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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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데모, 유신독재에 파열구를 내다

1973년 10월 2일 오전,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서울 문리대 4·19탑 앞에 20-30명 학생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11시가 되자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불이야!”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이 소리에 놀란 학생들이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뛰쳐나왔다. 이번에는 4.19탑 앞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입시다. 4.19탑 앞으로 모이세요! 비상총회를 엽니다.” 이 소리에학생들이 4.19탑 앞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순식간에 200명을 넘어섰다. 유신독재에 정면 도전하는 최초의 학생시위, 10.2데모의 봉화가 올려진 것이다.

4.19탑 뒤 마로니에 나무 사이에 ‘독재 타도’라는 플래카드가 펼쳐지고, 그 앞에 빨간 잠바를 입은 정치학과 4학년 강영원이 핸드마이크를 들고 격앙된 목소리로 선언문을 낭독했다. “오늘 우리는 전 국민대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이 참혹한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스스로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 무언의 저항을 넘어 분연히 일어섰다. …(중략)… 학우여! 자유와 정의, 그리고 진리는 대학의 생명이다. …(중략)… 모든 굴종의 자기 기만을 단호히 걷어치우고, 의연하게 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정의와 자유, 그리고 진리를 실현하려는 역사적인 민주투쟁의 첫 봉화에 불을 붙인다.” 이어서 2학년 강구철, 신대균의 선창으로 학생들의 힘찬 구호가 이어졌다. ‘자유민주체제를 확립하라!’ ‘정보정치 중지하라!’‘김대중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라!’

선언문 낭독을 마친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고, <선구자> 노래를 부르면서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교수들과 교직원들, 나중에는 한심석 서울대 총장까지 나서서 학생들의 시위를 중지시키려 했지만 중지는커녕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시위 학생들의 수는 어느덧 500여명으로 불어났고, 교문과 본관 사이(현재 마로니에 공원자리)가 학생들로 가득찼다. 박정희 유신독재를 거부하는 학생들의 분노와 열정은 뜨거웠다. 여학생들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최루탄을 쏠 경우에 대비하여 양동이에 물을 길어 날랐고, 즉석에서 모금하여 가게의 빵을 싹쓸이 해서 시위가 길어질 것에 대비했다.

워낙 허를 찌른 기습적인 시위였기 때문인지 경찰의 출동은 예상보다 늦었다. 시위가 시작한지 1시간이 지나도 경찰이 출동하지 않자 오히려 시위 주동자들이 당황했다. 선언문만 계속 읽을 수도 없는지라 누군가 제안으로 바로 옆 법대캠퍼스로 원정을 갔다오기로 했다. 법대는 문리대와 골목 하나 사이로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시위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법대 캠퍼스로 넘어가 법대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법대 캠퍼스를 한바퀴 돌고 의기양양하게 문리대로 다시 돌아왔다.

경찰은 시위를 시작한지 2시간이나 지난 오후 1시경에야 출동했다. 경찰과 학생들은 교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학생들은 술렁이긴 했지만 전례로 봐서 ‘설마 들어와서 잡아가지는 않겠지’하는 생각으로 대열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은 예상을 깨고 1시반경 교문을 열고 교내로 진입하여 시위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 때 서울 문리대 캠퍼스에서만 180여명이 연행되었다. 마지막까지 연좌농성에 참여한 학생들 대다수를 연행한 것이다. 그 중 20여명이 집시법으로 구속되었다.

이 10.2데모는 적진 심장부에 명중한 한 발의 직격탄으로 철옹성 같았던 박정희 유신체제에 파열구를 냈다. 1972년 10월유신을 선포하고 계엄령 하에서 불법적인 쿠테타로 영구집권체제 구축했던 박정희 정권의 뒷통수를 때리는 일격이었다. 반면에 유신 폭압통치 하에 숨죽이고 있던 민주세력에게는 실로 가뭄의 단비와 같은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공안기관 수뇌부가 직접 나서 연행자 조사를 지휘하는 한편 중앙정보부, 보안사, 서울시경, 일선 경찰서 등 수사기관을 총동원하여 주동자 수색작전에 나섰다. 10-11월 두 달 동안 30여명이 더 연행되어 연행자는 215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0.2 서울문리대 데모로 일단 불이 붙은 학생시위는 10월 4일 서울법대, 5일 서울상대로 번져 나갔고, 이후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듯했으나 11월 5일 경북대 시위를 시발로, 서강대, 이화여대가 대규모 시위에 나섰고, 탄력이 붙은 유신반대 시위는 당국의 휴교와 조기방학에도 불구하고 11월 말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2월 초에는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신일고 같은 고등학생들까지도 시위에 동참했다.

 

10.2 데모 주동자 나병식

이날 시위가 시작되기 직전, 문리대 교정이 내려다보이는 길 건너편 서울의대 건물에서 한 장신의 젊은이가 여자 후배 두 사람과 함께 창문 밖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집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눈시울을 붉히며 건물에서 내려와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젊은이가 바로 이 데모를 중심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했던 핵심 주동자, 나병식이었다. 당시 국사학과 4학년이었다. 이날 나병식은 현장지휘를 동기생 강영원과 정문화에게 맡기고 본인은 내외신 언론기관 연락을 맡았기 때문에 현장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서울의대에서 나온 나병식은 우선 광주일고 선배 김태홍이 노조 분회장으로 있는 한국일보에 가서 선언문을 전달하고, 이어 동아일보에 전화해서 시위 소식을 알리고 수위실에 선언문을 접수시켜 놓았다. 이어 중앙일보와 아사히 신문 등을 돌며 선언문을 전달하고 보도를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 들러 7층에 있는 KSCF(한국기독학생총연맹)와 몇몇 기독교단체들에도 선언문을 전달했다. 외신에 보도되기 위해서는 이들 기독교단체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선언문 전달을 모두 마친 나병식은 그때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 문리대 10.2데모가 예상 밖의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언론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정권의 철저한 언론통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신은 달랐다. 시위 바로 다음 날인 10월 3일 《아사히신문》 1면에 이 시위 소식이 선언문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어 상세하게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북한의 방송에서 바로 다음날 이 선언문 전문이 소개되었다. 지방학생 중에는 이 방송을 통해 시위소식을 접한 사람들도 있었다.

