 맡아 달라는 백낙청의 당부가 있어 고사(固辭)하고 백의종군하기로 했다. 1985년 6월 언협에서 『말』을 창간하면서 임재경은 창비 사무실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언협 사무실에 자주 들러 후배들을 격려했다. 1986년 6월 『말』 특집호를 내어 보도지침사실을 폭로하자 정부당국은 언협 간부 김태홍과 신홍범, 김주언 기자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였고, 공덕동 언협 사무실에서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농성이 자주 열렸다. 임재경은 농성장에 제일 연장 선배로서 자리를 지켰다. 재판에도 빠짐없이 다녔고, 외국기자들에 대한 인터뷰도 임재경의 몫이었다. 실무자들과 거리에 나가 ‘말 소식’지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국민의 신문’ 한겨레신문 창간의 주역이 되다

1988년 5월 15일 양평동 한겨레신문 구 사옥 낡은 윤전기에서 나온 첫 신문을 한 아름 안고 2층 편집국에 뛰어 올라가 창간 축하 손님들에게 한 부씩 나눠주던 순간의 감격을 임재경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때 그의 나이 52세, 직책은 편집인 겸 논설주간이었다. 1961년 조선일보 견습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지 27년, 한국일보에서 파면당하고 거리에 나온지 햇수로 8년만이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치하에서 정보기관의 감시와 ‘보도지침’이라는 모멸 속에서 신문을 만들면서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워왔던 해직언론인들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투위 출신으로 한겨례신문 창간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신홍범은 한겨레신문의 창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세 사람을 꼽고 있다. 임재경, 이병주, 정태기가 그들이다. 조선투위 위원장을 지낸 젊은 정태기가 국민주 모금과 컴퓨터 조판이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어 추진했고, 임재경과 이병주가 그 계획을 앞에서 강력하게 이끌어 갔다. 임재경은 논설주간으로서 한겨레신문을 기존 신문과 다른 정론지로, 그리고 국민모금으로 이루어진 ‘국민의신문’으로 설 수 있도록 신문의 편집방향을 바로 세워나가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임재경이 논설위원실을 이끌던 노태우정부 시절에는 미대사관에서도 한겨레신문 논설만은 대부분 영어로 번역해서 본국에 송고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임재경은 인사문제에 있어서도 연령과 지역, 출신 학교를 따지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요직에 기용할 수 있도록 힘썼다. 성유보가 초대 편집위원장에 기용된 것도 어느 정도 임재경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재야에 묻혀 있던 젊은 인재들을 발굴하여 경력기자로 채용하게 했다.

임재경은 1988년부터 91년까지 4년간 ‘편집인 겸 부사장’으로 재임했다. 재임 중 ‘리영희 고문 방북취재 계획 사건’, ‘서경원 전 의원 방북 자료 압수수색 사건’ 등을 겪었고, 그래서 신문 발행을 담당하는 부처의 장관으로부터 한겨레신문에 외국의 불순자금이 유입되고 있다는 말까지 듣는 등 피가 마르는 많은 고비를 넘겼다. 1991년에는 일선 경영진에서 물러나 1993년까지 논설고문으로 일하다 퇴사했다.

 

원로 언론인 임재경

한겨레신문에서 퇴사하고 난 뒤에 임재경은 원로 언론인으로서 이따금씩 대중 강연과 기고를 하면서 한편으로 그를 따르는 후배들과 바둑도 두고, 친구들과 시국담을 나누면서 유유자적하는 후반전 인생을 살고 있다. 그동안 그와 함께 오랫동안 수담(手談)을 나누던 성유보, 김용태, 나병식 등이 세상을 떠나 주변이 조금 쓸쓸해졌지만 아직도 이따금씩 광화문의 한 기원에서 이철, 이명준, 조성우, 이석표 등과 만나 바둑 두는 것을 큰 낙으로 삼고 있다.

1994년 창비사 편집자문위원, 2004년 국회의원 유인태의 권유로 중앙선관위원을 했다. 상복이 없었던 임재경 선생에게 2012년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에서 단재상 언론부문상을 주었다.

올해로 83세가 되는 임재경 선생은 독립운동가 자손 김자동 선생의 권유로 김 선생이 회장으로 있는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아 매일 광화문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그곳 작은 사무실 책상에 수북이 쌓인 내외신 신문들 속에서 임재경 선생은 지금도 열심히 세상 돌아가는 것을 살피고 있다.

 

공동선, 2019년 1-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

권형택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민청련 부의장, 민통련 사무차장, 현 이야기채록사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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