외신보도가 있자 국내 언론에서도 김태홍이 있는 《한국일보》가 8일에 1단으로나마 겨우 보도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도 보도을 시도했지만 인쇄 직전에 삭제되어 공란으로 발행돠었다. 방송에서는 CBS만이 단신으로 잠깐 시위소식을 전했다.

시위 직후 나병식은 시위의 핵심주동자로 지목되어 수사기관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 10월 중순경 신촌시장에서 광주일고 후배를 만나 겨울옷을 받으러 갔다가 중앙정보부 6국 수사관에게 체포되어 동대문 경찰서에서 구속된다.

 

독재정권의 폭력을 보고 유신철폐 시위를 결심하다

나병식에게 있어서 이 10.2 데모는 그 이후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6번 감옥에 드나드는 그의 지난한 인생역정의 시작이었다. 그러면 그는 이 10.2데모를 언제부터 구상하게 되었을까? 그의 회고를 들어보면 2년 전 박정희 정권이 학생운동을 잠재우고 영구집권에 착수하기 위해 발령한 위수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학년이었던 나병식은 1971년 10월 15일 서울대 개교기념일 날 위수령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학교에 갔다가 교문을 막아선 탱크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대학 입학 때부터 이념서클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사회비판의식을 키워왔지만 이때 비로소 박정희 정권의 폭력적인 진면목을 대면한 것이다.

박정희정권은 위수령 발동과 함께 서울시내 10개 대학에 무장군인을 진주시켜 학생회와 서클을 강제 해산시켰다. 그리고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대거 연행하여 그 중 일부는 구속하고, 나머지 대부분 학생들을 군대로 징집, 사회로부터 격리시켜버렸다. 이어서 박정희 군사정권은 1972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0월유신 쿠테타를 감행하여 영구집권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해 나간다. 이 때 그 전까지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이끌어왔던 학생운동 선배 그룹들이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 이후 거의 2년간 대학사회에서는 학생운동이 내부 동력을 상당부분 상실하고, 무기력과 패배주의가 만연하였다. 이것을 극복하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대학에서의 활동이 힘들어지자 나병식은 상대적으로 활동이 용이했던 교회권, 서울제일교회와 KSCF에서 저들에 대항하는 활동을 모색하게 된다. 그의 광주일고 동기였던 김경남과 함께 서울제일교회 대학생부에서 세미나모임을 시작하고, 1년 후배 황인성과 함께 KSCF에서 주관하는 학생사회개발단 활동에도 참여하여 많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쌓고, 민주화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그리고 김낙중, 김말룡 선생 지도하에 정찬용, 임상택 등과 함께 외기노조 산하 중화요식업노조 결성을 시도했던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73년 3월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나병식은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학내 현장을 복원’하기로 결심한다. 외부 활동도 중요하지만 학생운동은 역시 학생회라는 대중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일부 준비론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학생회가 독재정권에게 먹이감만 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은 학생의 현장에서 싸워야 한다는 게 나병식의 소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사연을 기반으로 문리대 내의 서클들을 통합하여 한국문화연구회(한문연)을 결성한다. 그리고 이 한문연과 자신의 후사연 서클 인맥, 광주제일고 지역인맥, KSCF와 서울제일교회의 교회인맥을 모두 동원하여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에 자신이 미는 후보를 당선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나중에 10.2데모가 성공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문리대 학생회장 도종수는 나병식이 대전에 있는 고향집까지 내려가서 그의 아버지를 설득하는 공을 들임으로써 출마시킬 수 있었다.

독재정권의 오만과 독선, 억압과 폭력이 사회 각 부분에 모순을 누적시켜왔고, 누군가 불을 붙이면 금방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그러나 학생운동은 여전히 폭압적인 군사정권 아래 기를 펴지 못하고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나병식은 새 학기 초 자신이 주도적으로 만든 한문연 수련회에서 유신반대 시위계획을 처음 제시했다. 그러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필요한 건 알지만 저 감시와 폭압을 뚫고 우리가 과연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박형규 목사 구속과 김대중 납치사건

1973년 6월 서울제일교회 박형규 목사와 권호경 전도사 등이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사건은 나병식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존경하는 재야 어른의 구속은 그의 결심을 더욱 굳게 했다. 이때부터 나병식은 정문화, 이근성, 정찬용, 김효순 등 4학년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위준비에 나섰다. 당시까지 만해도 학생운동의 중심은 3학년이고, 4학년은 졸업을 앞두고 사회진출을 모색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저 상식 이하의 포악한 유신정권을 놔두고 조용히 졸업한다는 것은 나병식을 비롯한 학생운동가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해 8월 때마침 패배적인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나병식은 한 구술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모순 자체는 엄청나게 커져있는데 거의 폭발할 지경에 왔다고 봐요. 정치체제도 그렇고. 유신체제라는 게 독점과 분열이거든. 분열은 한국 체제의 분열이에요.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농촌과 도시, 이렇게 분열책이 극에 달했던 게 유신체제 아닌가. ‘가연성 물질은 너무 많은데 불을 못 붙이고 있다. 우리가.’ 그래서 우리가 민중적인 활동에 근접해 있다가 그 힘으로 밀고 들어왔는데 그 폭발력은 상당히 있었던 거 같다. 김대중 사건이 바로 체제억압의 구체적인 하나의 예가 되고 국제적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국내 정치세력한테도 재기하는 하나의 신호탄으로 작동된 게 아닌가.

73년 9월 2학기가 시작하면서 나병식은 정문화, 이근성, 정찬용, 이근성, 김효순 등 4학년 동기생들과 시위계획을 구체화시켜 나간다. 한편으로 군대에서 돌아온 유인태, 서중석, 이철 등 60년대 학번 선배들과도 협의하여 동의를 얻어내고, 조언을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재학생들의 참여의지를 끌어내는 게 중요했다. 나병식은 학생회 간부들과 운동권 서클대표들을 20여명 소집하여 시위계획을 밝히고 참여를 호소했다. 여기에는 4학년 이외에도 황인성, 김덕수 등 3학년들과 이해찬, 강구철, 고아석 등 2학년들도 상당수 참여했다. 처음에는 미온적이었던 분위기가 회의를 두세차례 거듭해 가는 동안 점차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서울법대와 상대, 의대의 리더들과도 협의하여 동시에 일어나기로 약속을 했다. 나병식은 따로 광주 전남대의 김정길과 제일교회 대학생부에서 만난 이화여대 김은혜와도 만나 시위를 권고했다.

원래 9월에 하기로 계획했던 시위는 뜻하지 않은 일들이 생기는 바람에 몇차례 미뤄지다가 9월 30일 저녁 드디어 파고다공원에서 나병식, 정문화, 이근성, 강영원, 황인성, 도종수 6명이 모여 최종적으로 10월2일 11시 문리대 교정 4.19탑 앞에서 데모하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마지막에 나병식은 ‘기왕에 죽을 것 10월1일 국군의날에 하고 잡혀가자’고 주장했으나 도종수가 “형님. 하루만 연기합시다.”고 해서 10월 2일로 결정됐다. 나병식은 여의도에서 국군의날 행사할 때 저들의 전력이 분산될 것이라는 점을 노리려고 했으나 그에 따른 저들의 엄청난 보복을 우려하여 한걸음 늦추게 된 것이다.

 

10.2 데모에서 민청학련으로

동대문서를 거쳐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던 나병식은 두달여만에 12월 10일 공소취하로 석방된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한편 외신을 통해 해외로 소식에 전파되면서 해외 인권기관들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박정희 정권이 서둘러 석방한 것이다. 석방되면서 학교의 징계도 모두 해제되어버렸다. 나병식은 석방되자마자 뉴스위크와 타임지 기자와 인터뷰를 해서 박정희 정권의 폭압성을 폭로했다. 그 때 석방되는 사진이 뉴스위크에 크게 보도되었다.

나병식은 석방된 직후부터 달아오른 반유신 시위의 불길을 꺼뜨리지 않고, 다음 해로 이어나가 유신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10.2데모 때만해도 신중한 입장이었던 서중석, 유인태가 적극적으로 나섰고, 그래서 12월말까지는 서중석, 유인태, 이철, 안양로, 나병식, 정윤광, 김효순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투쟁계획이 윤곽을 갖추었고, 학생운동권 뿐만아니라, 재야·종교계를 망라하여 투쟁의지를 결집해가는 작업을 꾸준히 계속해나갔다.

1974년 1월부터는 나병식은 서중석, 유인태, 이철 등 선배들과 미아동 유인태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전국적 조직연결문제와, 준비상황 점검 등을 점검하고 대책을 세워 나갔다. 나병식은 주로 KSCF와 서울제일교회로 연결되는 기독교계 학교들과 교계인사들, 그리고 광주일고 출신이 많은 전남대 등 전라도 대학들과 연계하였다. 위 4인 이외에 강구철, 김효순, 정문화 등이 참여하고, 2월부터는 황인성, 김병곤이 추가로 가담하면서 전국 조직작업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활동의 폭이 점차 넓어지고, 만나는 대상이 확대되면서 활동자금이 필요했다.

3월 초 어느 날 나병식은 KSCF 간사로 있는 선배 안재웅을 만나 유신철폐 데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서 준비자금으로 30만원을 마련해 줄 것을 부탁한다. 안재웅은 가까운 후배의 부탁인지라 한번 마련해 보마고 약속하고 궁리 끝에 박형규 목사를 찾아가 돈 마련을 부탁한다. 박 목사도 그이야기를 그 이전에 나병식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어서 놀라지 않고 선선히 응락하고, 해위 윤보선으로부터 돈을 받아 얼마 후 안재웅에게 전달했다. 안재웅은 이 돈을 정상복 간사에게 나병식에게 전달하라고 부탁했다. 정상복을 통해 전달 받은 이 돈을 나병식은 시위준비에 요긴하게 사용했다. 후에 박형규 목사가 구속된 후 이 돈의 출처가 밝혀져 해위와 박형규 목사가 곤욕을 치렀지만 그러나 이 돈은 한편으로 민청학련 사건을 북한과 연계한 용공사건으로 몰고가려고 한 군사정권의 의도를 좌절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무지막지한 박정희정권도 전직 대통령과 원로 목사가 관여한 돈을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민청학련사건으로 알려진 4월 3일 전국 동시다발 유신철폐 시위는 사전에 저들에게 정보가 입수되어 주동자들이 대부분 사전 검거되거나 수배되었고, 그래서 시위는 목적한 바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 몇 개 대학에서 예정대로 시위를 벌이긴 했으나 산발적인 시위로 그쳤다.

3월 말 곽성문 학생회장 등 서울대 학생회 간부들이 자수했다.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한 공안당국은 이들로부터 전국적 유신철폐 시위가 준비되고 있다는 상당히 상세한 첩보를 입수하고 최고위층에 보고한다. 박정희는 경악했고, 연초에 발표한 긴급조치 1호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보고 4월 3일 밤 10시 가장 극단적인 처방을 내렸다. 유신에 대한 도전은 최고 사형에 처하는 긴급조치 4호 발령이었다.

3월 31일부터 관련 주동인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작전이 개시되었고, 제일 먼저 서중석, 정윤광 등이 체포되었다. 4월 3일까지 전국적으로 1024명을 연행 조사하고 235명을 군법에 송치했으며, 180명을 기소하는 전무후무한 대 검거작전이 전국을 휩쓸었다. 나병식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4월초 체포 구금되어 엄청난 고문과 함께 조사를 받았다. 나병식은 특히 저들이 중요시하는 자금출처를 밝히는 고리라 생각해서 더 고문을 심하게 받았다.

 

사형선고보다 더 큰 아픔

나병식은 6월 15일 동료 인사 32명과 함께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첫 공판을 받고 7월 13일 선고공판에서 이철, 유인태 등 6명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일주일 후 7월 20일 군법회의 관활관인 서종철 국방부장관 확인과정에서 이철, 유인태, 김병곤, 김지하 등과 함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9월 7일 2심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20년이 확정되었다.

당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던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은 형이 확정될 때까지 일체 외부접촉이 금지되었고, 면회는 물론 편지나 서적 반입조차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미 10.2데모로 감옥을 한번 갔다온 나병식에게는 혹독한 감옥 생활 자체는 그다지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등 어른들과 김지하, 이현배 등 선배들로부터 배우고 스스로를 단련하는 좋은 수련의 장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동안 평생 지울 수 없는 슬픈 사건이 그에게 일어났다. 고향 광주 송정리에 있는 그의 고1 열여덟 살 둘째 누이동생과 열두 살 초등학생 막내 남동생이 자다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사망한 것이다. 어머니도 한방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중태에 빠졌으나 다행히 병원에서 깨어났다. 당시 부모님과 동생들이 어머니가 하는 청과상에 의지해서 고향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감옥에 있는 아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열린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 에 올라온 사이에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가족들은 나병식에게 석방 때까지 이 소식을 숨기고 말하지 않다가 석방되는 날 버스 안에서 아버지가 이 소식을 전해준다. 나병식은 감옥에서 나오는 날 이 사실을 알고 동생들 이름을 부르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에게는 이 일이 평생 가슴 속에 큰 회한으로 남았다.

 

어린 시절, 학창시절, 대학시절

나병식은 전남 광산군 송정리에서 아버지 나정주(羅貞柱) 선생과 어머니 김공순(金恭淳)님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병식이 감옥에 있을 때 죽은 이는 맨 아래 남동생과 그 위의 여동생이었다. 아버지 나정주 선생은 성격이 칼칼하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할 줄 모르면서 생활능력은 없는 분이어서 집안 살림은 늘 어려웠다. 그나마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 청과물 장사를 하며 집안 살림을 돌보며 아이들을 길렀다.

병식은 어려서부터 동네 아이들보다 키가 크고 힘에 세서 늘 대장이었다. 병식의 아버지는 보통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였으나 외가쪽 남자들이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 많아서 병식은 아무래도 그 내림을 받은듯했다.

5.16이 있던 해 병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서중에 입학한다. 이때부터 병식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늘 집을 떠나 광주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과외도 하고, 뭔가 돈 버는 일을 하며 살았다. 중학교 3년을 마치고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광주상고에 진학했으나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중간에 휴학하고 다시 시험을 쳐서 1965년 1년 늦게 광주제일고를 들어갔다.

고등학교 광주일고에는 사회의식이 있는 선생님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국어선생이었던 시인 문병란 선생과 수학을 가르치던 강태풍 선생의 영향이 컸다. 나병식은 문병란 선생과 강태풍 선생에게서 민족의식과 비판정신을 배웠다. 그리고 세계사를 가르치던 김용근 선생으로부터 민중의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민중사관’을 배웠다. 이런 선생님들의 영향으로 일찍 의식이 깨었던 나병식은 2학년 때 ‘탑’이라는 서클을 조직했는데, 이 탑은 학교 교정에 있는 광주학생의거를 기념하는 학생탑에서 그 이름을 따 온 것이었다. 그리고 2년간 도서반장도 맡아 하면서 많은 책들을 섭렵했다. 당시 정찬용(청와대 인사수석 역임), 김희택(민청련 전 의장) 등이 동기생으로 함께 어울렸다.

병식은 1969년 광주일고를 졸업했으나 서울대 시험에서 낙방하여 1년간 재수 끝에 1970년 3월 서울대 문리대 국사학과에 입학했다. 처음 시골에서 올라온 병식의 눈에는 공릉동에 있는 교양과정부의 교양과정이 새롭기는 했으나 뭔가 성에 차지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심재권, 신동수 등이 만든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이라는 서클을 만나게 된다. 이 서클에서 나이 많은 선배들과 공부하면서 사회과학 이론에 대한 소양과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나병식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따로 농촌사회활동반이라는 농촌봉사활동을 하는 서클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1971년 2학년이 되어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로 온 나병식은 후사연 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학원병영화에 반대하는 교련반대데모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는 이후 4월의 대통령선거와 10월의 국회의원선거 때에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공동의장)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공명선거 감시운동에도 학생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 시기에는 한 학기에 강의를 몇 번 듣지 않고 끝날 정도로 대학가는 연일 데모로 시작해서 데모로 저무는 데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유분방한 대학생활의 낭만도 있었고, 도서관에서 진리 탐구의 열정도 쏟아 볼 수 있었던 때였다.

그러나 10월 15일 박정희 정군이 학원질서를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위수령을 발동하면서 대학가 분위기는 일변했다. 서울시내 대학에 군인들이 진주하고, 탱크가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출입을 막았다. 총칼을 앞세운 박정희의 영구집권계획이 시동을 건 것이었다. 그와 함께 나병식의 목숨을 건 반독재투쟁, 그리고 그의 험난한 인생 역정도 시작되었다.

 

김순진을 만나 결혼하다

1975년 2월 15일 박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긴급조치 위반자 148명을 전격적으로 석방했다. 2월 12일 유신헌법찬반투표에서 승리한 것을 석방의 이유로 내세웠지만 국내외 여론의 압력에 밀려 마지못해 취한 조치의 성격이 짙었다. 이때 나병식도 박형규, 김동길, 김지하 등과 함께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그는 석방되어 나오자마자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민청학련 사건 수사과정에서 저들이 저지른 고문사실을 폭로하여 유신정권과의 투쟁의지를 만천하에 알렸다.

나병식은 이제 26세 약관의 나이에 재야의 중요인물이 되었으나 감옥 문을 나선 그에게는 가족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장도 없고, 또 공안기관의 일급 감시대상이 되어 있는지라 어디 마땅한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먹고 사는 돈벌이에 이골이 나 있었지만 더구나 이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체면차릴 여가가 없었다. 그는 마늘 수확 철에 농촌 농가에서 직접 구매해서 서울로 가져다 파는 마늘 장수도 하고, 여름철엔 수박장수도 했다. 한때는 합정동, 종암동에서 여동생과 튀김 포장마차를 하기도 했다.

생활전선에서 치열하게 일하던 그 시절에 나병식은 한 여인을 만나 사귀게 된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이대학보사 기자로 일하던 김순진이었다. 김순진은 나병식보다 2년 연상으로 대학원에서 구비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나병식이 75년 5월 서울대 5.22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후배 장만철(영화감독 장선우의 본명)을 숨겨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 나병식은 장만철을 서울의대 출신 의사 서광태 집에 숨겨주고 있었는데, 장만철의 애인이 이대에 다니는 김순진의 바로 아래 여동생이었다. 그래서 그해 여름 김순진이 동생의 심부름으로 장만철에게 소식이나 물건을 전하기 위해서 나병식을 자주 만났다.

김순진이 나병식을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72-3년 무렵 이대에 서울대 가면극회의 도움을 받아 가면극연구회가 만들어질 때 김순진도 후배 김은혜의 권유로 이 모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었다. 그러던 중 73년 어느 날 국립극장에서 김기수 선생의 봉산탈춤 공연이 있다고 해서 김순진은 서클 선후배들과 공연을 보러 갔다가 공연이 끝나고 찻집에서 나병식을 처음 보게 되었다. 서클 후배 강정례가 자기가 다니는 서울제일교회 대학생부 선배라고 소개해서 서로 인사를 나눴다. 이때 강한 인상을 받긴 했지만 그저 아는 사이로 있다가 장만철 일로 자주 만나면서 연인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다 75년 말 나병식이 ‘서울의대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배후로 지목되어 덜컥 구속이 되어버렸다. 장만철을 숨겨준 서광태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반공법으로 구속되었었는데,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사건으로 이미 유명해져 있는 나병식을 여기에 연결시켜 사건을 키우려고 한 것이다. 이때에도 나병식은 엄청나게 많이 맞고 고문을 당했다. 조사관이 요구하는 모든 걸 인정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정도로 심하게 고문을 당했지만 나병식은 끝까지 꿋꿋하게 버텨냈다. 결국 저들은 반공법은 적용하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나병식을 장만철 은닉 혐의로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나병식은 1976년 1월,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나병식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긴 했지만 그러나 김순진과 결정적으로 맺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순진은 재판에도 열심히 나가고, 몇 차례 감옥으로 면회도 갔다. 직계 가족 외에는 면회가 허용되지 않아서 나병식 여동생인 것처럼 하고 여동생 신분증으로 면회를 했다. 나병식은 순진이 독일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면회온 순진에게 ‘내 석방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갈 길 가라’ 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미 나병식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김순진은 감옥에 있는 그를 떠날 수 없었다. 그녀는 유학 대신 나병식과의 결혼을 선택했다.

 

‘엑소더스’와 ‘젊은 마늘장수’

감옥에서 출소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여름 나병식은 순진의 집에 찾아갔다. 순진과의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순진의 어머님을 찾아 뵈려는 것이었다. 이 때 마침 수박장수를 시작한 참이라 팔던 수박 중에서 제일 크고 잘생긴 걸 골라 선물로 들고 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수박이 잘 익질 않았다. 그렇치 않아도 허우대는 그럴듯하지만 가난하고 앞길이 꽉 막힌 징역잽이 병식에게 귀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못내 불만이었던 순진 어머니는 그래가지고 어떻게 처자식을 먹여살리겠냐고 지청구를 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뜻이 확고한 것을 안 어머니는 마지못해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이듬해 77년 11월 26일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열렸다. 이곳은 민청학련 사건 직후부터 목요기도회가 열려 구속자 가족들과 민주화운동 사람들이 모여 소식도 전하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받는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었다. 주례는 나병식의 부탁으로 박형규 목사가 맡았다.

나병식의 결혼 소식에 기독교회관은 2층 강당 안 200여 좌석은 물론이고, 통로와 바깥 로비까지 하객들로 가득 들어찼다. 2층 임시 신부대기실로 꾸민 방에서 신랑 나병식과 신부 김순진이 나와 결혼식장에 손목을 잡고 함께 입장했다. 식장 입구에도 사람이 가득차 있어 그 속을 헤치고 입장하는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입장하여 두 사람이 주례 앞에 서고, 박형규 목사의 기도와 주례사가 이어졌다. 축가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같이 옥고를 치른 서울대 후배 구창완이 불렀다. 축가가 특이하게도 영화 ‘영광의 탈출’에 나오는 ‘엑소더스’였다. 누가 어디에서 탈출하는 거지? 아마도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해방의 땅을 찾아가듯이 민주화를 향하는 한국 민중의 마음을 담으려 했을 것이다. 시인 이시영이 황명걸 시인이 나병식을 보고 쓴 ‘젊은 마늘장수’라는 시를 낭송했다. 나병식이 한때 생계수단으로 산지에서 마늘, 수박을 트럭으로 떼어다가 서울에 파는 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지은 시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이동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신혼 첫날밤을 보냈는데, 광주일고 후배 고영하를 비롯하여 동료 후배들 수십명이 떼로 몰려와 신혼방에서 밤새 술을 마시면서 신랑을 달아매고 발바닥을 때리며 난리법석을 피웠다. 그렇게 신혼여행 아닌 신혼 첫날을 보내고 근처 수유리에서 세들어 살고 있는 나병식 부모님께 신행인사를 하러 갔다.

 

‘풀빛’을 세워 전사(戰士)를 키우기로 결심하다

결혼을 준비하고 있던 77년에 나병식은 을지로 입구 지하상가에 맞춤 와이셔츠집을 차려 운영한 적이 있었다. 고향선배 김영철이라는 분이 소개하고 돈까지 빌려줘 시작한 것인데, 병식은 여동생을 데려다 가게를 보게 하였다. 가게 이름을 ‘풀빛’이라고 지었다. 한동안 민주화운동권 인사들이 오다가다 모이는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 가게는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되어서 결혼 후에도 한동안 계속했다. 그러다 1979년 당시 운동권 내에서 사회과학 출판 붐이 일었고, 나병식도 ‘전사에서 전사를 키우는’ 역할을 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출판사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을지로 가게를 정리하고 그 돈을 밑천으로 1979년 3월 내자동에 <도서출판 풀빛>을 열었다. 사무실은 김승균 선생이 하는 일월서각과 같은 건물 한켠에 자리를 잡았고, 국사학과 후배 이종범이 낸 동평사와 방을 함께 썼다.

나병식은 사업을 하면서도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1978년 5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나온 김병곤과 김봉우가 재구속된 것을 계기로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시인 고은의 집에서 모여 ‘민주인권청년협의회’를 창립했는데, 여기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 단체는 초대 회장을 정문화가 했는데, 이름을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으로 바꾸고, 이후 광주항쟁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재야운동의 선봉대로서, 또 학생운동 출신 청년들의 운동거점으로서 역할을 했다.

1980년 봄 전두환 신군부는 5.17 쿠테타를 일으키고, 이에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채 권력장악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그리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하고, 김대중. 문익환을 비롯한 수백명의 민주인사를 구속·수배했다.

이때 나병식도 곧바로 체포되어 합동수사본부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저들은 나병식을 광주일고 후배이기도 한 서울대 학생회장 심재철의 배후로 지목했다. 그를 아는 주위 사람들은 그가 이번에는 살아나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히 수배되었던 심재철이 자수하면서 자기에게 돈을 준 사람이 나병식이 아니라 이해찬이라고 진술함으로써 나병식은 가까스로 ‘사지(死地)에서 벗어났다.’

나병식이 풀려난 것은 잡혀간지 두 달쯤 지난 7월 초쯤이었는데, 그 사이에 아내 김순진이 시부모와 어린 큰아들 힘찬이와 함께 원당으로 이사를 갔다. 나병식이 잡혀가기 직전에 출판사에 긴급히 필요한 돈이 있어 망원동 전세금을 빼 거기에 보태고, 남은 돈으로 방값이 싼 원당에 방 2개 짜리 전세를 얻어 나가기로 계약을 했는데 이사를 앞두고 나병식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래도 어떻게어떻게 이사를 마치고 허술한 주변을 정돈하여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나병식이 괴나리봇짐 하나 달랑 들고 가족 앞에 나타났다. 갑자기 석방되어 집도 전화번호도 모르는 상태에서 물어물어 원당 집을 찾아 온 것이다.

 

『황토』, 『노동의 새벽』, 『넘어넘어』

합수부에서 풀려난 나병식은 다시 출판에 몰두하여 광주사태 이후 초토화된 진보적인 사회과학 출판계를 수습하고 재건에 나선다. 나병식의 풀빛은 돌베개, 광민사, 석탑, 한마당, 산하 등 1970년대 말부터 등장한 학생운동 출신의 새로운 사회과학 출판운동 그룹의 선두에 항상 서 있었다. 풀빛은 초기 일본어를 번역한 『현대의 휴머니즘』(1982),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1984) 등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고, 김지하의 『황토』와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 도 수십만부가 팔려나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풀빛이 우리 출판운동사에 뚜렷하게 각인될 수 있는 공헌이라고 한다면 광주의 활동가들이 공동 집필하고, 황석영이 감수하여 전남사회운동협의회와 황석영의 이름으로 발간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넘어』)의 출판일 것이다. 광주항쟁 직후부터 광주항쟁의 진상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광주의 정용화, 조봉훈 등이 자료를 모으며 시작된 이 책의 발간 작업은 3년여동안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1985년 4월 초 초고가 완성되자 당시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전청협) 의장이었던 정상용이 출판사를 물색하다가 광주일고 동기동창 나병식에게 부탁하였고, 나병식은 흔쾌히 수락하였다. 나병식은 이 초고를 황석영 작가에게 부탁하여 한달 동안 문장을 다듬고, 서문과 소제목을 붙이는 등 보완작업을 거쳐 원고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광주항쟁 5주년에 맞춰 5월 20일 초판 2만부를 찍어 녹번동 모 인쇄소에서 인쇄를 마치고 제본소에 넘겨졌는데, 어디선가 첩보를 입수한 경찰에 의해 전량 압수되었다. 발행인 나병식은 수배되었다. 그러나 나병식은 은신처를 옮겨다니면서 감시가 허술한 인쇄소와 제본소를 찾아 다시 책을 출판했다. 감시를 피하기 위해 표지에 칼라인쇄를 못하고 활자로 제목만 인쇄하여 출간해서 전국 서점에 비밀리 배포했다. 『넘어넘어』는 서점가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짧은 시간에 수십만부가 팔리는 지하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로써 그때까지 전모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광주학살의 참상이 국민 앞에 생생하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87년 6월항쟁 이후 조금 완화된 출판환경에서 광주항쟁의 기록을 집대성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전남대 송기숙 교수가 중심이 되어 5백여명의 광주항쟁 관련자들의 증언을 모은 『5.18민중항쟁사료전집』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원고지 2만 5천매 분량을 1,652쪽으로 엮은 방대한 자료집이었다. 풀빛 실무진들이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책을 내는 것을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나병식은 출판을 강행했다. 그것은 어쩌면 고향 광주와 열사들에 대한 그의 부채감의 발로였던 것 같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한국민중사’ 사건과 ‘한출협’

그는 풀빛을 경영하면서 여러 차례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받고, 수배도 되었지만 구속되지는 않았었는데, 그의 출판 작업을 눈여겨 보고 있던 서울지검 공안부가 1987년 2월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한국 역사를 민중의 시각에서 서술한 『한국민중사1,2』를 풀빛에서 발간한 것을 가지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나병식 사장과 발행인 홍석, 편집부장 김명인, 전 편집부장 박인배 등 6명을 구속한 것이다, 이른바 ‘한국민중사’ 사건이다. 이 사건은 출판탄압을 넘어 역사학계와 공안당국이 역사해석과 표현의 자유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여 세상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나병식은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8월 12일 석방되었다. 박종철의 죽음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6월항쟁 기간을 그는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나병식은 일찍부터 전두환 5공 정권하에서 압수 수색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발행인의 구속이 빈번한 현실에서 출판인들의 권리를 지키고 보호하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86년 6월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한출협)를 결성하는 데에도 앞장선다. 그리고 자신도 1988년 8월 여성백인회관에서 열린 3차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한출협 회장으로서 후배 유대기의 표현대로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넉넉한 자신감으로 동료 출판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질타하면서 출판문화운동의 격전장을 누볐다.’

나병식은 기념비적인 책들도 많이 출간하고, 출판문화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지만 한편 사업적으로도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영세한 사회과학 출판사 동네에서 풀빛은 항상 10여명의 직원이 바쁘게 돌아가는 비교적 규모가 큰 출판사였다. 한때는 영세 출판사들이 꿈꾸지 못하는 대작을 기획하고 추진할 수 있을만한 자금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부동산이나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고 오로지 좋은 책을 내는데 모두 재투자했다. 돈이 잘 벌린다 해서 외국여행을 다니거나,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아내 김순진은 그런 그에 대해서 “그에게는 돈에 대한 어떤 원칙이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잠바 입고 운동화 신는 이유

그의 검소하고 소탈한 생활태도는 정평이 나 있다. 특별한 자리 아니고는 양복을 입지 않았고, 대개 면 바지에 잠바 차림이었다. “내가 잠바 입고 운동화 신고 댕겨야, 잠바 입고 운동화 신은 후배들이 맘 편히 찾아온다.” 그가 궁금해 하는 한 후배에게 던진 말이었다. 아내가 어쩌다 마음먹고 좋은 옷을 사주어도 잘 입지 않았다.

그는 술도 양주나 와인은 좋아하지 않았고, 늘 김치찌개나 삼겹살에 막걸리, 소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특별한 경우 아니면 택시를 타지 않았고, 멀지 않은 거리는 버스도 타지 않고 걸어 다녔다. 걷는 것은 또한 그의 유일한 운동이었고, 건강비법이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래서 실제로 출판 일과 민주화운동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뜻을 같이 하는 선후배들과 어울려 바둑 두고 술 마시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일하고 노는 방식은 남다른 점이 있었다. 일에 몰두할 때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며칠씩 밤을 새우며 ‘끝장을 보았다.’ 출판사나 단체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는 후배들은 그의 그런 뚝심과 추진력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

노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취미가 없는 그였지만 바둑은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임재경, 성유보 선생, 이철, 유인태, 유초하, 이석표 등 바둑 좋아하는 선후배들과 어울려 자주 바둑을 두었는데 바둑을 시작하면 한두 시간에 끝나는 법이 없었다. 대개는 거의 날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해장국을 먹고 헤어졌다. 작가 김성동이나 역사가 이이화 선생처럼 때로 마음에 맞는 호적수를 만나면 아예 여관방을 잡아놓고 2박3일 내리 바둑을 두는 경우도 있었다.

술자리도 간단히 끝나는 법이 없었다. 대개 모임이 끝나고 저녁식사 자리에서 시작한 술자리는 2,3,4차로 이어졌고,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라 시내에서 술을 마시다 술자리가 12시를 넘을 것 같으면 자기 집으로 일행들을 몰고 갔다. 아내 김순진은 신혼 초에 나병식이 친구 후배들을 망원동 셋방으로 몰고 와 수없이 라면을 끓이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밤이 깊어 이제 막 꽃잠이 들려 할 때쯤 병식이 전화를 걸어 “여보, 나 다 와갑니다. 라면 물 올려 놓으세요.” 하고 잠을 깨워놓고, 물을 올려 놓고 기다리면 친구 후배들과 함께 몰려와 라면 안주에 밤새 술을 마시며 놀았다. 1982년 통금이 해제되고 난 이후에 집으로 몰려오는 일은 뜸해졌지만 밤새우고 새벽에 귀가하는 일이 많았다.

무슨 할 말이 많아서 밤새우길 그리 자주 했을까? 엄혹한 군사정권과 대항하며 사는 동안 서로의 신뢰관계를 확인하는 한 방법이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로 나병식의 가슴 속 깊은 곳의 어떤 응어리를 푸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런 ‘날밤새우기’ 속에서 때론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가 풀릴 때도 있었으니 나병식의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생활방식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천하장사 같은 체력을 가진 나병식이라도 그런 거듭되는 밤샘은 그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그것이 나중에 암 발병의 한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과거를 잊지 마세요’

나병식이 술자리에서 부르는 노래는 가히 일품이라 할만 했다. 84-5년 무렵 필자가 민청련 사회부장으로 민중투쟁 현장을 뛰어다닐 때 나병식 형이 가끔 민청련 상근직원들을 모두 초청해 고기집에서 고기를 푸짐하게 사 먹이곤 했다. 배가 부르고 술이 거나해질 때 즈음이면 으례 노래 한자리씩 돌아가며 부르는데 나병식 형의 18번은 항상 나애심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였다. 이 노래는 원래 한 많은 여인의 애상어린 노래인데도 나병식의 굵은 목청을 통해서 힘차면서도 빛나는 노래로 바뀌었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흘러~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로 시작하는 우렁찬 노랫소리는 술자리를 숙연한 감동으로 몰아넣곤 했던 기억이 난다. 아내 김순진도 양화대교 건너 공원 벤치에서 남민전 사건의 박석률과 함께 셋이서 이 노래를 부르던 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병식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과거를 잊지 마세요’로 바꿔 부르곤 했다.

나병식은 선배들에게 항상 깍듯하고 잘 모셨지만 후배들에 대해서도 항상 세심하게 뒤를 잘 챙겨주었다. 술자리가 파할 때면 집이 먼 후배는 택시비를 챙겨 주었고, 술이 취해 못 일어나는 후배는 여관에 재우거나 아니면 집에 데려와 재웠다. 술자리에서 억지를 부리다가 혼이 난 후배들도 간혹 있었지만 결국 이런 세심한 나병식의 마음 씀에 감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항상 일로, 운동으로 집을 비우기 일쑤고, 밤 세우고 새벽에 들어오는 일이 잦았던 나병식이었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끔찍할 정도였다. 아이들에게도 자주 전화하고 세심하게 챙겼다. 아이들의 순 우리말 이름 ‘힘찬’ ‘빛나’ ‘슬기’도 그가 직접 지었다. 출판사 사정이 어려울 때도 자신은 걸어 다닐망정 아내에게 줄 생활비만은 챙겼다. 그래서 김순진은 그런 그를 ‘가정적이진 않지만 참 가족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70-80년대 젊은 시절을 민주화운동과 출판운동에 헌신했던 나병식이 1990년대에 와서는 정치에 투신할 뜻을 두고 행보를 시작했다. 1992년 대선 때는 김대중 후보를 돕는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위원회’에서 언론대책특위부위원장 겸 정치연합팀장으로 활동했다. 1994년에는 광주지역 민주인사들 중심으로 ‘균형사회를 여는 모임’을 만들어 기획위원장으로 활동했고, 1997년 대선 때는 역시 김대중 후보를 지원하는 ‘정권교체 민주개혁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대선이 끝난 뒤에는 1998년 12월, 2000년 16대 총선을 내다보고 김대중 정부 개혁작업의 민간 파트너 역할을 담당하는 민주개혁국민연합(상임대표: 김상근, 이창복)을 결성하여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년여 기간 공들여 전국적인 조직을 건설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하였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2000년 4월 총선에서 고향인 광주 광산구에 민주당 공천신청을 냈으나 공천에서 떨어졌다. 나병식에게는 쓰라린 경험이었다.

2001년 9월 후배 문국주와 함께 민주화운동 진영의 오랜 숙원이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건설에 착수하여 설립준비 기획단장을 맡았다. 그리고 11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창립하면서 박형규 목사를 초대 이사장으로 모시고, 김용태와 함께 상임이사에 취임하여 초기 기념사업회 사업을 총괄 지휘하였다. 그리고 3년간 우리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업이 제대로 뿌리내리게 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2004년 나병식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사표를 내고 17대 총선에 다시 한번 도전장을 냈으나 납득하기 어려운 과정을 거쳐 낙천했다. 공천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던 그는 무소속 출마를 결심하고, 총력을 다해 선거를 치루어 2만 2천여표를 받는 선전을 했으나 결국 민주당 전갑길 후보에게 졌다. 현실정치의 두터운 벽은 끝내 그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일생을 남에게 머리 숙이지 않고 대인으로 당당하게 살아온 그에게 현실정치라는 무대는 애초에 걸맞지 않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암 발병과 투병

2010년 10월,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김근태 전 의원의 아들 병준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김순진은 딸 빛나의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빛나가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서 나온 건강검진권을 가지고 분당 모 병원에 아버지 나병식을 모시고 가 검진을 받았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간에 뭐가 발견됐는데 큰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아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소 병식의 불규칙한 생활습관과 과음 때문에 늘 그의 건강을 염려해왔던 순진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하고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곧바로 딸과 함께 나병식을 현대아산병원으로 데려가 대장내시경 등 정밀진단을 받게 했다. 결과는 역시 좋지 않았다. 직장에서 시작한 암세포가 대장으로 전이되어 용종이 많이 발생했고, 간에 까지 전이된 말기암이라는 것이었다. 진단을 담당한 젊은 의사는 순진에게 상태가 워낙 나빠 낫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순진은 이 말은 본인에게는 전하지 않았다.

수술을 할까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수술하기로 결정했다. 직장과 대장, 간 일부까지 제거하는 대 수술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또 나병식 본인도 ‘이까짓 암쯤이야!’ 하듯 의연했다. 오히려 문병온 지인들에게 ‘일타 삼피’로 한꺼번에 해결했다고 너스레를 떨어 긴장하는 지인들을 웃겼다.

이후 본격적인 투병이 시작되었다. 출판사 일에서도 손을 떼고 서소문 삼성아파트 집을 팔고 파주 심학산 자락 약천사 바로 밑에 단독주택을 마련했다. 여기서 텃밭도 가꾸고 손님도 맞으며, 항암치료에 전념했다.

3년여 투병과정은 가히 ‘영웅적’이라 할 만했다. 술과 담배도 끊고, 독한 항암제 투여와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몸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지만 그는 전혀 위축되거나 거리낌이 없었다. 여전히 의연하고 당당했다.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평소 그대로 행동하여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오히려 어려움을 당한 선후배들에 대해서 여전히 관심을 갖고 챙겼다. 민청학련 사건의 동지이자 친구인 장영달이 경상남도 함안에서 어려운 선거를 치를 때는 직접 내려가 격려를 해주었다. 병색이 완연한 친구의 격려를 받은 장영달은 그저 감읍할 뿐이었다.

나이가 차서 결혼할 때가 되기는 했지만 자녀들의 결혼도 앞당겨졌다. 3년 사이에 둘째 딸 슬기를 시작으로, 아들 힘찬, 큰 딸 빛나 순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다행인 것은 나병식이 이 세 아이들의 혼주로 결혼식을 주관했을 뿐만 아니라 이 자녀들의 첫 번째 아기들을 모두 품에 안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길을 떠나다

2013년, 투병 3년째가 되면서 병세가 악화됐다. 골수염이 발견되었고, 암세포가 폐로까지 전이된 것이 확인되었다. 아내 김순진의 헌신적인 간호와 본인의 강한 투병의지로 조금 호전되는가 싶었던 어느 가을 날 드디어 암세포가 성대로까지 침투하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집 앞뜰에 식탁 탁자를 놓고 심학산을 바라보며 틈만 나면 우렁차게 “형님, 병식입니다.”라고 활발하게 전화하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아내 김순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순간이 가장 슬펐다고 전한다.

나병식은 2013년 12월 20일 아침 8시 28분 아산병원 병실에서 자신의 기념사업은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운명했다. 운명하기 전날 함세웅 신부가 병실에 와서 마지막 병자성사를 집전했다.

장례는 신촌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서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2월 23일 아침 7시 세브란스병원에서 영결 미사를 갖고, 그가 말년에 봉직했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정동 건물 앞마당에서 노제가 열렸다. 그리고 벽제화장터에서 화장을 마친 유골은 부모님과 조부, 증조부를 모신 파주군 광탄면 천주교 나자렛 가족묘원에 안장되었다. 그러다가 2년 후 2015년, 광주의 민주화 동지들과 지인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서거 2주기에 맞춰 광주에 있는 국립 5.18 민주묘지로 옮겨져 민주화운동 동지들 곁에 안장되어 영면에 들었다.

권형택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민청련 부의장, 민통련 사무차장, 현 이야기채록사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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